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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25일 오전 11시 10분]

1978년 어느 날, 청와대 집무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5·16 이후 자신의 의전 비서관으로 잔뼈가 굵은 조상호(1926년 11월 29일 전남 담양 출생, 10대 유정회 국회의원과 대한체육회장 역임) 의전 수석에게 영애(박근혜)를 맡아 줄 전문 외교관을 추천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박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영애를 위해 영문 연설문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과 학식을 갖춘 영예전담 비서관을 찾던 중이었다. 박 대통령의 명을 받은 조상호 의전수석은 고심을 하다 정통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 들어와 있던 최필립을 추천하여 박 대통령으로부터 내락을 받는다. 

최필립을 부른 조상호는 "각하께서 '임자가 맡아 봐'라고 하시면 내용은 알려들지 말고 그냥 '잘 알겠습니다'라고 답하면 되네"라는 말을 하면서 최필립을 동행하여 박 대통령 집부실로 들어갔다. 최필립은 영문도 모르는 가운데 긴장하면서 박 대통령 앞에 섰다.

박 대통령은 특유의 어투로 간명하게 한 마디 했다. "...임자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임자가 맡아서 잘 해 봐!"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이 없는 상황인지라 최필립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상호 의전수석의 말이 생각나서 "예 알겠습니다, 각하!" 하고 황급히 문을 열고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맡기시는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나오던 최필립은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밖에는 28살의 영애 박근혜가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

누가 뭐라 해도 박근혜 후보의 가장 오래된 측근임을 부인할 수 없는 최필립 이사장과 박근혜 후보의 30여년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마다 운동을 하며 동년배들에 비해 훨씬 건강한 편인 최 이사장은 명료한 기억력으로 당시 현대건설 대표였던 MB가 청와대에 들어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후보 앞에 서 있던 모습부터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재연할 정도. 

'인간 최필립'을 간과한 박근혜 후보의 정수장학회 엇박자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1928년 8월 6일 평양에서 출생한 외교관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 말기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박근혜 후보를 그림자처럼 보좌해 온 사람이라는 정도 외에 최필립 이사장 출생의 정보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박근혜 후보조차 자신의 가장 오래 된 측근이었던 최필립 이사장의 가계(家系)를 간과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박 후보는 물론 여당도 최필립 이사장의 가계를 직시하지 않는 이상 대선이 끝나는 순간까지 최필립 이사장과의 엇박자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분명 박근혜 후보의 후임인 최필립 이사장의 입에서 "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강경한 답이 나왔을 때 가장 당혹해 했을 사람은 다름 아닌 박근혜 후보였을 것이다.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 후 박정희 대통령의 우산 아래 있던 숱한 군상들이 박근혜 후보를 배신했을 때도 송암(松巖)처럼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켰던 최필립 이사장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정수장학회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자원한 박근혜 후보의 기자회견이 있은 뒤에도 최필립 이사장은 "누구도 나를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에서 그만두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어 엄동설한 언살에 고름마저 낀 셈이 되었다.

이러한 '최필립 이변'으로 박 후보는 물론 여당은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셈이 되었건만 여전히 근본적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와 관련하여 엇박자를 내고 있는 요인 중에는 '인간 최필립'을 간과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최필립 이사장은 지금까지 박 후보 주변에 녹음방초처럼 즐비한 '예스맨' 그룹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가족사(家族史)의 소유자이다. 외교관 최필립의 반세기가 넘는 인생역정 속에서는 본인이 인정하든 부인하든 이러한 자신의 가계(家系)가 갖는 태생적 자존감의 바탕 하에서 움직여 왔음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최필립 이사장의 가족사(家族史)

최필립 이사장은 독립운동가 최능진(1899~1951)님의 장남이다. 최 이사장의 선친 최능진 님은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37년 안창호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8·15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했다.

최능진은 1945년 9월경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되었으나, 1946년 조병옥 경무부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던 중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5·10 총선거에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서북청년회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휘 아래 경찰의 잇단 방해로 후보 등록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극적으로 후보 등록했다.

추첨에 의해 기호 1번이 된 최능진은 선거가 시작되자 그의 독립운동 경력, 친일 경찰 처벌 요구 등으로 부각되며 인기가 높아지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떠올랐다. 당연히 경무대 주변 권력의 기생자들과 이승만에게는 최능진이 눈엣 가시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은 경찰을 동원하여 본인이 스스로 날인하지 않았다는 추천인들의 진술을 받아 선거관리위원장 노진설 대법관을 찾아가 등록을 무효화시킬 것을 요구했고, 선거 2일 전인 5월 8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국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 취소시켰다.

제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문턱에서 권력의 농간으로 청운의 꿈을 접게 된 최능진은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때 서재필을 옹립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이승만에 항거했다. 그러나 1948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지 한 달 반만인 10월 1일 "국군 안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연행된 최능진은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억울함을 잘 아는 백범(김구)이 서대문 교도소로 찾아가 눈물로 위로를 전하고 돌아오면서 최능진의 어린 자녀들 걱정을 하였음은 백범의 비서 고 선우진 옹이 전하는 바다.

한국전쟁 후 서울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였으나 그 일로 최능진은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던 방첩대(CIC)에 의해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박근혜 후보의 국회의원 선거구) 가창면에서 처형당함으로써 반민족 세력과 타협 없는 불굴의 독립운동가로서의 52년 삶을 마감한다.

최필립 이사장의 이런 가족사를 박근혜 후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박 후보가 이를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알았더라면 최필립 이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을 수 있고, 현재와 같은 정수장학회 엇박자가 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의 '시한폭탄', 나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중 하나로 정수장학회가 악재가 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정수장학회 엇박자 첫째 요인은 박 후보의 '제왕적 리더십'

현재 정수장학회가 처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최필립 이사장이다. 그렇다면 삼고초려의 자세로 몸을 낮춰 최필립 이사장을 간곡히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는 지령에 가까운 예의 '복도 멘트' 몇 마디로 최필립 이사장이 알아서 처신해 줄 것을 암시하는 행태를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 시절 자신을 그림자처럼 보필해 온 사람이긴 하나 최필립 이사장은 아버지뻘의 원로인사인 만큼 얼마든지 자신을 낮추어 사전 조율을 해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 후보가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는, 아니 어쩌면 끝내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는 '하향식(상명하달식) 리더십'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박 후보는 자신이 선친인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처럼, 최필립 이사장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한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독립운동가의 아들답게 살기를 꿈꾸는 '독자적 자존감'의 소유자일 수 있음을 고려했어야 했던 것이다.

최필립 이사장은 한 마디로 딸 같은 박 후보를 위해 30여 년을 섬겨 왔건만 박 후보가 자신을 주변에 즐비한 '예스맨'들 중 하나쯤으로 취급한다고 느꼈기에 늦게나마 독자적 자존감을 발휘하며 홀로 서기를 각오함으로써 박 후보의 '정수장학회 엇박자'가 가속화 되고 있는 것이다.

박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로 여성임을 드는 많은 이들은 박 후보가 여성이긴 하나 모성애에 근거한 '수평적 리더십'이 아니라, 자신을 선덕여왕으로 빗대는 자들 앞에서 대노하기 보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수직적 리더십', '제왕적 리더십'에 익숙한 사람임을 간과하고 있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블랙홀과도 같은 미궁으로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금,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수장학회 엇박자 두 번째 요인은 박 후보의 '반통합적리더십'

출정 당시 최고의 인지도를 앞세우고 12월 대선에 나설 당시 박 후보가 '국민대통합'을 내세울 때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요즈음 내세우고 있는 "100%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허허로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국민대통합을 앞세운 박 후보가 전태일 기념사업회 측으로부터 문전 박대를 받았음은 물론 전태일 열사의 동상 방문마저도 형편없는 모양세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아무래도 박 후보가 통합의 개념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박 후보 측이 통합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였더라면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일방적으로 방문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세상에 알려질 보이기식 어필에 중점을 두기 전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전태일 기념사업회와 '유가협'을 조용히 방문하여 가슴을 여는 대화를 선행함으로써 '공감대적 가치'를 상호 공유했어야 했다.

조국의 열악한 근로 환경 개선과 민주화를 위해 숨져간 자식이나 형제자매를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과정'을 통합(Integration)이라고 부른다고 '통합 이론'의 대가인 독일의 스맨트(R.Smend)는 말한다.

'진정한 통합이란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상대방 입장에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2차 대전 후 패전 국가 독일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일조한 학자로 평가되는 스맨트에 의하면, 개인 대 개인 간의 통합이든 국민 또는 민족 성원 간의 통합이든 이를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감대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과 이러한 공유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부단한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통합'은 '단합'과 명백히 다르건만, 박 후보는 통합과 단합을 동의어로 아는 듯하다. 한 마디로 입으로는 통합을 외치나 정작 중요한 리더십이 반통합적이다 보니 오늘의 정수장학회 관련 엇박자는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통합적 리더십에 입각하여 정수장학회 문제를 풀고자 했더라면, 복도멘트나 언론 플레이 대신 최필립 이사장과의 이견 조율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선행하였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 과정이 없다보니 최필립 이사장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생을 살다 간 독립운동가의 아들답게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따름으로써 박 후보가 예견하지 못한 행보를 계속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정수장학회 엇박자 세 번째 요인은 박 후보의 '반헌법적 리더십'

정치에 참여하기 전은 물론 정치 참여 후에도 '5.16'과 '유신', 그 과정에서 불행하고도 참담한 희생양들과 관련한 소위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박근혜 후보가 보여 온 자세는 "헌법질서 보다는 아버지 우선의 원칙"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박 후보에게 <'근혜누님'에게 드리는 고언(苦言)>이라는 <문화일보> 칼럼(2002. 5. 17)을 통해 진정한 국민 정치인으로 바로서길 원한다면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를 대신해 역사와 민족 앞의 속죄와 '탈 박정희'가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필자의 칼럼을 통한 고언이 있고 강산이 한 번은 족히 변했을 세월인 10년이 지난 지금, 박 후보는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역사와 국민은 뚜렷한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으로 헌법질서를 수호할 지도자를 찾고 있건만, 박 후보는 여전히 '효녀심청'적 사고로 과거사는 물론 정수장학회 문제와 관련한 역사적 호기를 모두 놓치고 있다.

박 후보의 이러한 행태는 '반헌법적 리더십'에 기인하는 것으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박 후보가 그동안 "국민과의 약속은 지킨다"는 식의 리더십으로 우호적 이미지를 고양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러한 자세가 '헌법 존중적, 헌법 지향적 리더십'와 동일시 될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박 후보의 '반헌법적 리더십'을 논증하기 위해 몇 마디만 더해 보자. 국민 투표로도 포기 할 수 없는 절대적 헌법요소가 '권력분립'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권력분립은 법치주의를 이뤄가기 위한 구성요소다. 즉 권력분립 없는 법치주의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박 후보가 그토록 오랜 세월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껴안고 호위하거나 합리화 하려 했던 '5·16'과 '유신'은 법치주의의 진수 중의 진수인 권력분립을 원천적으로 짓밟았음은 천하가 다 아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는 '5·16'과 '유신'을 오랜 세월 옹호(최근의 우회적 사과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으로, 누가 봐도 진정성이 결여된 정치전술적 행보)해 온 만큼 '반헌법적 리더십'의 소유자라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박 후보가 '헌법 존중적, 헌법 지향적 리더십'을 뼛속 깊이 간직했더라면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서,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은 물론 법원 또한 시효가 지났을 뿐이지 헌법이 보장하는 특정 국민의 재산권에 대한 부당한 침탈에 의해 현재의 정수장학회 재산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유권 해석한 만큼, 이제라도 원 소유주 측에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고 봅니다"라며 매듭을 지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17대 대통령 자리는 MB가 아니라 박 후보 자신의 몫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기회는 있었다. 최필립 이사장과의 만남이 여의치 않으면 최 이사장과 이사들을 찾아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절대적 헌법질서인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것이니, 정수장학회는 이제 우리 손에서 내려놓자"고 설득하였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약 박 후보가 만들었더라면, 지난 30여 년 동안 박 후보 최고의 측근이었던 최필립 이사장이 어떻게 공개리에 박 후보와 상반된 행보를 취할 수 있겠는가? 최 이사장의 남다른 가족사(家族史)로 볼 때 충분히 추론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박 후보는 이러한 '통합과정론'적 해법 대신에 정수장학회에 대한 명칭 변경 등 비본질적 쟁점들만 엮어서 또 다시 언론을 통한 '결과론적 선포'를 일방적으로 하고 말았다.   

'정수장학회' 관련 최필립 이사장의 행보를 예의 주시한다

박 후보가 영애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타가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측근이었던 최필립 이사장이 정수장학회 해법과 관련하여 기자회견까지 한 박 후보의 기대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듯한 행보를 필자는 예의 주시한다.

정치 입문 초기에는 박 후보가 최 이사장의 자문을 경청하고 충실히 응해줘 왔다. 그러나 정치적 역량이 증대해 가면 갈수록 박 후보는 최 이사장의 충언을 귀 담아 듣지 않거나 정면으로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7대 국회 구성 당시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 중용 건. 당시 최 이사장은 박 후보에게 박세일에게 지나치게 힘을 실어 주지 말 것을 주문했건만 박 후보는 이를 듣지 않았다. 후일 박세일이 한나라당 탈당을 하여 반박근혜 행보를 하였음은 물론 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에는 신당을 창당하기까지 해 최 이사장의 충언이 옳았음이 입증된 바 있다.

어느 분야에서 10년 이상은 되어야 전문성을 쌓을 수 있다라고 박 후보도 언급했던 것처럼, 한 분야이든 한 사물이나 한 사람이든 30년 넘게 지켜보다 보면 그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도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최필립 이사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박근혜 전문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최 이사장의 눈에 과연 12월 대선에서 최종 승자는 누가 될 것이라고 보여질까? 어린 시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뼈아픈 가족사를 가슴에 안고 젊은 날 외교관으로 성공하여 최 이사장은 대한민국 헌정사를 60년 넘게 지켜봐 왔다. 남다른 시대적 통찰력과 격랑의 역사에 대한 직관력을 갖고도 남음이 있었을 터.

정치권으로부터 김우중 전 회장이 버림을 받고 '드넓은 세계에서 하릴없이' 유랑 하고 있을 때, 남모르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준 바 있는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했던 최필립 이사장의 손에 정수장학회의 운명이 달려 있다.

민족 정의와 애국 일념으로 불의와 타협함이 없이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던 선친 최능진 독립운동가의 아들에 걸맞는 '역사적 결단'은 꼭 12월 대선 전일 필요는 없다는 바람과 함께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필자는 홀로 자문하여 본다.

'박근혜 후보가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다고 확신이 섰더라도 정수장학회와 관련하여 최필립 이사장이 30년 인연의 박 후보와 어긋난 독자적 행보를 할 수 있었을까?'

덧붙이는 글 | 본 칼럼은 개인블로그와 위키트리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박근혜, 최필립#정수장학회#대통령#통합#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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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법(통일헌법) 박사학위 소지자로서의 전문성 활용 * 남북회담(민족평화축전, 민주평통 업무 등)차 10 여 차례 방북 경험과 학자적 전문성을 결합한 민족문제 현안파악과 대안제시 * 관심분야(박사학위 전공 활용분야) - 사회통합, 민족통합, 통일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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