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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왕궁리 5층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과 외양이 비슷하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왕궁리 5층석탑이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과 외양이 비슷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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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탑이다. 탑 이름이 뭐더라? 실물은 비록 못 보았더라도 최소한 사진으로는 본 기억을 국민들은 가지고 있을터다. 모양과 색깔로 미뤄 볼 때 소정방이 백제 왕궁을 불태울 때 검게 그을린 자국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바로 그 탑 같다. 소정방이 '내가 백제를 평정하였노라' 따위의 '낙서'도 탑신에 새겨놓아 한때 '평제탑'이라 불리기도 했던 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말이다.

하지만 사진의 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이 아니다. 정림사지에 직접 가보신 분들 중에는 간혹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분도 계시리라. 사진의 탑이 '국보 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이 아니라면, 내가 그토록 답사를 엉성하게 했단 말인가?

너무 닮아 전문가들도 헷갈리는 두 탑

사진의 탑은 국보 289호인 '전북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다. 정림사지 탑과 왕궁리 탑이 얼마나 흡사한가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편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중 한 대목이 잘 증언해준다. 이 책은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은 정림사지 5층석탑과 너무도 닮은 점이 많아 한때 백제의 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기술한다. 전문가들도 헷갈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찌 일반인들이 두 탑을 사진만 보고 분별할 수 있으랴.

탑의 배경을 통해 두 탑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박물관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혹은 백제초등학교 건물이 나온다. 아니면 고려 때의 석불좌상을 모신 강당 건물이나, 시가지가 사진의 바탕을 이룬다. 그에 비해 왕궁리 5층석탑은 사방으로 아무런 인공물이 없다. 사진의 배경은 그저 잔디밭 일색에, 멀리 보이는 나무와 산, 그리고 하늘뿐이다.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 5층석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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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정림사탑은 8.33m, 왕궁리탑은 8.5m이다. 거의 같다. 기단도 둘 다 1층이다. 지붕돌이 얇고 넓은 것도 같다. 지붕돌의 모서리가 살짝 들려 있는 것까지도 같다. 심지어 불마가 할퀸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검게 그을린 빛깔까지 닮았다. 그래서 전문가들도 이 탑이 백제가 남긴 대표적인 탑- 정림사탑과 빼닮았다는 점에서 당연히 백제 때 지어진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이 탑을 통일신라 초기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또 고려 때 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의 소책자에는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 왕궁의 경영이 끝나고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략)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말기로 보고 있으나 석탑의 견립 연대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 통일신라 초기,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일치된 의견 접근이 어려운 상태'라고 기술되어 있다.

탑은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500m가량 떨어져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탑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왕궁의 석축 가운데로 탑을 향해 걷는다. 탑이 있는 곳은 전시관 터보다 조금 높다. 그렇다고 그리로 가는 길을 오르막이라 고 부를 수는 없다. 그만큼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6월 22일 오전, 탑을 둘러보는 것으로 내내 유쾌했다. 탑 주위로 아무 방해물이 없어 불어오는 바람조차 곧장 직선이다. 넓은 잔디는 탑 뒤로도 아득히 깔려 있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탑 일대가 배롱나무 천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 배롱나무꽃이 지금쯤 아롱아롱 붉게 피었을 것을 상상하면 그 나무들이 무성한 풍경도 그립지만, 그것은 차라리 아기자기한 다보탑이랑 어울릴 일이다 싶다. 간결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뽐내는 왕궁리 5층석탑 주변은 지금처럼 단아한 풍치를 보여주는 게 최선이다. 번잡한 부여 시내에 놓인 정림사지 5층석탑이 공연히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왕궁리 5층석탑(왼쪽)과 정림사지 5층석탑을 비교해 보니...
 왕궁리 5층석탑(왼쪽)과 정림사지 5층석탑을 비교해 보니...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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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탑이 북쪽으로 제법 기울어져 있어서 붕괴 사고를 예방해야 했다. 그래서 해체, 보수 작업을 했다. 이때 사리함을 비롯한 유물이 발굴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그후 1989년부터 21년째 왕궁리유적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임금이 정사를 돌보았던 정전건물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등을 찾아냈다. 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관사'와 유사한 사찰명인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등의 이름이 적힌 명문기와들도 출토되었다. 2008년에는 이곳에 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을 받아 왕궁리유적전시관이 건립되었다.

해체, 보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륵사터 석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보 11호인 미륵사터 석탑은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 북쪽으로 약 5km 거리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가도 볼 수 없다. 해체되어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인데 2016년이나 되어야 일반에게 공개된다.

올해가 중앙 정부 지정 '전북 방문의 해'라고 해서 발걸음을 했는데, 백제가요 '정읍사', 내장산, 선운사와 더불어 전북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미륵사터 석탑을 볼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쉬웠다. 단아한 왕궁리 탑 앞에서 줄곧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던 2012년 6월 22일 오전, 그러나 오후는 실망에 젖은 채 반쯤 부서진 탑처럼 기울어버린 마음을 달래며 미륵사터 담장에 몸을 기댄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해체, 보수 작업 중이라 지금은 찾아가도 볼 수 없고, 2016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진은 미륵사터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원광대학교 홍보판의 부착물을 촬영한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 해체, 보수 작업 중이라 지금은 찾아가도 볼 수 없고, 2016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진은 미륵사터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원광대학교 홍보판의 부착물을 촬영한 것이다.
ⓒ 원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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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그린 왕궁리 5층석탑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는 6월 5일부터 8월 5일까지 어린이들이 그린 문화재 그림이 기획전으로 전시되고 있다. 아래의 사진은 최우수상에 뽑힌 세 작품이다. 박초현(경남 창원 라자스 유치원), 김서현(이리 북초등학교 1학년), 안새희(이리 부천초 5학년) 세 어린이가 최우수상에 뽑혔다.

박물관이 유물류만 전시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의 표시인 그림이나 사진을 곁들여 전시하는 것도 좋겠다.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서 그런 생각이 들어, 세 어린이의 그림을 아래에 소개한다.

안새희(이리 부천초 5)의 그림
 안새희(이리 부천초 5)의 그림
ⓒ 안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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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현(경남 창원 라자스 유치원)의 그림
 박초현(경남 창원 라자스 유치원)의 그림
ⓒ 박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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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이리 북초등1)의 그림
 김서현(이리 북초등1)의 그림
ⓒ 김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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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왕궁리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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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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