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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아르케의 작품
▲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극단 아르케의 작품
ⓒ 아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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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지난 20일부터 공연되고 있는 연극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이하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30일까지)를 25일 오후 8시에 봤다.

연극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안톤 체홉의 4대 장막극 중 생애 마지막 작품인 <벚꽃동산>을 새로운 형식의 희극으로 재구성한 연출가 김승철 선생의 작품이다. 사실 벚꽃동산은 체홉이 창작한 모든 작품의 결산이자, 극작가로서의 마침표인 걸작이다.

1904년 러시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한 벚꽃동산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 가문이 시대 변화에 뒤처져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벚꽃동산은 당시 러시아 귀족 영주들의 화려한 삶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해석될 수 있으며, 당시 러시아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랴네프스카야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도착- 집안-바깥의 벚꽃동산-다시 집안-새로운 출발'로 이어지는 구조로 벚꽃동산을 기점으로 인생사를 도착과 출발을 대칭적, 순환적으로 그리고 있다.

몰락한 귀족 집안 소유의 고목들이 가득한 벚나무 동산과 대저택은 과거 소작농이었던 신흥 상인 라빠힌이 차지하게 되고, 땅과 집은 잃은 귀족들은 영지를 떠나 각기 불안스러운 새 삶을 시작한다.

분명 몰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몰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몰락해 가는 과정을 다양한 인물군상을 통하여 보여 줌으로써 오히려 세상사 속, 사람들의 삶과 질곡 많은 인생의 흐름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고 있다.

몰락은 분명 비극이지만, 역사라고 하는 긴 시간과 흐름 속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작은 사건일 뿐이다. 따라서 인생도 누구에게나 굴곡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인생사를 이루고 생을 마감할 때는 삶의 총체성과 인생사를 통찰하는 기회도 부여한다.

이 작품은 체홉와 동시대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소나타 37번 선율에 맞춰 원작을 순환하며 더불어 진보하는 역사과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한다. 그러나 추억하는 그 시점에 만개한 꽃이 만들어 놓았던 그 그늘로 인하여 서서히 몰락해 간다. 꽃이 무성할수록 그늘도 짙음을 사람들은 잊고 산다.

역사와 자연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 그러나 내일 떠오를 태양이 오늘 지는 저 태양일까? 그래서 순환하며 진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습은 어떤가?

연극의 원작가 안톤 체홉(1860~1904)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작가·소설가이며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소소한 일상사에서 삶의 진실을 민감하게 끄집어내는 작가다.

따라서 그의 작품 대부분은 드라마틱한 기승전결 대신 일상의 작은 섬세한 이야기들을 질척거리거나 담담하거나 혹은 평탄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는 인생의 도도한 흐름을 스스로 간파하지 못한 채 당면한 상황에만 집중하고 우왕좌왕 행동하는 인간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극의 시작은 무대 후면 한가운데 빛바랜 그랜드 피아노가 외롭게 놓여 있는 것으로 출발한다. 극장 전체가 벚나무로 덮여 있고, 벚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로 인해 스산한 기운까지 감돈다.

이윽고 시작되는 연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소나타 37번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 배우들이 등장한다. 극은 술 취한 피아니스트의 콘서트에 랴네프스카야 가족의 이야기를 삽입하는 액자 속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술병을 들고 무대에 들어서는 피아니스트. 그는 지난 시절의 기억을 다시 돌아본다. 자신의 콘서트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 관객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마친 그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라흐마니노프를 친다.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레와 같이 터지는 함성과 큰 박수. 사실은 환청일 뿐이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극장을 떠나는 피아니스트. 배우들은 이 선율에 맞춰 하나 둘 무대 속으로 나온다.

극 중 피아니스트는 연주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서 한참을 비켜서 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먼지 덮인 옛 카페에 들어서 과거를 회상하며 떠오르는 악상으로 차이콥스키를 친다. 이 작품에서 피아니스트는 인생의 굴곡을 전체적으로 음악과 연주로 보여주고 있는 매개체다.

그의 모습은 어쩌면 현재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과거의 추억만으로 살고 있는 연극 속 귀족들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는 체홉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예술가들로 그들의 음악은 극의 분위기 속에 시나브로 녹아있다.

이 작품은 한 가문의 몰락사를 역사와 자연의 순환 관점에서 돌고 돌며 때로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인생사를 흐릿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어쩌면 개개인이 자신의 캐릭터에 충실하게 매 상황에 집중하면서도 진지하다. 즉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을 때의 치열함과 뜨거움이 멀리서 바라볼 때는, 어쩌면 매우 우습기도 한다. 진지할수록 우스운 상황, 이것이 체호프의 코미디가 심오한 이유이다.

영지에 경매로 팔리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도 랴네프스까야는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연다. 마치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극한의 유쾌함과 경쾌함으로 공간을 가득 채운 가운데, 새로운 집주인인 라빠힌의 등장은 곧바로 거대한 반전이 된다.

여기에 차이콥스키 피아노 음악이 극의 정서를 우아하게 받쳐준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극을 보고 있자면, 봄날 저녁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거대한 서사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 기분이 듣다.

과거의 영화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오랜 프랑스 파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랴네프스까야 부인 일행.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나른한 피로가 주는 달콤함도 잠시. 벚꽃동산을 포함한 영지가 경매에 넘어갈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에 빠져 아직도 과거만을 회상하는 그들은 자신의 영지가 경매로 팔려나가게 된 상황에서도 이웃과 파티를 즐기고, 외식을 하고, 외국여행을 하며 살고 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지인 벚꽃동산이 팔리든 안 팔리든 관심도 없다. 생활력이 없으면서도 무책임할 만큼 낙천적인 러시아 귀족들의 모습을 보면 연극이 과연 비극일까 희극일까를 고심하게 된다.

이 집의 농노출신이면서도 현재는 성공한 상인이며 사업가인 라빠힌. 그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랴네프스까야는 현실의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르고 몸도 마음도 과거의 영화에만 사로잡혀있다.

결국 영지는 라빠힌에게 넘어가게 되고, 랴네프스까야 가족은 불안감 속에서 저마다의 미래를 향해 각자가 새로운 길을 떠난다.

연극의 마지막은 모두가 떠난 텅 빈 낡은 저택에는 벚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이 무겁게 덮여 있고,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이 영지 가득 울려 버진다.

분명 이 연극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비극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인 안톤 체홉은 이 작품을 코미디라고 했다. 확실히 코미디가 맞는 듯하다. 이 작품은 전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밝고 신나고 떠들썩한 노래와 춤까지 등장하는 작품이다.

모두에게 앞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결코 불안하거나 힘들지 않으니 말이다. 현실에 대한 이해의 부족, 타인에 대한 무관심,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과히 코미디 이상이다. 그 모습은 자연스레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결말로 갈수록 안톤 체홉이 얘기하고자했던 랴네프스까야의 인간성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너무 잘 어울린다. 저 밝고, 예쁘고, 어둡고, 슬픈 1차적인 감정이 아닌 기쁜데 슬프고, 아픈데 안 아픈 복잡하지만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을 말이 아닌 적절한 음악으로 표현하였으니 대단한 것이다.

무기력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부자의 몰락이 우리들에게 세상은 돌고 돌며 또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보편의 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을 다시금 대뇌이게 하는 수작이다.


태그:#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 #안톤 체홉, #벚꽃동산, #연극, #아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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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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