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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파'와 '문지파'. 그 옛날 국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일 것이다. 흔히 현대시를 이야기할 때, 시집(詩集)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창비시선'(창작과 비평사)과 '문지시선'(문학과 지성사)이다.

물론 이들만 '시선'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다양한 내용과 시각을 담은 시집들이 각 출판사별로 나왔고 이를 통해 많은 시인들이 배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시선집을 대표로 꼽는 이유는 지금도 '문학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마다 논쟁이 되는 '참여성'과 '예술성'을 각각 대표하는 시선집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 현대시가 양날개를 달고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문학'의 승리를 자신하며 펴낸 <농무>

'창비시선'의 첫 번째 시집은 1975년에 나온 신경림의 <농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당시 농민의 생활이 시들의 주를 이룬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농민의 생활'은 결코 흥겹거나 정겹지만은 않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농무')

'국수 반 사발에/ 막걸리로 채워진 뱃속/ 농자천하지대본/ 농기를 세워놓고/ 면장을 앞장 세워/ 이장집 사랑 마당을 돈다/...(중략).../펄럭이는 농기 아래/ 온 마을이 취해 돌아가는/ 아아 오늘은 무슨 날인가/ 무슨 날인가'('오늘')

이처럼 <농무>는 70년대 산업화에 밀려 점점 퇴색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묘사한 시들로 이루어졌다. 해마다 나가떨어지는 '깡마른 본바닥 장정'('씨름'), 겨울이 오는 바람에 금방 파장이 된 장거리('폭풍'), 가뭄 때문에 장날인데도 너무나 한산하고 오랜만에 만나도 말도 없이 '거짓된 웃음'으로 손만 잡는 시골 친구들('산읍기행') 등이 이를 보여준다.

경제적, 정신적 몰락이 시작되는 70년대의 농촌을 시인은 나름대로 정겨운 말투에 담아 써보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쓸쓸해진 농촌의 모습을 더 확인시킬 뿐이다. 쓰러져가는 농촌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창비시선'의 대장정이 시작된 셈이다.

창비를 만들었고 편집인을 맡았던 백낙청은 발문에서 '민중의 현실에서는 비켜서서 오히려 그 현실을 은폐하고 악화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복고주의적, 감상주의적 정한이 아니다'라고 시들을 평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쓴다.

'문학에서도 결국은 물고기가 바다에 의존하듯 민중의 삶에 스스로를 의탁하는 작가와 작품이 끈덕지게 살아남아 승리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이렇게 '민중문학'이 승리하리라는 자신감이 '창비시선'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련된 시, 꼼꼼한 비평으로 승부한 '문지'

'문지시선'의 첫 번째 시집은 1978년 출간된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이다. 이 시집의 발문은 바로 '문예비평'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평론가 김현이 썼다. 뭔가 이들의 이름 속에서 '문학성'이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창비가 민중의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문지는 문학의 형식 그 자체에 바탕을 둔다. 직접적인 고발보다는 문학의 사상과 형식에 입각한 '세련된' 스타일의 시들이 이들의 특징이었다. 황동규의 시만 해도 그렇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중략).../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뒤 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조그만 사랑 노래')

<나는 바퀴를 굴리고 싶어진다>는 현실 고발이나 민중의 이야기보다는 '지성'과 '감수성'을 앞세운, 시의 형식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들로 구성됐다. '종이 다섯 장에 행을 이루지 못한 말을 가득 썼습니다'('편지2'), '병든 말(言)이다,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계엄령 속의 눈') 등의 문학적 표현이 눈에 많이 띈다.

이 시집 속 김현의 발문은 그야말로 황동규의 시를 따져보고 분석하는 글이다. 창비의 발문들보다는 상당히 비평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 여기에 문지시선의 가장 큰 특징을 소개하면 책 뒷면에 바로 그 시인의 '시작(詩作) 노트'가 실려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일종의 '작가 소개'인 셈이다. 작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란 말이다.

300여권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 읽힐 '제1권'

물론 '창비시선'이 민중문학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문지시선'이 현실을 무시한, 현학적인 시만 다루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분명 달랐고 그것은 문학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문학의 역할'을 토론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 요인이 됐다. 그리고 그 인기는 지금까지 300여권의 시집이 출판되면서 계속 이어졌다.

역사의 시작을 보는 데 있어서 각자 처음 펴낸 시집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이렇게 서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농무>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는 이 두 시선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역사와 같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읽힐 시집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IP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경림, <농무>, 창작과 비평사, 1996년판.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 지성사, 1996년판.



농무 -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품집

신경림 지음, 창비(197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황동규 지음, 문학과지성사(1994)


태그:#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신경림, #황동규, #농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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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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