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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은 40여 년의 역사가 있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들었다. 약관의 김종필이 초대 원장을 맡았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국정원은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와 관련되는 갖가지 정보를 총괄하는 최고 정보기관이다. 국정원의 힘이 현실 정치에서 막강하게 발휘되는 배경이다.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국정원의 놀라운 정보력에 쉽게 매혹되었다. 국정원의 '위대함'은 각종 선거가 있을 때마다 빛을 발했다. 선거는 국정원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스스로 권력자의 입맛을 살펴 그 뜻에 맞게 선거 국면을 이끄는 국정원의 가상한 노력은 2012년의 제18대 대선 국면에서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은 '스테레오타입'의 전사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그 모두가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어제(6월 24일) 저녁, 군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수송동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관련자들의 구속 수사를 촉구하며 피케팅을 벌이는 모습.
 어제(6월 24일) 저녁, 군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수송동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관련자들의 구속 수사를 촉구하며 피케팅을 벌이는 모습.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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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2008~현재)'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1961~1998)'와 '정보는 국력이다(1998~2008)' 등을 이은, 최근의 국정원 원훈(院訓)이다.

모두가 거창하기 이를 데 없을 뿐더러, 특히 최근의 원훈에 있는 '진리'나 '무명의 헌신'과 같은 말들은 지난 시절 국정원의 '흑역사'나 국정원 직원의 그 당당한 위세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생뚱맞고 낯간지럽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해서 국정원 누리집을 찾아보았다. 다음은 예의 '진리'에 붙어 있는 부연 설명이다.

"정치적 중립을 확고히 지켜나가면서 오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판단함으로써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고 진실된 정보만을 제공하겠습니다"(국정원 누리집의 '원훈' 소개 꼭지에서).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중립'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나, "객관적이고 진실된 정보만을 제공하겠"다는 그들의 말은 단 한 마디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하는 말은, 그들이 내뱉는 그 순간 바로 '진실'이 된다.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국정원이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한 마디를 내뱉기만 하면 된다.

불리할 때마다 강조하는 '국가안보'는 국정원의 전매특허

그들은 24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그들은 회의록을 공개하기 전에, 공개 결정을 밝히는 공지 글을 누리집에 올려놓았다. 이 글에서 그들은 "6년 전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회담 내용을 밝히지 않으면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도 함께 실어 놓았다.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오로지 그들에게 달려 있다. 아무런 근거도 필요 없다. 그냥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없음"이나 "저렇게 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함" 식으로 언표하기만 하면 된다.

국정원은 '직원윤리헌장'에서 자신의 힘의 원천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에 있음을 명심한다고 밝혀 놓았다. 그들은 지금 국민이 과연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믿고 있을까. 그들은 또한 자신의 직무 두 번째로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 자재, 시설,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를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국내 정치를 이유로 국가기밀의 보안 유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여 그 내용을 공개해버리는 그들의 행태는 그 어떤 이유로도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불리할 때마다 강조하는 '국가안보'라는 말은, 그래서 국정원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한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스테레오타입(stetreotype)'은 '견고함'을 뜻하는 'stereos'와 '찍는 것'을 가리키는 'typos'가 합성된 말이다. 이 어원 풀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스테레오타입은 원래 원판을 복제한 인쇄판을 가리키는 인쇄용어로 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곁을 지나는 거리의 '행인'이나 포장마차의 '취객'과 같은 단역 인물에 해당한다. 그러니 연극으로 치면 무대 세팅의 한 요소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중요도나 비중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어제(6월 24일) 저녁, 군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군산시 수송동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관련자들의 구속 수사 등을 촉구하는 피케팅 시위 모습
 어제(6월 24일) 저녁, 군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군산시 수송동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관련자들의 구속 수사 등을 촉구하는 피케팅 시위 모습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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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은 작년 2월에 당명과 당 로고를 바꾸면서 환골탈태했다. 그들은 그렇게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던 '빨간색'을 당 로고에 쓴 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정권을 거머쥐었다.

대체 어느 나라 도깨비 방망이를 쓰는지 모르겠으나, 선거 때마다 능수능란하게 수많은 사람을 모아 쓰는 그들의 역량이 큰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박근혜 대선후보가 여당 안의 야당 구실을 한 점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 점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마침 때맞춰 선거 내내 지리멸렬하기만 했던 야당과 범진보 진영의 혁혁한 공로(?) 또한 새누리당이 집권하는 데 일등공신 중의 하나였을 터.

그런데 이것들이 전부일까. 새누리당은 왜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조사 국면에서 뜬금없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 논란에 대한 국정조사를 주장하고 나섰을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새누리당은 왜 노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에 대한 불법적인 공개를 적극 촉구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는 바로 새누리당이, 국정원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대선 개입 작전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국기 문란 행위를 한 국정원을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리할 때마다 동원하는 '물타기' 수법은, 새누리당의 전매특허

'물타기'는, "사람들의 주의를, 사건의 핵심을 벗어난 사항이나 다른 사건으로 끄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문제 삼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불리할 때마다 동원하는 '물타기' 수법은, 비열하고 좀스러운 새누리당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한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어쨌든 새누리당의 물타기 작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목하 대형 포털이나 주요 일간지들의 정치 뉴스는 국정원이 공개한 정상회담 발췌 기록에 대한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사건은 그야말로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돼버렸다. 그런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 관련 기사는 눈을 비비며 작정한 채로 찾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는 구문(舊聞)이 돼버렸다. 아니, '조·중·동' 삼종 세트로 불리는 국내의 주류 보수 언론에게 국정원 이슈는 원래부터 입에 올리기도 싫은 추문(醜聞)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중·동 삼종 세트에 정녕 중요한 이슈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들은, 국정원의 국기 문란 행위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정권안보를 지키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니 천천히 해결해도 되는 사안쯤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의 영토(영해) 문제가 걸려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의 NLL 관련 논란이 훨씬 더 크고 심각한 사안으로 다가왔으리라. 내가 보기에는 도대체가 그 정체 모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야말로 국정원이나 새누리당이 강조해 마지않는 국가안보의 최대 역군들이기 때문이다.

6월 24일 22시 37분 경에 캡처한, <동아일보> 누리집의 초기화면 사진.
 6월 24일 22시 37분 경에 캡처한, <동아일보> 누리집의 초기화면 사진.
ⓒ 동아일보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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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언론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국정원과 같은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은 민주주의에 치명상을 가져온다. 투표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민의를 억압하거나 왜곡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그 원천에서부터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직면한 진정한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논점을 흐리고 쟁점을 바꿈으로써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한다.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진정한 국가안보의 위기나 국가기강의 문란은 모르는 체한 정권안보와 최고권력자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파는 이런 '언론 매춘' 행위는, 이 나라 유력 언론의 상투적인 '스테레오타입'이다.

나는 국정원과 새누리당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주류 보수 언론이 스스로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이들이 내보이는 행태는 정말 구제할 길 없는 스테레오타입의 행로를 가고 있는 듯해 씁쓸하기만 하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스테레오타입은 결코 온전히 기억되지 못한다.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으로 취급되는 상황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도 결코 좋지 않다.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은 스테레오타입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정원, #새누리당, #조중동, #물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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