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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 저집 담장 너머로 활짝 피었다.
▲ 참파꽃.. 이집 저집 담장 너머로 활짝 피었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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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시인 타고르가 좋아했던 참파 꽃이 집집마다 예쁘게 피어 있다는 마을, 참파삭으로 가고 있다. 앙코르와트와 동시대의 유적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동문. 태백 통리 구사리 신리 동활 풍곡 오저 탕곡 기곡 축전 노경 호산. 2006, 8, 21 지행. 일반 1000원, 중고생 800원, 초등생 500원. 금연구역.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행운. 라오스 남부의 어느 시골 길을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서 대한민국의 글자들을 만난다. 어느 날 페루의 안데스 산악마을에서 한국인 이민자를 만났을 때처럼 반갑다. 버스운전석 옆에 붙여진 종이 위에 빼곡하게 적힌 한글 지명들이 무슨 상징처럼 혹은 그리운 사람의 이름처럼 다가선다.

2006년 8월 21일. 버스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강원도 심신유곡 구석구석을 넘어 다니며 여행자들을 실어 나르고 장날이면 시골 어르신들의 읍내 나들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곳 라오스까지 흘러온 것일까? 어떤 경로를 거처 한국에서 온 여행자조차도 단 한 번 가본 적도 없고 혹은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들의 이름을 품고 옛 크메르 왕국의 낯선 유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어느 산악마을에서 한국인 이민자를 만났을 때처럼 반갑다..
▲ 라오스에서 만난 '태백(?)' 버스 어느 산악마을에서 한국인 이민자를 만났을 때처럼 반갑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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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 800원, 그리고 500원. 그 아래에 적힌 운임이 강원도 산골소년의 얼굴인 양 순진하다. 진즉에, 그깟 알아먹을 수도 없는 글자들을 뜯어내고 찢어버렸어도 그만일 텐데, 지금까지 가만히 붙여놓은 것도 글자에 묻어온 강원도의 그 순진함이, 힘이, 이곳 라오스의 그것과 닮아있어서는 아닐 런지.  

우리들은 지난밤에 비엔티안에서 '슬리핑 버스'를 탔다. 2층으로 되어 있는 버스는 높고 깨끗하고 안락했다. 아이들은 처음 타보는 침대버스에 매료되어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높은 침대에 누워 차창 밖으로 지나는 밤의 흐름을 지켜보았고, 새벽잠을 깨우던 붉고 노란 하늘과 함께 아침녘에 라오스 남부의 주요 도시인 '팍세'에 도착했다. 침대 기차, 장거리 버스, 뚝뚝, 성떼우 그리고 슬로 보트에 이은 지난밤의 '슬리핑 버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라오스 여행에서 타본 것들'의 목록에서 상위에 랭크될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의 의견을 물어본 후에, 팍세에서 하루 정도를 머물기로 했던 애초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예정보다 이른 아침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메콩 강 '안'의 마을 참파삭이나 돈콘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곧바로 시골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인데, 뜻하지 않게 싱싱한 모국의 문자들과 마주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비엔티안에서 팍세까지..
▲ 2층 침대버스 비엔티안에서 팍세까지..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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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째 달리던 버스가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황톳길을 잠깐 달리는가 싶더니, 작은 나루터에 멈추었다. 강폭이 꽤 넓었고, 그 너머로 강을 따라 마을이 보였다. 마침내 참파 꽃이 예쁜 마을, 참파삭에 다다른 것이다. 그곳 강가에 뗏목을 여러 개 이어붙인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프를 타고 팍세에서부터 하루 투어로 온 여행자들을 먼저 태운다.

자리가 조금 여유가 있음에도 우리 일행은 굳이 타지 못하도록 하더니, 그 배가 떠나고 나자 곧바로 젊은 친구 하나가 나타나서 흥정을 한다. 그는 강가에 있는 크고 작은 거룻배들을 가리키며 자기를 통해서만 탈 수 있단다. 그리고는 비싼 요금을 부른다. 육안으로도 훤히 보이는 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비용치고는 심하게 비싼 편이다.

아마 그래서 투어 가이드와 함께 오지 않은 우리 일행을 배에 태우지 않았던 것일 테다. 나의 여행 경험상 이럴 때는 서두르지만 않으면 된다. 아이들에게 배낭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이제 아이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군소리 없이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편히 쉬는 분위기를 연출해 준다. 그런 후에야 내 쪽에서 흥정을 다시 시작한다.

수화로 "I LOVE YOU"...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 뒤에도 눈이 달렸나? 수화로 "I LOVE YOU"...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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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프를 타고 건너간 사람들처럼 바쁘지 않아. 이 마을에서 2~3일 정도 지낼 참이거든. 다음 배를 타거나 그 다음 배를 타도 상관없어. 하늘도 파랗고 강물도 시원한데, 강변에 앉아 한 시간 쯤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너희들 참파삭에 와봤었니?"

"아니, 라오스는 두 번째인데, 참파삭은 처음이야."     
"좋아. 두 배에 나누어 타고 6만 낍."
"오케이, 고마워!"

...
▲ 참파삭으로 가는 배 위에서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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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물을 건너자 한적한 열대의 마을이 나타난다.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강을 따라 난 길로 구멍가게, 게스트하우스, 가정집, 식당들이 이어지는데 마당에는 어김없이 노란색 띠를 두른 하얀 참파 꽃이 피어 있다. 맑고 붉은 황톳길에 떨어진 참파 꽃 한 송이를 줍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태양은 뜨겁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은 파란데, 낮달이 떴다. 길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맑고 높다. 꼭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 와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은 모둠별로 숙소를 구하기 위해 흩어진다. 어쩌다보니 아내와 나는 윤미네 모둠과 같은 호텔을 찾아가게 되었다. 호텔은 넓고 깨끗하고 햇볕이 잘 들면서도 에어컨까지 갖추었다. 그런데도 가격이 저렴했다. 이틀을 묵기로 하고 가격을 흥정하고 있자니,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들려온다.

"야, 빨래 잘 마르겠다."
"진짜! 대박! 우리 빨래부터 하자."

진짜, 우습다. 그리고 흐뭇하다. 녀석들이 집에 있을 땐 단 한 번이라도 빨래란 것을 해보았을까? 특히 손빨래라면. 그런데 지금은 숙소를 구하면서 햇볕 잘 드는 발코니를 보자 제일 먼저 떠올리고 좋아하는 것이 빨래가 잘 마르겠다는 생각이라니. 자기네들이 언제부터 빨래를 했다고 말이다. 가소롭고 우습다가도, 기분이 한없이 좋아진다. 그러니까, 그들과 우리부부가 세대를 넘어 소통하고 공감하는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참파삭의 상점에서
▲ 온갖 종류의 과일들이.. 참파삭의 상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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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윤미는 승현이와 함께 배낭을 풀어놓자마자 마을 구경에 나서더니, 바나나와 옥수수와 파파야를 사왔다. 내일은 오후에 이 지방 전통 마사지를 받기 위해 예약도 해두었단다. 아내와 나도 선착장까지 산책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다른 숙소를 잡은 희경이와 성호를 만났다. 후다닥 뭔가를 감추는데, 둘이 맞잡았던 손을 놓는 것 같다. 확실히 이 두 녀석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대놓고 물어볼까 하다 녀석들이 무안해 할까봐 모른 체 한다.

이들은 또 한 손에 뻥튀기를 들었다. 길에서 어린 꼬마가 팔고 있어 샀단다. 그리고는 값싸게 구한 자기들 숙소 자랑(?)을 한다. 방안 벽면에 도마뱀이 기어 다니고, 욕실에는 개미가 대략 3백 마리 정도가 우글거리지만 문제없단다. 자기들은 이렇게 아낀 돈으로 돈콘에 가서 비싼 호텔에 묵으며 근사한 식사를 할 계획이란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이 이곳 숙소나 문화에 잘 적응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제 스스로의 취향과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나름대로 조직해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부부에게도, 그들에게 이번 여행이 적어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해보았다는 어떤 만족감으로 남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기고 있다.

...
▲ 해질녁 강가에서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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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이들은 이제 여행을 서두르지도 않는다. 점심에 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다함께 식사를 했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인 막내 서희가 주문한 요리를 1시간 가까이 기다리면서도, "여긴 기다림이 일상이에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아이들은 지금 라오스의 시간과 속도에 스스로를 완전히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테이블마다 재잘거리고 있는 그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언제까지나 그들은 지금 이곳, 현재의 시간에만 존재할 것 같다는 착각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 같다.

그날 오후, 수박을 작은 것으로 네 통을 샀다. 그리곤 여행학교 식구들 15명이 모두 우리 숙소에 모였다. 2층 베란다에 앉아 함께 수박을 깨 먹는데, 이번 여행으로 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부부도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은 여행이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여행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다는 걸 나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일기>
따사롭고 나른한 라오스의 오후에 취했는지 모르겠지만 조원 아이들과 다 같이 모여 잠을 잤어. 한 3시간쯤 자고 나서 일어난 나, 성호 둘이서 과일을 사러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옥수수도 하나 샀어. 걸어오다가 막대기 양쪽에 뻥튀기를 걸고서 돌아다니면서 파는 귀여운 아이를 보았는데 "따오 다이?"라고 물으니까 조심스레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천 낍이라고 말하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보면서 하나만 살 뻥튀기를 3통이나 사는 과소비를 하기도 했어.  -신희경(열여덟 살)

(숙소에) 벌레가 엄청 많았다. 진짜, 거짓말 아니고 무진장 많았다. 개인적으로 한때 곤충 학자를 꿈꿨을 정도로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샤워할 때 개미 300여 마리가 우수수 검은 눈처럼 떨어지는 걸 보고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많았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바디워시를 짜는데 개미 세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헛웃음을 치면서 그냥 비벼댔다. 침대에 누우니까 천장에 도마뱀이 있었다. 하하하하하. 정말 자연과 어울림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숙소다.  -서유진(열일곱 살) 

슬슬 라오스 여행이 끝을 달려가는데, 더 있고 싶고 애들과 더 놀고 싶다. 흑,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싫어진다…. (중략) 앞으로 5일 정도면 라오스를 떠나게 된다…. 벌써 여행한 지 17일이나 지났다. 눈 한 번 깜박이니깐 17일이 한 번에 지나간 느낌이 든다.  -박성호(열일곱 살)

저녁을 윤미네와 먹고 숙소에 들어가는데 세상에, 내가 처음 보는 밤하늘이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별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하늘이었다. 하얗게 빛나는 별이 하늘을 가득 채워서 매달려 있었다. 유리의 성 박물관의 전시실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마 그런 밤하늘을 못 보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걸까. 정말 한 조각을 잘라내 선물하고 싶은 밤하늘이었다.  -김하영(스무 살)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참파삭, #침대버스, #시속4킬로미터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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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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