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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 표지
 <약탈적 금융 사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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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왔던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멘트가 나온다.

"대부분의 은행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불준비금제도는 사실 현대판 노예 제도다. 생각해보라. 돈은 빚에서 나온다. 빚을 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빚을 갚기 위해 고용된다. 돈이 빚에서 생기는데 사회가 어떻게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요점이다.

현대 금융 체제에서 돈은 빚이고 빚은 돈이다. 이 돈은 대출을 통해서만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으면 단 1달러도 돌지 않게 된다. "우리 통화 체제에서 빚이 없으면 한 푼의 돈도 없다"고, 연방준비제도 총재 머리너 에키스는 말했다(1941년 9월 30일).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 체계)이 완성한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 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하지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도 책임은 있다

빚은 채권-채무 계약 관계의 산물이다. 채권자인 금융회사는 채무자의 신용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출해줘야 한다. 금융회사의 대부분의 대출자금은 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고객의 예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대출해줄 때에는 대출고객의 현재 신용상태와 미래의 상환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예측하여 대출해주는 것이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그래서일까?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대체로 신용(빚)을 원하는 개인이나 기업의 도덕적 해이 문제를 주로 언급한다. 반면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금융회사가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대출해주었다면 그들도 채무자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다고 봐야 한다. 위험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대출해주었다면 채권자인 금융회사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금융회사들은 그 책임을 지고 있는가?

금융회사가 일말의 도덕적 책임마저 애써 외면한다면 그리고 갚지 못할 것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 주었다면 그건 채무자의 담보를 약탈하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약탈적 대출'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채무 상환 능력은 전문가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급박한 상황에 처한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나 시장에 대한 비이성적 판단이 배제된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신용 평가가 신용 공급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 특히 금융권은 예금자 돈으로 대출 영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금 중개업에 부과하는 책임은 자기 돈을 내주는 사람보다 훨씬 커야 한다. 못 갚는 사람을 탓할 게 아니라 애초 과도하게 빌려 준 은행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 미국에서는 금융 위기 이후 상환 능력 이상으로 돈을 빌려 주는 것을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로 규정하고 법률로 규제하고 있다.(53쪽)

우리는 왜 하우스푸어(house-poor)가 되었을까?

우리 사회의 가계부채는 '내 집 마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중산층과 서민들이 그토록 내 집 마련에 집착하는 이유는 흔히 말하는 '집 없는 서러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집 없는 서러움이란 무엇인가. 전세값이 오를 때마다 이사를 가야 하는 번거로움일 수도 있고,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값 시세를 보며 내 집 장만이 과연 가능할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또한 가까운 지인 가운데 일명 '빚테크'를 통해 시세차익을 거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경험상 집 없는 서러움은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부동산 정책이 주택을 소유한 자나 소유하려는 자 중심으로 만들어져왔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 결과 주택을 소유하지 못한 전세살이, 월세살이들은 그 정책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는 느낌, 지켜줘야 할 재산도 없는 2등 국민으로 대우받은 느낌을 갖는다.

마치 공용도로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가용 소유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래서 정부와 금융회사과 건설회사와 보수언론들은 한 통속이 되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라고.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의 은행 대출을 끼고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당연히 아파트값이 오를 거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파트 값이 하락하면 이들은 채무노예로 전락한다.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번 소득 중 상당 금액을 금융회사에게 원리금으로 갖다 바쳐야 한다. '하우스 푸어'가 되는 것이다. 집을 소유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온전한 자가 소유 주택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금융회사에 원리금이라는 이름의 월세를 내고 있을 뿐이다.

빚 때문에 고민하는 자들이여, 자각하고 분노하고 연대하라

자신의 소득을 일정 기간 저축해도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현실.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 정책 때문에 여차하면 일자리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고가의 외제차와 명품가방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도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양극화된 노동의 현실 속에서, 서민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 수가 없다.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니 대다수 자영업자들은 역대 최악의 불황 속에서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명박 정부와 금융회사들은 끊임없이 빚 문제를 빚으로 해결하려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 그 이외에 이렇다 할 근본적 대책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채무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금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조장하는 세력들은 누구인가. 누가 이 상황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 우리는 자각하고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분노할 수 없고 정당한 분노 없이는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명 부채를 이용해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강압으로 사람을 통제하는 것보다 쉽다. 부채는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약의 형식을 빌려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짊어지게 된 빚에 좌절하고 자책하는 한, 빚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달콤한 유혹은 권력자들에게 매력적인 통치 수단일 수밖에 없다.(235쪽)

<약탈적 금융 사회>는 사회적 기업 (주)에듀머니의 대표이사인 제윤경과 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현욱이 지었다. 왜 우리 사회의 금융시스템이 약탈적인지 구체적 사례를 근거로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미래세대의 주역일 될 청년들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약탈적 금융 사회> 제윤경·이현욱 씀, 부키 펴냄, 2012년 9월, 264쪽, 1만3800원



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부키(2012)


태그:#약탈적 금융사회, #하우스푸어, #약탈적 대출, #제윤경,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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