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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표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표지.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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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과장', '축소', '누락', '편파 해석', '용어 혼동', '오류' 딱지들이 붙어 있다. '부실', '불량', '수준 이하'라는 단어들도 따라다닌다. 역사학계에서는 '상상', '발명'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야권이나 진보 진영에서는 '우편향'이라는 단어를 외치고 있다. '제2의 국치'라는 어마어마한 표현까지 등장했다. 교과서 검정 합격 취소와 국편위원장 사퇴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교학사 판 고교 <한국사> 덕분에 뜨거웠던 '석기시대'는 순식간에 빙하기가 돼버렸다.

어떻게 이토록 '창의적인'(?) 교과서가 까다로운 검정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교학사 교과서 파문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가장 큰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 수상쩍은 단서들이 보인다.

역사 교과서 검정 업무가 한국교육과정평가원(교평원)에서 국편으로 넘어간 것은 2011년 1월이었다. 검정 심사의 전문성 강화가 이유였다. 이번 역사 교과서의 검정심의위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8명이었다. 기존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위원은 위원장 포함 12명이었다. 기존 교과서는 근현대사 중심이고 이번 교과서는 근대 이전까지를 망라한 것이다. 다뤄야 하는 범위가 늘었으니 인원이 느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수가 줄었다.

물렁한 검정 심사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2013년 국어와 도덕, 사회 교과의 평균 합격률은 66% 정도였다. 세 권 중 한 권 정도로 탈락해야 하는 비율이다. 하지만 이번 한국사 교과서는 9종이 지원해 8종이 최종 합격했다. 거의 90%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봐주기 검정 심사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발명'된 교학사 교과서마저도 합격했는데 유일하게 탈락한 역사 교과서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1억 6000만 원 정도의 거금을 들여 준비한 교과서가 탈락한 출판사는 최근의 뜨거운 논란을 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차후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더 중요한 문제는 논란 한가운데 서 있는 저자들의 태도

한편에서는 검정심의위원들의 성향에 대한 말들도 나오고 있다. 검정심의위원장을 맡은 이는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교수다. 그는 2009년 당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128명 중 한 명이었다. 이들 128명은 당시 전국적으로 수천 명의 교수가 동참한 국정쇄신 요구 시국선언을 비판하는 서명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현대사 분야의 유일한 연구자로 심의위에 들어가 있는 김수자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교수는, 박근혜 캠프 중앙선대위 의장 출신으로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좌파와의 역사전쟁에서 승리하자'며 발족한 근현대사 연구모임을 주도하는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의 제자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 검정에 대해 특혜·부실·깜깜이·인정 심사 외에 '정치적인 검정'이라는 비판들이 나오는 이유들이다. 최근 논란과 관련하여 "현재로선 검정심의위 절차는 다 끝났다, 표절 부분은 잘 모르겠다"고 회피하듯이 말하는 하우봉 전북대교수의 발언은 상징적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심의위는 할 일을 다했다. '공식적으로는' 검정심사의 전 단계를 절차에 따라 모두 밟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자. 부실·정치 검증과 같은 검정 과정상의 문제는 다른 경로로 확인하여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저자들의 태도다. 그중에서도 이번 교학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분 집필자인 이명희 교수의 행태는 참으로 가관이다. 안하무인과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올림픽 금메달 감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보수·우파 진영의 역사학계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새누리당 역사교실'은 '좌파와의 역사전쟁 승리'를 독려하는 김무성 의원이 조직한 강연 모임이다. 예의 '좌파와의 역사전쟁 승리' 발언은 이 모임의 첫 행사가 열렸던 지난 4일 나왔다. 이명희 교수는 이 모임의 두 번째 모임에 초청되어 강연을 했다. 이 초청 강연에서 이 교수는 '한국사회의 문화 헤게모니와 역사인식'이라는 발제문을 배포했다.

그는 발제문에서 좌파가 '범 문화계 진지구축'을 완료하고 후속 세대를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출판계 9 대 1, 예술계 8 대 2, 교육·언론계 및 연예계 7 대 3, 학계 6 대 4 등으로 좌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자신만의 '헤게모니 수치'를 강조했다. 의식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헤게모니가) 좌파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도 말했다.

발제문의 압권은 "현 국면이 유지되면 10년 내 한국 사회의 구조적 전복이 가능하다"는 대목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이념 관련 분야는 좌파가 이미 절대적 다수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래는 자신들의 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의 검정 통과와 보급은 현대사학회(지금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학회다)의 문제제기에 대해 국민(?)이 인정한 것이고 좌파의 역사인식 틀이 붕괴된다는 의미라고 강변했다.

'격문'에 가까운 말들도 쏟아냈다. 그는 대통령 직속으로 이념·문화 담당 특보를 두고, 국회는 대한민국사편찬법을 제정하며, 민간 차원에서는 보수·우파 진영의 역사학계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대체 이런 도도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 인맥인 이선근은 박정희의 유신 이념을 정초한 이데올로그였다. 이선근은 한국 고유의 정신과 이념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초대 원장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이념·문화 담당 특보 신설을 강조하는 그는 혹시 2013년의 '이선근'이 되려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대한민국 역사 교사들의 지성과 양심을 기대한다

지금 그는 자신이 쓴 교과서에 대한 '발명'이나 '상상'이라는 식의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가 신봉하고 있을 게 틀림없는 한국식(!) 보수·우파의 역사관으로 무장했으니, 교과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길까. 최근의 파문을 '좌파 세력의 공격'이나 '좌파의 불안감과 초조감' 등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 그는 확실히 우파 이데올로그로서의 사명감에 불타 있는 듯하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어처구니없는 사실 관계의 오류나 명백한 편파·왜곡에 대해 그 어떤 사과 한 마디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지금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의 '선언'을 따라 '좌파와의 역사전쟁'에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 전의를 어떻게 꺾어야 하나.

역사 교과서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선택한다. 그들이 최소한의 객관성과 공정성만 발휘하면 된다. 그러면 심의 과정에서 다른 교과서보다 최대 두 배 이상의 오류가 나왔고, 합격본에서 중요한 잘못만도 298군데에서 발견되었으며, '발명'과 '상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교학사 교과서는 결코 채택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 교과서이니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 조금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이번의 검정 통과에 대해 '제2의 국치'라는 비판을 받고, 일본 역사 왜곡의 대명사인 후쇼사 것보다 더 '친일'이라는 평가를 받는 교학사 교과서는 결코 단 한 명의 학생들 손에도 쥐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 교사들의 지성과 양심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교학사 고교 <한국사>, #이명희 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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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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