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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재우 지음, 이덴슬리벨 펴냄
 설재우 지음, 이덴슬리벨 펴냄
ⓒ 이덴슬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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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상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 서울에 있는 동네 이름이라는데 서울에 살며 이 도시의 유목민을 자처하는 나도 처음 들어본 곳들이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로 들어봄직한 효자동이 있는 지역으로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촌'이라는 동네다. 서촌(西村)은 조선시대 때 생겨난 이름으로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삼청동, 가회동, 재동 등이 모여 있는 북촌 한옥마을과는 이웃동네지만 다른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지금도 살고 있는 30대의 토박이이자 터줏대감인 저자는 깊고 따뜻한 주민의 시선으로 쓴 이 책 <서촌 방향>(설재우 지음, 이덴슬리벨 펴냄)을 통해 그의 고향 서촌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가게며, 골목길, 주민들의 표정이 담긴 사진들이 곳곳에 들어간 책장을 넘기다보면 시간이 잠시 머물렀다 가고, 과거와 현대가 교차하기도 하며, 이젠 서울에서 보기드믄 숨겨진 보물들을 알게 되기도 한다. 

더불어 저자가 직접 만나고 인터뷰한 서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동네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스토리 텔링'이 풍성하다. 한마디로 동네와 사랑에 빠진 어느 남자의 서촌 탐구기요, 우리 동네 여행 안내서다.

서촌에 처음 와본 사람들은 서울에 이런 동네도 있냐고들 한다. 청와대와 밀접해 개발 제한이 있는 덕분에 한옥과 골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경복궁과 어울려 도시 같지 않은 예스러운 동네 모습이 펼쳐지니 그럴 만도 하다. 게다가 건축물 고도제한이 있어서 인왕산과 북악산의 능선이 고스란히 보이고, 서울 시내에서 하늘을 시원하게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네다. - 본문 가운데

책 속에서 마주친 사진과 글을 보고서야 나도 이 동네에 가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경복궁 가는 길에 서촌인 걸 모르고 동네를 지나간 거다. 작은 거리에서 마주친 오래된 한옥 책방 '대오서점'에서, 작지만 알찬 통인시장, 진한 '쾌남' 스킨향이 나던 형제 이발소,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를 이겨낸 효자동 빵집까지 정말 고향에 온 듯싶어 마음이 한없이 푸근했다.

청와대가 코앞에 있어 개발제한 및 고도제한에 묶이는 데다 땅을 파면 문화재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공사를 벌이지 못하는 덕택에 아직까지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 최근에 생긴 세련된 카페, 갤러리와 수십 년 묵은 가게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워낙 변화와 개발이 많은 사회와 도시에 살다보니 다른 나라 같으면 가정이나 거리 곳곳에서 옛 조상들의 감성을 느끼게 하는 사물들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과거의 흔적이 새롭고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새 것, 앞선 것에 매몰되어 왔다. 이런 환경에서 옛 기억과 정서를 되살리는 일은 새롭고 새삼스러운 감회를 불러오고 때로 삶의 화두를 얻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서울 속의 이런 동네를 널리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나라도 이런 책을 썼을 것 같다. 글쓴이는 서울에서 고향을 오롯이 간직하며 살고 있는 행운의 도시인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저자는 책만 쓰는 게 아닌 서촌의 문화와 예술에 관한 스토리텔링 발굴 및 동네 소식지 발간, 골목답사, 출판물 발행의 일도 하고 있다.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 2012년 서울시가 뽑은 '국내 이색 직업 50개', '미래 굿잡(good job) 100개'에 선정되기도 했단다.

밥 짓는 냄새 가득한 골목길의 추억이 있는 곳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최고(古)의 동네, 서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최고(古)의 동네, 서촌
ⓒ 설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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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서촌의 매력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서촌은 힐링 플레이스(healing place)다. 서촌에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견디고 버티며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 동안 잊고 지낸, 이제는 다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추억과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난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 받는다. - 본문 가운데

요즘 골목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비단 서촌뿐만의 얘기는 아니다. 책으로, 잡지로, 영상으로 다양한 매체와 방법으로 그동안 소외되고 방치되었던 골목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야말로 골목의 재발견이다.

골목은 서촌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 시내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의 지적도(토지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지도)와 현재의 지적도가 가장 근접하게 일치하는 곳이 바로 서촌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서촌의 골목은 역사가 깊다. 그래서일까. 흔히 서촌 하면 많이 떠올리는 곳이 바로 이 골목이다.

좁고 구불구불한 도시의 골목을 걷다 보면 묘한 포근함과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담장에 써놓은 짓궂은 낙서들, 바람에 펄럭이며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빨래들, 골목 사이 집집마다 놓인 화단과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유년 시절이 생각나고 정겨운 느낌이 함께한다. 골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효과가 있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메마르는 인심과 일상에 지쳐서일까?

저자는 서촌에는 우리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경험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한다. 그 골목길에서 삶의 터를 잡고 수십 년째 살아가는 떡볶이집, 갈비집, 동네 병원, 이발관 아저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도 저자는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받는다니 부럽다.

서울에서 골목의 재발견만큼이나 명물이 되고 있는 것이 계단이다. 후암동 108계단, 남산 삼순이 계단, 이화동 꽃계단, 삼청동 돌계단, 상암동 하늘공원 지그재그 나무계단 등이 그것. 이렇게 계단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행위가 흔히 인생에 자주 비유되곤 해서일까. 서촌에도 그런 숨겨진 계단길 '신교동 60계단'이 숨은 이야기와 함께 소개되어 흥미롭다.

홍콩 감독 왕가위(왕자웨이)가 연출한 기억에 남는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뜻한다. 사람마다 아름다웠던 시절은 다르겠으나 내게 그런 시절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골목길이었다. 지금 당시의 골목길과 거리는 물론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난 그 10년간의 유년 시절 추억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내고 있다. 서울에 나만의 '화양연화'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있어 참 반가웠다. 기나긴 이 겨울이 지나면 조만간 골목을 걷기에 더 없이 좋은 봄이 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촌방향> 설재우 지음 | 이덴슬리벨 펴냄 | 2012년 11월 | 14,500원



서촌방향 -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최고古의 동네

설재우 지음, 이덴슬리벨(2012)


태그:#서촌방향, #설재우, #효자동,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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