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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13일) 오후, 지루한 장맛비가 잠깐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꼭 한 번 들르리라 벼르던 창덕궁후원입니다. 축축한 흙길을 걸으며 물이 흐르는 개울을 보고 싶었지요. 부지런을 떨어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먼저 응봉 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흐르는 명당수, 금천(禁川)을 건너봅니다. 요새 금천에 물이 말라 금천교와 서수(瑞獸)가 모두 목말라했지요.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제법 큰물이 금천을 흐르고 물결도 냅니다. 북쪽다리 밑 거북은 물에 막 뛰어들려 하고 남쪽 돌짐승은 물을 보고 좋아 합니다.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 금천답습니다
▲ 창덕궁금천과 금천교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 금천답습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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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장문(肅章門)을 지나 후원으로 가는 오르막 돌담길을 걸어봅니다. 원래는 대조전(大造殿) 뒤뜰에 있는 추양문(推讓門)을 통해 후원으로 가야 제 맛인데 추양문은 개방을 하지 않지요. 대조전을 끼고 도는 돌담길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습니다.   

후원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 부용지(芙蓉池)입니다. 지하수부족으로 연못이 마른다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연못에 물이 충분합니다. 이무기 모양의 입수구(入水口)에서는 서쪽에서 흘러온 물을 받아 계속 토해내고 있습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연못은 흙물입니다. 일행(一行)은 물이 맑지 않아서 실망한 눈치인데, 오히려 흙탕물과 부용정을 함께 보면 더 멋있습니다. 부용정은 이름대로 활짝 핀 연꽃처럼 보이거든요.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말입니다. 

 흙물이어서 부용지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 부용지와 부용정 흙물이어서 부용지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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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지 북쪽언덕에 있는 주합루(宙合樓)는 몸집이 커서 부용정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큰 몸집만큼이나 정조의 개혁의지가 강한 것처럼 보여 기분이 좋습니다.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은 어수문(魚水門)입니다. 부용정이 정자의 백미 라면 문의 백미는 어수문입니다. 어수문 옆에 몇 해 전에 취병(翠屛)으로 심은 조릿대는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군요.   

부용지 북쪽에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이 있습니다. 예쁘기로 치면 애련정을 따라올 정자가 없습니다. 작은 몸집에 오밀조밀한 장식이 곁들여진 '얼짱'정자이지요. 모양이 예뻐 우리나라 곳곳에 애련정을 닮은 정자를 짓고 있습니다.

애련지로 흘러온 개울을 거슬러 가봅니다. 도랑은 연경당(演慶堂)으로 이어집니다. 서쪽동산에서 흘러온 물을 동쪽으로 돌려 연경당 대문 앞을 지나 애련지로 흘러가게 하였지요.
인공으로 만든 물길이지만 이 정도는 자연도 너그러이 봐줍니다. 애련지에서 연경당으로 가려면 개울을 따라가야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연경당 앞을 지나 애련지로 흘러갑니다
▲ 애련지로 흐르는 개울 연경당 앞을 지나 애련지로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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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당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에 들어서려면 실개울에 걸쳐있는 돌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이 실개천이 명당수 금천이고 다리는 궁궐의 금천교와 같습니다. 다리 앞 석함(石函)에 네 마리 두꺼비가 비오는 날 시골 마당에 놀러 나온 냥 경계를 풀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어요. 두꺼비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오늘은 잊어버립시다. 그냥 귀엽게 봐주면 되겠지요.

비가 와서 어디 바깥에 나가려나봅니다
▲ 연경당석함 두꺼비 비가 와서 어디 바깥에 나가려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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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당은 멀리서 바라보는 운치의 멋이나 그 속에 몸을 담고 느끼는 즐거움으로는 만족 못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살고 싶고 갖고 싶은 그런 집입니다. 사고석담에 괴석, 큰 나무 옆에서 나이 들어가는 굴뚝, 사랑채의 합각과 격 높은 팔각문살, 선향재(善香齋)뒤뜰의 화계 등을 보고 있으면 막연한 행복감에 젖습니다. 사랑이 지나치면 소유욕이 생기나 봅니다. 사물화(私物化)의 욕구가 생기는 것은 평범한 나로서는 자연스런 감정일지 모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마음이 심란할 때 언제든 찾아와 쉬고 싶은 소박한 욕심을 부려보지만 현실은 지나친 욕심으로 치부합니다.  

연경당은 멀리서 바라보거나 느끼는 즐거움으로 만족못합니다. 거기에 살고 싶고 갖고 싶어지거든요
▲ 연경당 정경 연경당은 멀리서 바라보거나 느끼는 즐거움으로 만족못합니다. 거기에 살고 싶고 갖고 싶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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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당 동북쪽 모퉁이에 농수정(濃繡亭)이 있습니다. 연경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인데 올라갈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농수정 옆에 있는 문은 관람지(觀纜池)와 존덕지로 통합니다. 문을 나서면 오른쪽에 화사하면서도 단출한 승재정(勝在亭)이 관람지를 내려다보고 있지요.

관람지는 표주박이나 한반도처럼 생긴 것이 다른 연못하고 좀 다릅니다. 연못이 다르니 관람정 정자도 다른 가 봅니다. 평면은 부채꼴, 지붕은 삼각형 두 개, 사각형 하나, 부채꼴 하나로 이루어져 독특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정자입니다. 정자를 중심으로 연못 멀리까지 보는 맛이 아주 좋습니다.

연못 같이 정자도 독특합니다
▲ 관람지와 관람정 연못 같이 정자도 독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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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지 위에는 존덕지(尊德池)와 존덕정이 있습니다. 숲속에서 흘러온 물이 세차게 존덕지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장마철에나 구경할 수 있는 장면이지요. 존덕지 물이 넘치면 도랑타고 관람지로 흘러갑니다.

존덕정은 평면이 육각형이어서 육우정 혹은 육면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처마 아래 퇴칸에도 지붕을 만들어 마치 지붕이 두 개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부도 청룡, 황룡을 화려하게 그려 넣어 다른 정자와 격을 달리하였습니다.

존덕정 내부에는 깨알 같이 적힌 정조의 자서(自序)가 붙어 있습니다. 개혁에 대한 정조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현판이지요. 정조는 스스로 '만 갈래의 시내를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이고 싶어 했습니다. 실제로 절대 권력을 가졌다면 스스로 이런 자호를 쓰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오늘 세찬 물줄기를 보니 정조의 한을 씻어 보내는 것 같아 기분 좋습니다. 존덕정 옆에 폄우사(砭愚榭)라는 맞배지붕 정자가 있습니다. 이름대로 개혁을 반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침을 한 대 놔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겹지붕 존덕정과 간결한 맞배지붕 폄우사가 대조를 이룹니다
▲ 존덕정과 폄우사 겹지붕 존덕정과 간결한 맞배지붕 폄우사가 대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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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덕지 북쪽은 숲길입니다. 숲은 느티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로 울창합니다. 숲속에 자리한 청심정(淸心亭)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군요. 가을에나 봐야겠습니다. 한참 오르면 언덕 한가운데에 취규정(聚奎亭)이 멋지게 서있습니다. 문이나 벽체가 없어 시원합니다. 취규정 기둥사이로 보이는 숲 색깔이 참 싱그럽습니다.

이제 후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옥류천(玉流川)영역에 갈 차례입니다. 취규정을 뒤로 하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취한정(翠寒亭)이 반깁니다. 취규정하고 쌍둥이 같습니다. 이름도 그렇고 생김새도 비슷합니다.

취한정에서 옥류천을 건너봅니다. 옥류천은 소요암(逍遙巖)뒤쪽에 있는 어정(御井)과 숲에서  온 물이 흐르는 개울을 말하지요. 도랑 바닥돌을 타고 흐르는 개울물은 마치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몇 십 초 만이라도 눈을 닫고 귀를 열어봅시다. 다리위에서 조용히 눈감고 물소리를 듣는 맛이 참 좋습니다.

▲ 옥류천 물소리 몇 십초만이라도 눈을 닫고 귀를 열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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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가에  바짝 기대어 있는 정자는 소요정입니다. 소요암과 작은 폭포를 곁에 두고 있지요. 소요암에 U자형 물길을 새겨 물이 둥글게 휘돌아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옥류천에서는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왕들은 소요정을 가장 사랑하였지요. 소요암의 곡류가 넘칠 정도로 물이 많습니다. 이를 보고 숙종은 '삼백 척 물줄기가 내는 소리가 우레와 같다'고 노래했지요. 과장은 아닌 듯싶습니다. 

소요암 너럭바위에 둥글게 새긴 물길은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집니다. 뒤로 살짝 청의정이 보입니다
▲ 옥류천 폭포 소요암 너럭바위에 둥글게 새긴 물길은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집니다. 뒤로 살짝 청의정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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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청의정(淸猗亭), 건너편에 태극정이 있습니다. 태극정은 옥류천 여러 정자 중에 제일 격을 갖춘 정자로 의젓합니다. 소요정과 함께 아름다운 세 정자라 하여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 불립니다.

옥류천 폭포와 소요암을 곁에 두고 있어 왕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정자입니다. 뒤로 살짝 태극정이 보입니다
▲ 옥류천과 소요정 옥류천 폭포와 소요암을 곁에 두고 있어 왕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은 정자입니다. 뒤로 살짝 태극정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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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정은 초가지붕 건물이고 앞에는 논이 있어 저절로 눈길이 갑니다. 논은 그 해 농사를 가늠하기도 하고 농민의 정서를 헤아리려한 것이라는데 하얀 천으로 덮어 놓아 과잉보호를 하는 것 같습니다. 청의정의 본래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청의정은 호남의 모정(茅亭)같지요. 농촌의 모정을 궁궐 안으로 끌어온 것입니다. 후원은 일반백성이 들어가지 못하는 금원(禁苑)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각과 유리된 채 꾸며진 향락적이고 은밀하며 비밀스런 비원(秘苑)은 아니었지요.

옥류천 물소리가 멀어져 갑니다. 이제 잠시 잊었던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비상식적이고 억지가 판치는 더러운 세상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창덕궁후원, #부용지, #애련지, #연경당, #옥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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