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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쓰게 된 배경

이 글은 여타의 상품 구매기가 아니다. 동종 물품 가격 비교나 다른 기종 품질 비교, 구매후기 등등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을 것이다. 그저 미치도록 '에쎄랄(DSLR의 은어)'이 갖고 싶었던 한 남자의 치밀한 구매 계획서라고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비뚤림 없는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확신하며 살고 있는 어느 한 남자의 에쎄랄 구애기를 이제 시작한다. 부디 이 글이 경제권을 빼앗긴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원하는 상품을 '득템'하는 기회가 열리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먼저 배경 상황 설명이 약간 필요하겠다. 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삼십대 후반의 남성이고, 사자 같은 마누라와 다람쥐 같은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다만, 수많은 그 나이 대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경제권에 있어서는 전권을 이양하고 용돈을 타서 쓰는 착한 남성이다. 결혼 이후로는 현금 지급기에서 내 손으로 출금해본 일이 거의 없는 경제 관념 제로에다가 받는 용돈의 90프로는 술값으로 지출하는 저축 불능자이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 너무 편하고 좋다. 할 일도 많고 볼일도 많은 세상에 대출이자 갚는 날이 언제고, 핸드폰 요금 결제일이 언제인지 구구절절 기억하고 살기에 좀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경제 상황에서 문제가 도래할 때가 종종 있으니, 이번처럼 무언가 목돈이 들어가는 상품을 구매하고자 할 때 또렷한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번 내린 지름신의 발길을 되돌려서 불타는 욕망의 화신을 자결 시키기엔 내 의지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 결론은? 어떻게든 아내의 환심을 사서 원하는 상품의 구매를 유도할 수밖에.

DSLR 카메라는 단순히 환심을 유도해서 구매하기에는 간극이 너무 큰 물건이었다. 첫째로, 우리집에 굴러다니는 '똑딱이' 카메라 두 개가 발목을 잡는다. 둘째, 요즘 웬만하면 스마트 폰으로 사진 찍지 누가 무겁게 에쎄랄을 들고 다니나. 셋째, 초보자용 에쎄랄도 상당히 고가라는 점. 거기에 렌즈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기둥 하나 뽑는 건 시간 문제라는 점까지. 어느 한 구석 만만해 보이는 곳이 없다.

DSLR 카메라에 밀려 서랍에서 나뒹구는 똑딱이 카메라들
▲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 DSLR 카메라에 밀려 서랍에서 나뒹구는 똑딱이 카메라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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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해서 아내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뭐 둘 다 없는 집 자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중산층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여전히 인터넷 쇼핑으로 만 원짜리 옷을 산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고, 이동식 차량에서 5000원 주고 산 아이들 내복에 대만족을 느끼는 캐릭터다. 음식을 남게 시키면 눈을 부릅뜨고, 덤으로 붙어 오는 상품들에 애착을 갖고 때론 집착하는 똑순이 스타일인 것이다.

그런 아내에게서 위와 같은 상황 하에 시가 백만 원 상당의 에쎄랄 구매를 허락받는다는 것은 알카트라즈 감옥을 헤엄쳐서 탈옥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하는 기종의 DSLR을 손에 거머쥐었다. 차근 차근 아내의 마음을 공략하는 과정을 공개한다.

2. 전략적 접근

DSLR 카메라의 구입을 희망하게 된 계기는 누군가 DSLR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스마트 폰으로 보내준 후부터였다. 그전까지는 스마트 폰 카메라에 대만족하며, 나름 작품 사진이라고 찍는 흉내도 내보곤 했는데, 스마트 폰에 저장된 에쎄랄 사진의 선명함이나 전체적인 느낌을 보고 나니 이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에쎄랄 바라기는 시작되었다.

1) 모성애를 자극하라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제 아무리 독하기로 소문난 아내들도 아이들 먹거리는 유기농을 찾고, 공부시키는 데 집 팔고 논 팔기 마련이다.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아내의 마음이 아닌, 어미의 마음을 흔들어라. 왜 우리 아이들의 사진은 늘상 뿌옇게 나와야 하는 건가? 왜 우리 아이의 움직임은 사진으로 잡아낼 수 없는 건가? 왜 우리 애들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릿한 건데?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기에 요즈음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매우 효과적이다. SNS를 하지 않는 아내도 주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남편의 글에는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SNS는 K-스토리인데, 그 곳에 올렸던 글 몇 편을 소개한다.

여보, 우리 아이는...

- 스마트 폰으로 아이의 얼굴을 찍을 순 있지만,
아이의 영혼을 담아내진 못합니다
똑딱이 카메라로 아이의 웃음을 담아 낼 순 있지만,
아이의 기분까지 그려내진 못합니다
여보,
우리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들을
고이 간직하고 싶어요
우리도 이제는 DSLR....

일행이 찍어서 보내준 DSLR 사진
▲ DSLR에 찍힌 둘째와 나 일행이 찍어서 보내준 DSLR 사진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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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이모가 좋다고 했다
- 아이는 이모의 친절함이 좋았나 보다
아이는 이모의 맑은 웃음이 좋았나 보다
아이는 이모의 애정 어린 눈빛이 좋았나 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이는,
이모가 찍어주는 사진이 가장 좋았나 보다
이모는 엄마, 아빠에겐 없는
디에스엘알 카메라가 있었으므로... 

이모가 찍어서 보내준 DSLR 사진
▲ DSLR에 찍힌 둘째 아들 이모가 찍어서 보내준 DSLR 사진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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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시리즈물로 대여섯 편 정도의 글이 더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이 글들의 핵심은 누가 봐도 아이에게 맞추어져 있다. 우리 아이에게 결여된 것, 다른 집 아이들과의 차별성, 낙후된 촬영 환경을 집중적으로 드러내어 어미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1단계에서 흔들린 심장은 파문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이때 주변 지인들의 충동질이 큰 몫을 차지한다. "좀 사줘요, 00엄마", "제수씨, 그냥 하나 사주세요"라는 지인들의 댓글은 천군만마보다 더한 지원군이다.

2) 현실적 필요성을 인지시켜라
1단계 작전에서 약간의 움찔함을 보인다면 이제는 좀 더 본격적으로 필요성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면 발품도 팔아야 한다. 유치원에 학부모가 참가하는 날이면 금상첨화다. 요즘은 아이들 재롱 잔치도 망원 렌즈로 찍기 때문에 분명히 무기처럼 생긴 DSLR 카메라를 들고 오는 학부모들이 있을게다.

물론 우리 집은 없으므로 스마트폰을 최대한 부끄러워하며 꺼내든다. 눈치 챘겠지만 당연히 촬영 버튼 누를 때 약간의 흔들림을 동반한다. 그리고 아이가 최대한 움직일 때 찍어라. 어떤 사양의 스마트 폰도 동영상이 아닌 이상 모션 캡쳐 기능은 없다. 그러고는 온통 뿌연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고는 한마디.

"아빠가 잘 찍어주고 싶었는데...."

유치원 재롱잔치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목표물을 접수하고자 한다면 사전에 늘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스마트 폰 배터리는 가급적 숨 넘어가지 않을 정도를 유지해야, 결정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찍고자 할 때 전원이 나가거나 플래시가 터지지 않게 된다. 이 점을 십분 활용하라. "아빠가 꼭 찍어주고 싶었는데..." 가급적 말꼬리를 흐려야 여운이 깊게 남는다.

스마트 폰으로 찍어서 흔들린 사진
▲ 유치원 직업 한마당 스마트 폰으로 찍어서 흔들린 사진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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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협상에 필요하다면 희생도 감수하라
2단계까지 충실히 진행했다면, 이미 아내의 마음 속은 시점을 조율할 뿐이지 구매에 대한 의욕은 충분하기 마련이다. 여전히 시큰둥하다면 두 번째 단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이다. 지나가는 말로 "그거 얼만데?"라고 묻거나, 자꾸 스마트 폰의 흐릿한 사진을 보며 고개를 젓는 리액션을 보인다면 그때가 바로 3단계, 협상의 시기다.

협상의 기본은 '윈윈' 전략. 이쪽에서 어느 정도 내놓는 게 있어야, 상대편에서도 덥석 물게 아닌가? 나의 작전은 일주일간 술 먹는 횟수를 줄이겠다는... 약간의 무리수를 던졌다(물론 건강 상의 문제도 좀 있긴 하지만). 한달간 음주 쿠폰을 넉 장 발급해주고 네 번 이상의 음주 시에는 회당 벌금 10만 원, 쿠폰이 남을 경우는 현금으로 교환. 이 정도 술 안 먹고 노력하겠으니, 부디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시오, 라는 고도의 압박성 비즈니스라고 볼 수 있다.

한달에 네 장 쿠폰을 발급 받기로 협상
▲ 음주 허가 쿠폰 한달에 네 장 쿠폰을 발급 받기로 협상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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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 포인트는 지킬 만한 약속을 하라는 것. 신용 사회에서 거짓을 남발하면 다음 기회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이번 기회에 금연에 도전하고 싶으면 금연을 타이틀로 걸고, 몸무게 감량이라거나 식스팩 만들기 등 실현 가능하면서도 가족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내세우면 아내들은 대부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3단계 협상을 제안하고, 다음날 즉시 DSLR 구매에 성공했다.

3. 구매 후 소감

참고로 나는 '기계치'다. 그저 DSLR 카메라의 화질이 좋아서 사고 싶었을 뿐, 스마트 폰 조작도 물어물어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 배운 사람이다. 이런 내 품에 안긴 DSLR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박스의 포장을 뜯고 나서 제일 먼저 눈길이 간 건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 가방이었다. 카키색의 깜찍한 가방이 너무나 맘에 들어 카메라는 안중에도 없이 가방만 몇 번을 고쳐 멨다. 그리고 정말 독한 마음으로 사용 설명서를 읽기 시작하여 새벽 두시까지 열심히 읽었지만...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다음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찍다 보면 알게 된다'였다. 그래서 요즘 나는 그저 찍고 있다.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태그:#DSLR 카메라, #음주 쿠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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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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