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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희망버스로 향하고 있다.
▲ 시청역 앞 희망버스 사람들이 희망버스로 향하고 있다.
ⓒ 이홍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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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토요일 아침, 역시나 추웠다. 목요일까지 겨울비가 내렸고, 당분간 추운 날씨가 계속된다던 일기예보는 빗나가지 않았다. 서울 대한문 앞 농성장의 천막들은 이중으로 비닐을 덮고 있었고, 비닐 안팎으로 서리가 끼어 있었다.

버스는 지하철 시청역 2번 출구 근처에 연달아 서 있었다. 맨 앞부터 1호차, 2호차…, 총 네 대가 서 있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는 3호차였다. 이미 출발 예정 시간인 오전 9시가 넘어 있었고, 추위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잽싸게 차에 올랐다. 버스 절반 정도 사람이 차 있었다. 나는 뒤쪽으로 가서 앉았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이야기꽃을 피웠고, 작은 웃음소리와 자동차의 낮은 엔진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차 안은 점점 따뜻해졌다. 나는 살짝 졸렸고, 해는 낮게 떠올라 차 안으로 볕을 쏟아내고 있었다.

'희망버스'를 처음 타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집회 경험이나 시위 현장 경험이 아주 적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나 같았을 것이다. 용기 내서 버스를 타긴 탔지만, 낯설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막연하게 두려웠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대화들이 나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었고 그래서 편안한 척해보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던 긴장감과 두려움이 완전히 풀린 때는 울산의 '철탑'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던 터, 갑자기 등장한 한 사람 때문에 긴장은 배가 되었다.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으로 기억되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 투쟁을 이끌었던 사람, 얼마 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그분, 바로 김소연씨였다. 나는 전 대통령 후보를 본다는 것이 신기해서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론, '여긴 나 같은 사람이 낄 데가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마음은 사라졌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봄 직한 사람들, 아니 일반적인 사람들 이상으로 밝고 유쾌하고 친절했다. 긴장하고 있는 나 같은 이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고 싸온 귤이나 떡을 나눠주었다. 또 서먹한 사이들이 가득한 터라 버스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기 십상이었지만, 기륭 노조 분들은 적어도 뒤쪽에선 분위기를 재미있게 끌어나갔다. 나는 그 틈에 앉아 한꺼풀씩 긴장감과 두려움을 벗겨냈다.

출발, 평택 가는 길

"이제 그만 출발하겠습니다. 아직 못 오신 분들은 다음 기회에 타셔야겠네요."

자리는 4분의 3이 조금 넘게 채워졌다.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한다는 명숙이라는 분이 오늘 우리 차의 사회자 겸 운영자였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아직 안 온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차는 9시 45분에 출발했다. 예정보다 꽤 늦은 것이었다. 원래는 9시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평택이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 명이 송전 철탑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곳이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버스는 덜 덜컹거렸고, 덜 기울었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고 오늘의 일정과 버스 안에서 할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했다. 자기소개, 편지 쓰기, 그리고 간단한 게임.

평택 송전탑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 사이에 버스 안에서는 참가자들이 각자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동자들과 우리 모두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이 버스에 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며, 여기에 참가하려고 많은 용기를 냈다는 50대 아주머니. 현장에서 떨어진 채로 노동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밝힌 최장집 교수의 책을 보고 참가하기로 했다는 한 신문사의 연구 기자. 동행 취재를 왔다는 <경향신문> 기자.

그리고 재벌 대기업에서 근무하니 제발 자기 사진은 찍지 말라는, 찍어도 확실하게 모자이크 처리를 해달라고 당부하던 50대 아저씨. 부모님의 권유로 오게 되었다는 19세의 소녀. 또 한 30대 여성은 이런 데 올 때는 최대한 예쁘게 하고 와야 경찰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해서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자기는 아름다운 노동자의 손을 가졌다며 줄기차게 웅변을 하던 스무 살 청년. 말을 꺼내다가 감정 때문에 목이 메어서 자기소개를 제대로 못한 한 여성.

친구 따라 왔다는 대학생과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아 친구를 데리고 왔다는 대학생. 그리고 자식에게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 두 딸을 데리고 온 아저씨. 그 옆으로는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기운이 넘치는 일곱 살, 다섯 살 먹은 귀여운 두 딸. 그리고 소녀 못지않은 천진함으로 내내 주변을 즐겁게 했던 기륭전자 여성 노조원들. 한국외대 전 노조 지부장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대학노조 간부들. 참여연대 활동가.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버스 안에 있었다.

자기소개가 끝났고, 출발 전에 나눠준 색지 위에 참가자들은 평택의 세 노동자에게 편지를 썼다. 곧 평택에 도착한다는 사회자의 말이 이어졌다. 몇 번의 곡선 주행으로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공단 분위기가 났다. 쌍용차 평택공장은 톨게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공장 옆으로 난 도로, 그 도로 아래로 수직 통과하는 고속도로 옆에 거대한 철탑이 서 있었다.

두 개의 교차하는 도로 사이에 서 있다.
▲ 쌍용차 고공농성 철탑 두 개의 교차하는 도로 사이에 서 있다.
ⓒ 이홍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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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보니 철탑의 크기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철탑은 도로에서 40~50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철탑으로 가려면 성인 허벅지 높이의 가드레일을 넘어야 했다. 드문드문 풀이 있는 땅에 서 있는 철탑 바로 밑에는 경찰이 쳐 놓은 천막이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덕분에 좀 덜 황량했다.

희망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철탑 앞으로 가서 손을 흔들었다. 몇몇은 멀리의 철탑을 마주하고 이미 울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찾자면 무수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신이 쓴 편지를 낭독했다. 세 노동자의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 총 구행시였다. 참가자들이 한 글자씩 운을 외치고 낭독자는 한 행 한 행 읽어 나갔다. 복기성의 복에 "복직"이 흘러 나왔고, 앰프에서 울려퍼진 소리는 쌍용차 공장 안으로 울려퍼질 만큼 컸다.

갈 길이 멀었다. 오후에 서울에서 평택행 희망버스가 출발한다고 했다. 우리는 울산행이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출발 전,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버스에 올라타 감사 인사를 했다. 목소리는 작았다. 단식의 후유증이 남아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정말로 고마워했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사실 우리도 고마웠다. 그들이 하는 일이 결코 그들만을 위한 일이 아님을 모두 알고 있다.

울산에서 보낸 오후, 해넘이

죽암휴게소에서 들러 점심을 먹었다. 버스는 다시 달렸고, 휴게소에서 산 음식들을 사이좋게 나눠 먹은 뒤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금 뒤 사회자가 조심스레 사람들을 깨웠다. 참가자들은 고공농성 중인 두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앞으로 편지를 썼다. 또, 아산에서 역시나 힘겹게 농성 중인 유성기업 노조 홍종인 지회장에게도 편지를 썼다. 사회자가 덧붙이기에 홍종인 지회장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있고, 조금 있으면 그곳에 머문 지 90일이 된다고 했다.

고속도로는 괜찮았으나 울산 시내에서 차가 막혔고, 참가자들은 현대차 정문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에서 내렸다. 울산 현대차 정문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울산 시내에 들어 차가 많이 밀린 탓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이미 전국에서 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정문 앞을 메우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가 가장 늦게 도착한 것 같았지만, 울산의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우리의 뒤로 합류하는 것 같았다. 사람은 계속 늘었다.

트럭 위에 마련된 특설 무대 위에서 이미 한 시간 전부터 행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발언 몇 번과 노래, 그리고 춤이 이어졌고 참가자들은 곧바로 행진에 나섰다. 한데 뭉친 사람들이 행진에 나서자 줄은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끼리 비슷한 자리에서 행진했는데, 한 시간 남짓 걸었다. 갖가지 깃발들이 대열의 지붕을 이루고 있었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무려 4.37km였다. 몸이 성한 사람에게는 걸어도 무리가 없는 거리다. 하지만 뛰었다가 걸었다가, 아빠에게 업혔다가, 잠시 넘어졌다가 또 일어나서 뛰던 일곱, 다섯 먹은 자매들이나 휠체어를 타고 동참한 참가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걷는 일은 덜 힘든 법이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이도 있었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 말고도 손을 잡아주는 언니, 오빠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 철폐"를 한목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현대차 공장 명촌주차장 철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뒤였다.

철탑 중간에 불빛이 두 노동자가 거기 있음을 알리고 있다.
▲ 최종 목적지에 도착 철탑 중간에 불빛이 두 노동자가 거기 있음을 알리고 있다.
ⓒ 이홍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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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갔다

행진은 주차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아 가장 넓은 길로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행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멀리로 철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온다고 철탑 주위로는 여러 종류의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행진을 마친 사람들은 철탑 아래에 설치된 붉은 무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앉았다. 그러자 우렁찬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몇몇 연설이 7시까지 이어졌다.

배가 고팠다. 식사를 한 지 6시간도 더 지난 후였다. 게다가 한 시간에 걸친 행진 때문에 에너지는 고갈되어 있었다. 추위 탓에 허기가 더 심하게 밀려왔다. 그때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스무 살 청년이 나를 불렀다. 우리는 식사 봉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 말고도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온 참가자 위주로 배식과 식사 봉사 조가 꾸려졌다. 무대 전면으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밥과 국, 반찬을 담은 스티로폼 박스가 여섯 군데로 나뉘어 일렬로 섰다. 1부 행사가 끝나자, 무대 앞쪽에 모여 있던 이들까지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사람들 사이로 나는 수저와 젓가락을 날랐고,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동자들이 배식을 맡았다. 근처에서 기륭전자 노조원 몇 분이 식후 처리를 맡았다. 그밖에도 많은 분들이 알아서 필요한 일을 찾아 했고, 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배식은 순식간에 끝났다. 배식하는 곳에 줄이 거의 사라질 무렵, 식사 봉사를 했던 이들도 밥을 먹었다. 울산에서 막 지은 밥과 국, 반찬이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기에, 음식은 따뜻했다.

메뉴는 김치찌개와 쌀밥 그리고 어묵 무침이었다. 배고프고 추운 덕엔 밥맛이 꿀맛이긴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음식은 충분히 맛있을 것 같았다. 넓은 대접에다 밥을 한가득, 김칫국에 말고 어묵을 같이 섞어서 먹었다. 언제 배가 고팠냐는 듯, 금방 배가 차올랐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행사가 진행됐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듣기로는 추위 때문에, 원래는 열한 시에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단축되었고 다소 급하게 진행되었다고 했다. 밤이 깊을수록 추위도 심해졌다. 몇몇은 발은 구르며 서 있었고, 몇몇은 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을 감돌아 서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행사를 즐겼다. 민중가수 박준씨의 노래가 2부의 시작을 알렸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와 편지를 낭송했다. 30대 여성, 70대의 할아버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모두 마음을 담아 편지를 읽었다. 이어서 철탑에 올라 있는 최병승씨의 편지 낭독이 이어졌다.

'희망버스 동지들, 다시는 이렇게 만나지 맙시다'라는 제목의 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2004년부터 계속된 사내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의 역사와 노사 문제에 있어서는 늘 실무자이자 실력자, 조정자로 등장하는 현대차가 책임에 있어서는 늘 회피하는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제의 해결과 다시는 이 고공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담담한 어조로 마무리했다.

이어서는 평택 쌍용차로, 부산 한진중으로, 아산 유성기업으로 전화 연결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전체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다가왔다. 비정규직 문제, 부당 해고 문제, 노조 탄압 문제, 노동 조건 전반에 관한 문제들이 통화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 현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강도의 투쟁을 선택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힘겹게 느껴졌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함께 그들의 건강을 기원하고, 구호를 외쳤다. 어느새 시간은 9시를 넘겼고,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동자들의 춤으로 무대가 마무리됐다.

마지막 행사는 인간 띠로 글씨 쓰기였다. 모든 사람들은 손에 촛불을 들었고, 사회자의 설명에 따라 청색 테이프가 붙은 선 위로 올라섰다. 이윽고 네 글자가 만들어졌다. 각 글자에 속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한 글자씩 외쳤다.

"희", "망", "승", "리".

철탑 위에서 최병승씨가 찍은 사진. "희망승리"가 보인다.
 철탑 위에서 최병승씨가 찍은 사진. "희망승리"가 보인다.
ⓒ 최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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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그렇게 끝이 났다. 버스는 오후 10시가 다 되어 서울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에 들지 않은 사람들은 버스 뒤쪽에 모였다. 우리는 맥주를 들이켜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너무 추웠다는 이야기, 고공농성 하는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이야기, 그래도 뿌듯하다는, 저마다 오늘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던 대학생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요지는 용어가 다르다는 거였다. 노동운동에 쓰이는 용어와 일상어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지적했다. 공감이 갔다. 사실 희망버스가 노동운동가가 아닌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행사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노동운동의 단어는 일상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거나 일상에서 쓰이더라도 의미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동지'는 모든 참가자를 부르는 말이고, '투쟁'이 이러한 운동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며, 투쟁의 대상은 '자본'으로 규정되었다.

술은 부족했고, 사람들은 조금만 마시고 각자의 자리에서 잠들었다.

새벽 세 시가 덜 된 시각이었다. 대한문 건너편에서 내렸고, 우리는 기약 없이 헤어졌다. 세 시간만 기다리면 첫차를 탈 수 있었기에 택시비를 아낄 요량으로 24시간 열린 카페를 찾았다. 시청 앞을 지나 종로 쪽으로 갔다. 차들은 드문드문 지났다. 칼바람이 불었고, 당연히 철탑 위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하루만 밖에서 자보라 해도 나로서는 못할 일이었다.

종각역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시켰고,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을 꺼냈다. '로맹가리'의 <하늘의 뿌리>였다. 한 달 전부터 읽어 오던 소설이다. 커피숍에서 그 결말을 보게 될 것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모렐'이라는 남자다. 그는 사람들이 더 이상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죽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는 코끼리 무리를 따라다니며, 죽을 각오를 하고 코끼리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맞서 싸운다.

소설 후반부에는 소설의 핵심인 듯한 모렐의 물음이 나온다.

당신은 고생대 초기에 최초로 물 밑의 진흙으로부터 나와, 없는 허파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숨을 쉬면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서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의 파충류 동물을 기억하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무모할 정도로 자기를 희생해가며 세상의 발전을 꿈꾼다. 그런 행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때문에 세상은 발전한다. 소위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언제나 편이 갈린다. 바보 같은 짓으로 평가 절하하는 쪽과 적극적으로 그의 목적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쪽.

하지만 어느 쪽이건 결국엔 그들이 했던 무모한 도전의 수혜자다. 전태일이 있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고,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발전을 꿈꿨다. 지금 임금 생활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들의 노력은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가 그 허파가 생기길 기다렸던 생물에게 빚지고 있는 것처럼.

책장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나를 기다릴 추위가 겁이나 나가기 싫었지만 어떻게든 집에는 가야 했다. 아직 하늘은 컴컴했다. 저 동쪽 어딘가에는 동이 텄을 터였다.


태그:#2013, #희망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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