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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사건 가담자 및 주최자를 엄중 사법 조치하겠다."(경찰청)

"종로경찰서장이 집회현장 빠져 나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봤다. 야유와 욕은 있었어도 폭행은 절대 없었다." (11월 27일 <머니투데이> '종로서장폭행' 두고 네티즌 설전, 폭행 잘못 vs. 의도된 꼼수' 중 한미FTA 반대시위 참가자)

 

지난 26일 광화문에서 열린 '한미 FTA 반대 집회'에서 발생한 박건찬 종로경찰서장 폭행 사건을 두고 경찰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채증자료를 바탕으로 폭력 행위 가담자를 밝혀내 구속 수사하며, 집회 주최자에 대해 엄중 처벌할 것"이라며 "피해를 입은 경찰관은 민사상 손해배상도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트위터 @poiup7652는 "굳이 흥분한 시민들을 뚫고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폴리스라인 옆으로 돌아 갈 수도 있었는데"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경찰이 김아무개씨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긴급체포했으니 곧 진위가 가려질 것입니다.

 

그런데 박건찬 서장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91년 6월 '정원식 국무총리서리 달걀 투척사건'입니다. 1991년, 개학하자 마자 정국은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씨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두들겨 맞고 방치됐다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한 시간 만에 숨졌습니다.

 

이후 대학가에는 분신정국이 형성됐습니다. 1991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박승희씨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 5월 1일엔 안동대학교 김영균씨,  5월 3일엔 경원대학교 천세용씨가 분신했습니다. 그리고 5월 25일에는 성균관대 불어불문과 김귀정씨가 백골단의 강제진압에 의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민정당·통일민주당·공화당의 '야당 3합'으로 국회를 완전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정권은 타도 대상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노태우 정권은 강경대 타살과 잇다른 분신으로 집권 3년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정원식 달걀 투척사건'은 일거에 분위기를 반전시켰습니다.

 

강경대 타살과 분신정권 위기 몰린 노태우 정권

 

정원식은 1991년 5월 24일 국무총리에 내정됐지만 '서리' 딱지를 떼지 못했고,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6월 3일 마지막 강의를 해야 한다며 한국외대로 갔습니다. 하지만 강경대 타살과 분신정국으로 학생들은 노태우 정권에 대해 극도의 분노로 예민해져 있었고 세종대·덕성여대·부산대 등을 방문했을 때부터 학생들에게 조롱과 야유를 들었습니다.

 

특히 '정 국무총리서리가 한국외대를 방문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면서 수행원과 가족이 동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는 정정당당하게 갔습니다. 가면 안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갔고, 일은 벌어졌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정 국무총리서리를 본 학생들은 "귀정이 살려내라",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원식에게 달걀, 페인트와 밀가루를 던졌습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달걀을 던졌던 이유는 그가 국무총리 서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2년 전, 그러니까 1989년 그는 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전국교직원노조(전교조)를 불법화하고, 구속과 불이익 조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전교조 탄압의 원조'라는 앙금이 함께 터진 것입니다.

 

정원식 달걀 맞자 노태우 정권 "반인륜범죄, 체제전복세력"

 

노태우 정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당장 언론이 나섰습니다. <조선일보>는 6월 4일자 1면에 정 국무총리서리가 달걀 투척을 받은 사진을 대문짝 만하게 실었고 2면과 30면, 31면에도 실었습니다.

 

<조선일보>는 노태우 대통령이 윤형섭 교육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교수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마지막 수업에 나간 정 국무총리서리에게 이같은 폭행을 저지른 일은 학생본분은 물론 인륜에 비추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학생 두 명이 경찰이 휘두른 파이프에 죽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분신한 학생들이 줄줄이 생겼는데, 사과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던 노태우는 달걀 투척을 두고 "인륜에 비추어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륜은 누가 저버렸는지 제대로 따져봐야 합니다.

 

<조선일보>는 6월 5일 1면에 '학내외 폭력 단호 대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부는 특히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는 물론 체제옹호세력인 지식인 사회지도층이 용기 있게 나서 국민적인 법질서수호에 동참토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정부는 또 그동안 수없이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수많은 전경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해도 공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이같은 사태발생이 예견됐다고 지적, 체제전복세력을 철저히 뿌리뽑기로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정 국무총리서리에게 달걀을 던졌을 뿐이지만 하루아침에 '체제전복세력'이 된 것입니다.

 

<조선> "민중혁명세력이자, 주사파 집단"이라며 맹폭

 

이어 <조선일보>는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정구영 검찰총장은 "이 사건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헌법 질서를 뒤흔드는 행위"라며 "검찰은 법집행기관의 명예를 걸고 관련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엄단하라"고 말했습니다. 정 총장은 또 "이번 사건은 국무총리 이전에 원로교수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라며 "정황으로 볼 때 계획적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만큼 배후관계도 철저히 가려내 폭력이 정당화되는 풍조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강경대씨를 쇠파이프로 죽인 정권이 달걀을 던진 세력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헌법질서를 뒤흔드는 세력'으로 규정해버렸습니다. '달걀·페인트·밀가루'를 정 국무총리서리에게 던진 학생들과 쇠파이프로 학생을 둘이나 죽인 노태우 정권 중 누가 반인륜이고, 헌법질서를 뒤흔든 행위를 저지른 지 당시 사람들은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조선일보>는 5일  2, 3, 4, 5, 9, 22, 23면에 정 총리 서리 달걀투척 사건을 다뤘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사설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정원식 총리서리의 집단폭행 사태를 접하고 먼저 갈데까지간 일부 대학생들의 패륜적 행동을 개탄한다. 이런 개탄은 곧 그들의 배후에 분명히 있을 조직세력에 대한 섬뜩함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번 사건은 결코 우발적이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에 의한 것이며, 정총리에게 위해를 가한자들은 그저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들 조직은 이제 윤리적 투쟁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계급 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민중혁명 세력이며 주사파 집단이라고 세간에선 보고 있다. 이들 세력은 그 동원과정에서 치밀하게 조직적이며 자금면에서도 수만개의 도시락을 동시에 조달할 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조직세력이 마침내 가투와 병행해서 테러를 자행하는 전법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감지해야 한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폭력투쟁으로까지 발전할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선일보> 1991년 6월 5일 자 사설 '운동권은 타락하고 있다' 중)

 

결국 <조선일보>의 주장은 통했습니다. 학생들은 연행됐고, 스승도 모르는 패륜아로 몰렸습니다. 들끓었던 시위는 사라졌고, 2주 뒤인 6월 20일 치러진 시·도의회의원선거에서 민자당은 호남(전남·전북·광주)을 뺀 전지역에서 승리했습니다. 국회와 지방의회까지 장악함으로써 정국주도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때도 정 국무총리서리가 스스로 몸을 던져 위기에 빠진 노태우 정권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반박이 있었지만, 1990년 소련-동구권 몰락과 함께 '정원식 달걀 투척사건'으로 학생운동권은 점점 힘을 잃게됩니다.

 

20년 후 이명박 정권도 최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내곡동사저'논란, 한미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로 여론은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박건찬 종로경찰서장 폭생사건이 터졌습니다. 

 

청와대 "박건찬 폭행, 공권력 도전 용납할 수 없어"

 

이명박 정권은 이를 '폭력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연합뉴스>는 청와대가 지난 27일 한미FTA 반대 집회 과정에서 박건찬 종로경찰서장이 한 시위자로부터 폭행당한 사건에 대해 "공권력 도전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도 지난 27일 서면 브리핑에서 "국가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며, 이번 공무집행방해 및 집단적 폭력행위는 법치국가의 기본을 부정하는 범죄행위로서 결코 묵인할 수 없는 문제"라며 "경찰은 불법시위대들의 공무집행방해 및 집단폭행사건을 철저히 밝혀 엄중히 처벌하고, 또한 불법 집회와 시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박 종로경찰서장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또 그렇게 할 상황이 온다면 경찰서장으로서 언제든지 다시 (시위 현장으로) 들어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박 서장 폭행이 사실이라면 원인 제공을 떠나서 비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이번 일을 '집단적 폭력행위'니, '공권력 도전 차원'이니 하면서 집회 참가자를 범법자로 매도해 정국을 반전시키려는 꼼수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정원식 국무총리서리 사건 때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일보> 등의 언론이 학생운동권을 '패륜'으로 모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명박 정권과 <조·중·동> 같은 언론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SNS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SNS의 여론이 폭행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은 밝혀질 것입니다. 적어도 2011년 11월 26일의 사건은 1991년 6월 3일, 그때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건찬, #종로서장, #정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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