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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사기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녀석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이 정도로 전화하면 지겨워서라도 받을만한데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의 사건이 서울성동경찰서에서 대전대덕경찰서로 넘어가 사이버팀 수사관에게 배당되었음을 알리는 문자만이 전부였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 원.

지인들에게 이런 나의 경험담을 털어놓자 그 중 몇몇은 자신이 당한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었는데 결론은 그만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사기는 어린 학생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데, 녀석들이 미성년자이면 합의를 하지 않고, 벌금 내고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다. 사기는 내가 당하고 돈은 국가가 번다던가?

사기범 오○○를 잡아라

빨랑 자수해라.
▲ 사기범 오ㅇㅇ을 잡아라 빨랑 자수해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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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속앓이를 하던 어느 날, 혹시 녀석이 다른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볼 생각에 중고○○  카페에 들어가 녀석의 전화번호와 계좌번호 등을 찍었다. 다행히 사기성의 글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녀석의 전화번호가 이름으로 박힌 카페 하나가 검색되었다. 들어가서 보니 나 이외에 녀석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만든 카페였다. 카페이름 '사기범 오○○을 잡아라'. 그렇다. 그 놈의 이름은 장○○이 아니라 오○○이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카페를 훑기 시작했다. 8명의 회원 모두가 H원액기의 3~4만 원 낮은 가격에 혹한 이들로서, 20만 원 정도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서민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례를 공유하며 오○○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성토하고 있었고, 자신의 그 20만 원이 얼마나 피 같은 돈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혹자들은 합의금만 주면 용서해주겠다고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끝까지 합의를 거부하고 오○○의 얼굴을 경찰서에서 보겠다고 했다. 회원들 대부분이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중고를 택했던 이들이니만큼 그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다.

며칠 뒤, 다짜고짜 대전대덕경찰서 사이버국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 진행 경과를 물었다. 피해자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집단행동을 하면 경찰도 우리를 더 신경 쓸 것이라는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쭈빗쭈빗하던 담당 경찰관은 우리가 카페를 만들고 집단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이것저것 털어놓기 시작했다. 범인은 두 명의 학생이고, 내일 출석을 통보했는데, 부모님들이 함께 나올 가능성이 크며 부모들이 합의를 원한다면 내게 전화가 갈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아하. 그렇다면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돈을 보낸 장○○은 오○○ 와 공범일 것이고, 장○○ 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은 나 한 명인 걸로 보아 오○○이 주범이겠구나. 이녀석들, 드디어 잡혔구나!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경찰관 말로는 분명 경찰서에 출석했을 텐데 왜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지? 부모들이 합의를 원치 않는 것일까? 자신의 자식이 진정 감방 가기를 원하는가?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녀석들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 중 장○○ 녀석에게만 답문자가 왔다.

'학교라서 전화 받지 못합니다.'

기가 막힐 뿐이었다. 진짜 내가 학생을 상대로 이렇게 속을 썩히고 있었다니. 도대체 이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범죄를 일으킨 걸까? 학생이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계속 되는 의문에 문자를 날렸다.

고3이라 봐줬다
▲ 진정 취하서 고3이라 봐줬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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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님 그 친구? 아님 장○○?'
'장○○이에요.'

'오○○ 친구 장○○?'
'네 그렇습니다.'

'왜 그랬냐? 돈이 필요해서?'
'아직 어려서 큰 돈이 좋았는지...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큰 돈은 나이 먹어도 좋지. 다만 남의 등쳐서 먹으면 그게 문제지. 오○○은 전화를 안 받던데 피해자들에게 전화해서 빨리 죄송하다고 이야기해라. 악받친 사람 많더라.'
'네 정말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묻자. 피해자들이 경찰한테 신고할꺼란 생각은 안 했어?'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몇 학년인데 그 정도를 생각 못 해? --;;'
'고등학교 3학년인데 이렇게 커지는 건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문자를 주고 받고 30분 뒤 드디어 장○○과 통화를 했다. 녀석은 방학식이어서 전화를 못받았다며, 사기를 쳐서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범은 오○○으로, 자신은 인터넷 사기를 통해 오○○이 돈을 버는 것을 보고 한 번 따라해봤다는 것이었다. 고3이지만 공부에는 취미가 없어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장○○.

뒤이어 장○○의 아버지에게도 전화가 왔다. 부디 합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합의하지 않고 녀석을 감방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섰지만, 범인이 고3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 모든 것이 장○○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무기력한 하루를 살도록 강제하는 사회의 탓도 분명하지 않겠는가.

별 수 없었다. 난 그냥 내가 보냈던 20만5000원만 돌려받고 진정취하서를 작성했다. 혹자는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3을 상대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앞날이 구만리인 학생 아니던가. 부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더 열심히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중에 시간 되면 서울 올라와. 술 한 잔 사줄께.'
'아니에요. 사드려도 제가 나중에 성인 되서 사드려야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끝났느냐? 아니, 아직 사건은 진행 중이다. 다행히 난 장○○에게로부터 돈을 돌려 받았지만, 카페의 다른 회원들은 오○○으로부터 아직 돈을 돌려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 카페에다 사죄의 글을 올리고 경찰에도 출석했다고 하지만, 아직 돈을 돌려받았다는 글은 올라오지 않고 있다. 혹자들에 의하면 오○○은 부모님에게도 이 사실을 아직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끝으로 다들 인터넷 사기 조심하시기를.


태그:#인터넷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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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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