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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98년 2월께였다. 당시 한 잡지사의 병아리 기자였던 나는 '술도가니가 있는 풍경'이라는 인터뷰 기획연재물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회 명사들을 초대해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하는 꼭지였다. '술 마시면서 인터뷰한다'는 게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시도여서 인기가 꽤 높았다.

나는 인터뷰 대상 섭외, 인터뷰 녹음과 녹취 등을 맡고 있었다. 인터뷰어였던 선배는 그런 나를 '매니저'라고 불렀다. 어느 날 매니저인 내가 "이번 호는 주철환 피디예요"라고 했더니 선배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너, 나 방송국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몰라?"
"그 사람은 다르잖아요."

그런데 주철환(59) 피디를 직접 만나자 삐딱선을 타던 선배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선배의 표현대로 그는 "이해를 구하는 상냥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필자보다 더 인터뷰 걱정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선배는 새벽까지 달린 인터뷰를 마치고 이렇게 썼다.

"어쨌든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습관이다."

주철환 피디의 배려는 섬세함에서 나온다

주철환 피디의 신작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주철환 피디의 신작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 중앙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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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일이 떠오른 것은 최근 주철환 피디(대학 교수와 방송사 사장을 거쳐 현재 한 종편 채널의 본부장을 지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피디'라는 호칭이 제일 잘 어울린다)에게서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중앙m&b)를 받고난 뒤 까다로웠던 선배조차 허물어트렸던 그 '배려'의 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배려'는 마음이 섬세하지 않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에는 그런 주철환 피디의 매력들이 가득차 있다. 

주철환 피디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섬세하다고 느낀다. 몸짓이나 목소리에서는 부드러운 여성성이 느껴지고, 상대방을 적극 높이고 배려하는 예의가 몸에 배어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섬세함의 증거들은 그가 한 방송사 예능피디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겪은 것이다. 

당시 '방송계 영향력 1위'에 선정되기도 했던 주철환 피디는 연말이면 지인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특별한 선물을 받을 수는 있는 건 아니었다. 한 해 동안 그에게 연락(전화와 편지 등 포함)해온 사람들 중에서 그 빈도와 강도 등을 종합해 몇 사람만 추려서 선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멋지게 한해를 마무리하곤 했다.

한 가지 증거가 더 있다. 주철환 피디가 근무하는 책상 위에는 항상 큰 메모판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하루에 해야 할 일들이 우선 순위별로 적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때가 30~40대였다. 50대 후반에 펴낸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를 보니, 요즘에는 매월 1일을 '결심하는 날'로 정해서 이런 '결심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 상영중인 한국 영화 모두 섭렵하기 / 엘리베이터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내리기 / 옛 친구 열명에게 차례대로 전화 걸기 / 서먹해진 직장 동료와 화해하기.'(261쪽)

섬세한 주철환 피디다운 습성이다. 그런 독특한 습관은 "시간의 매듭을 소중히 여겨라. 해의 시작, 계절의 시작, 달의 시작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라"라는 조언으로 이어진다.

주철환식 유머로 태어난 '더다이즘'과 '감지덕지'

주철환 피디의 또다른 매력은 '재치'와 '유머'에서 나온다. 국어교사 출신인 그는 학창시절부터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에 능했고, 대화나 글쓰기에서 한국어의 운율과 비유법 등을 적절하게 잘 써먹었다. 방송사 피디시절 MBC의 영상캠페인 주제가 '같이 사는 사회'에서 "같이 있는 사회, 가치 있는 사회"라는 재치있는 가사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재치는 단순한 언어의 유희에서 머물지 않는다. 유머와 함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이해인 수녀는 추천사에서 "솔직한 유머와 재치가 넘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철학이 들어 있다"고 평했다. 이는 주철환 피디가 늘 "재미와 의미의 결합"을 강조해온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철환 피디의 평소지론 중 하나는 '더다이즘'이다. 서양미술사조인 '다다이즘'(초현실주의)을 재치있게 바꾸어놓은 '더다이즘'이란 "'더' 잘사는 것도 좋지만 '다' 잘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뜻이란다. 그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렵게 깨달은 한 조각의 단어였다"며 "이왕이면 '더'보다는 '다'를 더 큰 글씨로 쓰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감지덕지"라는 주철환 피디의 목표도 흥미롭다. "감지덕지"는 '분에 넘치게 감사하게 생각함'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감성, 지성, 덕성을 갖춘 지도자"를 말한다. 나이들어 누군가를 이끌어줘야 할 때 갖추어야 할 지혜로서 "감지덕지"는 그에 의해 이렇게 풀이된다.

"감성의 시작은 드라마 <다모>의 명대사, 바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하는 연민이다. 지성의 시작은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겸양이다. 덕성의 시작은 남의 허물을 조용히 덮어주는 야량이다."(30쪽)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에 나오는 '박달재'도 주철환 피디에 의해 "박수 쳐라. 달라져라. 재미있게 살아라"라로 재치있게 바뀐다. "박수치는 사람의 모습은 천국의 CCTV에 찍히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얼굴은 지옥의 CCTV에 기록"된다는 그의 얘기는 정말 기발하다. 

"재미가 감동에 이르려면 사랑이 결합되어야"

재치있는 유머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허전하다. 자신이 "집중하는 최고의 목표"가 재미였던 주철환 피디는 "재미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재미는 단계에 따라 조금씩 성장한다. 조금 더 자란 즐거움으로, 조금 더 자란 즐거움은 기쁨으로, 조금 더 자란 기쁨은 감동이 된다. 결국 재미는 감동으로 가는 최초의 관문인 셈이다."(47쪽)

주철환 피디의 좌우명은 "재미있게 살고 의미있게 죽자"이다. 그는 "재미로 시작하여 감동에까지 이르려면 거기에 사랑이라는 의미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만의 재미"만으로는 감동에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남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마음 먹을 때 비로소 감동이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전설의 스타피디'인 그는 그렇게 자신의 지론인 '더다이즘'이 이루어질 거라 믿는다. 이것도 천상 낙천주의자인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주철환 씀, 중앙m&b 펴냄, 2013년 3월, 279쪽, 1만3500원.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 행복 프로듀서 주철환의 산뜻한 인생 관찰기

주철환 지음, 중앙M&B(2013)


태그:#주철환,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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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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