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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책표지.
 <인기 없는 에세이> 책표지.
ⓒ 함께읽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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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처음으로 명쾌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오늘날 그다지 인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덧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근거였기 때문이다. 대철학자님이 인간 이성 찬양의 근거로 내세운 것치고는 단순하다. 그가 오늘날의 계산기를 보시면 뭐라 하실까.

175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러자 미국와 영국의 성직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벼락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불경죄나 다른 무거운 죄를 벌하려고 인간에게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막다니? 그들은 피뢰침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경한 물건이라며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어떤 수녀들은 늘 목욕 가운을 입고 목욕을 한다. 그 이유를 물으면 "세상에, 하느님이 계신 걸 잊으셨군요!" 하고 대답한다. 그들은 신성한 하느님을 음탕한 관음증 환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상 온갖 것과 모든 곳을 꿰뚫어 보시는데, 고작 목욕 가운 한 장으로 그 시선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이성적이고 불멸의 영혼을 가졌으며, 신성한 정신을 가졌다는 인간이 얼마나 허술한 존재들인지를 날카롭게 꼬집는 이야기들이다. 이 책에서 분량이 가장 많으면서도, 촌철살인과도 같은 위트와 유머가 넘쳐나는 7장에 실려 있다.

러셀 '20세기의 볼테르'로 불렸다

이 책의 저자는 버트런드 러셀이다. 그는 변화무쌍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러셀은 영국 귀족 가문에서 전직 총리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반골적인 운동가로 변신했다. 보수적인 신사였다가 진보적인 신식 도덕의 열혈 지지자로 바뀌었다. 정통 철학 사조의 옹호자였으면서도 '괴짜' 불평꾼으로 폄훼당했다. 평생 동안 칭송과 욕설, 존경과 경멸, 동조와 비난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이 책의 2009년 판 서문을 쓴, 조지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커크 윌리스가 러셀을 소개하는 내용 중 일부다.

러셀은 '20세기의 볼테르'로 불렸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붓은 철학과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등의 분야를 두루 거쳤다. 98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인류의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가치를 위해 '전투적인' 삶을 살았다.

이 책에는 그가 평생을 지키고자 투쟁했던 가치들, 즉 지성을 추구할 자유, 민주주의 정치, 사법 정의, 과학의 진보, 사회 차원의 복지, 개인적 관용 등에 관한 논리적이고 확고한 신념이 배어 있다. (중략) 러셀이 그때껏 지켜왔고 또 평생 동안 추구했던, 더 나아가 반드시 새 세상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진보적 가치들을 다시금 굳건하게 밝히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8쪽; 조지아대학교 사학과 커크 윌리스 교수의 '2009년판 서문' 중)

이 책은 1950년대 중반 러셀이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보낼 때 출간되었다. 러셀의 책을 간행하던 출판사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출판사는 러셀에게 아직 출간하지 않았거나 세상에 밝히기를 저어하는 글이 있으면 한데 모아 조금 기발한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자고 제안한다. 러셀은 즉각 찬성한다.

비평가들과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러셀이라는 이름을 세계적으로 널린 <서양철학사>의 명성 못지않았다. 만연체이면서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문장(이는 상당 부분 전업 번역가인 옮긴이 장성주 선생의 공력 덕분이리라), 적재적소에 실린 빛나는 경구들, 번뜩이는 재치와 뼈 있는 농담 속에 담긴 풍자 의식 등은 각 장의 묵직한 내용과 주제들을 즐겁게 고민하도록 만든다. 글의 목적은 진지하지만, 어조는 (그 자신의 말처럼) 경망스럽기 때문에 재미있다.

그(글의-기자)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장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간혹 경망스러워 보이는 글이 있을지언정 원래의 목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지했다. 경망스럽게 쓴 까닭은 엄숙하고 오만한 자들을 상대로 더욱 엄숙하고 오만하게 싸워봤자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23쪽; 저자의 '여는 글' 중)

글머리에 소개한 7장에는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총 12개 장의 길고 짧은 글에서 가장 인상적이며 재미있게 읽히는 대목이다.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7장은 인류가 저지르는 실수나 바보짓, 어처구니 없는 생각 등을 꼬집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지적 쓰레기'들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러셀 식의 해법도 제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러셀의 말을 빌리면 "그가 누리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허튼소리를 한가득 남겼다"고 전한다. 그는 남성은 여성보다 피 색깔이 더 어둡다거나, 여성은 남성보다 치아 개수가 더 적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러셀은 말한다.

관찰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당신 스스로 관찰하라. (중략) 그(아리스토텔레스-기자)는 자기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저지르기 쉬운 치명적인 실수이다.(217쪽)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자인 러셀다운 해법이다. 물론 현실에는 경험(관찰)을 통해 검증하기 힘든 문제들도 많다. 하지만 러셀은 이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 러셀은, 가령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이 편견인지 스스로 알아차리려면 자신의 의견과 상반된 의견 때문에 화가 나는지 여부를 확인해보라고 말한다. 만약 화가 난나면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견해에 합리적 근거가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러셀은 특정한 독단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속된 사회적 집단에서 벗어나 다른 집단이 지닌 견해를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보기에 그 사람들과 신문이 미쳤거나 심술궂거나 사악하다면, 당신 역시 그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러셀의 말은, 뼈아프지만 새삼 곱씹어봐야 하는 대목이다. 러셀은 우리 자신의 자부심을 부추기는 견해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간 일반의 자부심을 상대하는 방법은 인간이 우주 한구석의 자그마한 별에서 아주 잠시 살다가 가는 존재이며, 따라서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해파리보다 우월한 만큼 우리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가 우주 어딘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뿐이다. (221쪽)

러셀의 미덕은 광기의 시대에 진정한 인간 이성의 힘을 믿고,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국가나 정부에 대한 그의 철저하리만치 비판적인 시각이나(이 때문에 그는 감옥살이도 했다-기자)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가 보기에 정부가 대중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우리가 처한 불행의 근원 가운데 하나이다.

경험론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와 모순되지 않다

그래서 러셀은 경험론적 자유주의를 강조한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경험론적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러셀의 자유주의는 나도 살고 너도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공공질서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관용과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 제도에서는 중용을 추구하며 광신을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광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치판이 혼탁하다고 냉소와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진정한 이성에 대한 믿음과 진보에 대한 확신,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갈망을 한시도 놓아서도 안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양식을 가진 이들이 한눈을 팔면 세상은 언제든지 비극적인 광기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그들만의 리그'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아무런 존재감이나 영향력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인기 없는 에세이'의 반어법을 재빠르게 눈치 챈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다. 진정한 인간 이성의 힘과 진보의 가치를 믿는 이들에게 많은 지혜를 안겨주리라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인기 없는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음 | 함께읽는책 | 2013. 8. 26. | 373쪽 | 1만 7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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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함께읽는책(2013)


태그:#<인기 없는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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