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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의 탁월함은 그가 위대한 인물들을 흉내내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결단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문학을 공부한다면 물러나지 마세요. 니체 같은 철학자 책 100권 책 읽기만 하면 뭐해요. 인문학 공부를 하는데도 그에 맞는 활동을 못하는 사람들은 잘못 공부한 거예요. 우리는 매번, 매 상황에서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도 인문학도 결국 '나'를 주어로 하는 학문이라는 평소 자신의 지론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철학 VS 철학>의 저자 강신주 박사가 10주에 걸쳐 열 명의 동·서양 철학자를 다루는 '철학 고전읽기' 마지막 수업에서 선택한 마지막 철학자는 중국의 이지(李贄)였다. 강 박사는 지난 19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철학자 이지와 그의 주저인 <분서>에 대해 강의했다.

강 박사는 강의에서 이지를 가리켜 "중국 철학사에서 가장 저주받았던 철학자"라고 소개하며 "그는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나 맹자, 주자 등 유학의 철학자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날 '철학 고전읽기' 강의를 마치며 수강생들에게 "내가 10주간 강의했던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 성리학의 시대에 공·맹을 비판하다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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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는 16세기 중국 명나라 시대의 철학자로 탁오(卓吾)라는 호로 더 유명하다. 명나라 시대의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사상 중에서도 12세기 남송의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고 나선 최초의 철학자다. 강 박사는 당시 이지의 행동을 북한에서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에 비유했다.

"중국 철학의 전통 중 하나가 자기 이름으로 책을 안내고 주석서를 쓴다는 것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 내용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자기 생각을 주석으로 다는 식이지요. 이지는 자기 이름으로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내면서 그 책의 이름을 <분서>라고 지었습니다. 분은 태울 분(焚), 서는 책 서(書)자입니다.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것이지요. 마치 자신의 사유가 당시에는 읽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니체처럼 말입니다." 

이지의 <분서>는 크게 '서답(書答)', '잡술(雜述)', '독사(讀史)', '시가(詩歌)', '증보(增補)'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서답(書答)은 이지의 철학적 입장을 적어놓은 부분이고 잡술(雜述)은 이지가 쓴 논문, 서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며 독사(讀史)는 이지 특유의 사유가 반영된 역사 논평이다. 강 박사는 "이지는 <분서>에 공자와 맹자 비판뿐 아니라 당대 학자들의 폐단에 대해 상세하게 썼다"고 설명했다.

"이지의 탁월함은 그가 당대의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위대한 인물을 흉내내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결단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지는 이 책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오십 세 이전의 자신을 가리켜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어대는 개에 불과했다'고 평가하면서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올 때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만의 사유 가지려 했던 이지처럼 살아야"

강 박사는 <분서>의 내용 중 동양의 형이상학을 정면으로 공격한 '부부론'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주자학에서는 '하나가 둘을 낳고 이치가 기를 낳으며 태극이 음과 양을 낳는다'는 우주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지는 이 최초의 '하나'를 부정했다"고 말했다.

"이지는 애초에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음과 양, 남자와 여자라는 두 생명만이 있었을 뿐, 하나라던가 이치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부부가 만물의 시초라는 것이지요. 이지가 비판했던 주자학의 우주론은 최초의 '하나'가 있어서 그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을 넷을 낳는 식으로 나무가 가지를 뻗어나가는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동양적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구조입니다. 뭔가 가지를 따라서 나무뿌리로 들어가면 세계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애초에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것을 이지가 지적한 것입니다."

강 박사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전통은 한국에도 이어지고 있고 가부장제와 동성동본 금지의 논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부장제 아래의 족보와 성씨에서 모계는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 시조는 김수로 왕입니다. 김수로는 알에서 태어나지요?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모계를 부정하는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족보를 이으려면 매 세대마다 부인이 필요한데 그 부인들을 구성하는 혈통들은 족보에서 구현되지 않지요. 오늘날의 상식으로 본다면 생물학적 기초가 없는 사고방식인데 아직도 일부에서 비판 없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지가 그 당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느꼈을 고독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가 수업을 듣고 있다.
 수강생들이 강신주 박사의 '철학 고전읽기'가 수업을 듣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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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박사는 이날 고독했던 이지의 삶과 <분서>를 발췌한 내용으로 진행했던 강의를 마치며 수강생들에게 "남을 따라살지 않고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려 했던 이지처럼 우리는 매번, 매 상황에서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여러분 각자가 여러분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지난 10주 동안 만났던 철학자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쳐줬던 것"이라고 말하며 '철학 고전읽기' 강좌를 마무리했다.


태그:#강신주, #이지, #철학 고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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