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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결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지지고 볶고 살 것을 생각하면 '고생문이 열렸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됐든 요즘은 결혼 안 하고 사는 '나홀로족'들이 많아지는데, '결혼한 사람들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에 축하를 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 결혼 생활에 비춰 봤을 때 나는 딸아이에게 결혼을 '강추'하지 않는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얘기한다. 결혼해서 힘들고, 속썩고 사는 거에 비하면 혼자 사는 게 뱃속도 편하고 자유롭다고….

나는 결혼 25년차다. 베테랑일 법도 하지만 종종 전쟁을 치른다.

"내가 미쳤지, 잘못 골랐지. 물건이면 무르기라도 하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시어머니한테 돌려 드릴 수도 없고…. 에고 이걸 어찌해야 하나?"

요즘은 묻지 않지만 딸아이는 어렸을 적에 간혹 이렇게 묻곤했다.

"엄마아빠는 어떻게 결혼했어요? 누가 먼저 하자고 했어요?"

연애 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재밌게 들려줘야 할 테지만, 무슨 일인지 그 질문만 나오면 혈압이 오르고, 심사가 불편해지면서 애꿎은 아이한테 신경질부터 냈다.

"그건 니가 알아서 뭐하게? 묻지마!"

그러면 딸아이는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는 투로 시무룩해져 돌아서곤 했다. 퉁명스러운 대답과 핀잔으로 아이를 무안하게 만들었던 적이 여러 번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아마도 학교에서 가족관계를 배울 때 그런 숙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대체 이 질문에 내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내가 생각했던 결혼생활이 아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의 말 한 마디,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 몰랐다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의 한 장면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의 한 장면
ⓒ 튜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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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는 3가지였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첫째는 계획보다 결혼을 일찍한 것(26살에 결혼했다), 둘째는 큰 아이 출산, 셋째는 둘째 아이 출산이었다. 나는 지인들한테 이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아이들이 어릴 땐 무슨 소리인지 모르다가 어느날 이 얘기를 큰 아이가 듣고 낙담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후로는 아이에게 해명을 하고 입조심하기도 했다.

내가 결혼하게 된 건 대학 4학년(1983년)때 사회과학 스터디모임을 해주던 선배의 군입대 때문이었다. 그 선배는 자신이 군대에 가 있는 사이 모임을 이끌어 줄 후임으로 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그의 첫인상은 맘에 들지 않았으나 공부 때문에 모임에 소개된 사람이니까 별다른 부담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런데 첫날 만남에서 그는 대뜸 요즘 아이들말로 '헉'스런 말을 했다.

"철수(가명)선배 덕분에 장가가게 생겼네!"

그는 내 인생하고는 전혀 관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그는 자기가 가장 존경한다는 선배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 선배말이 더 걸작이었다.

"너는 마누라가 도망만 안 가면 인생 성공한 거야."

이때는 이런 말들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줄은 상상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잘 생기지도 않은 외모에, 키도 작고, 깔끔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매너가 좋은 것도 아닌 데다가, 나이도 많고(나보다 7살 연상)…. 게다가 공적으로 소개받은 터였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후배들 사이에서 그는 독선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어떤 면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인 무서운 선배로 유명했다. 아는 게 많아 해박하고 박학다식하긴 했지만,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얘기를 관철하고 마는 큰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그만큼 에너지가 강력한 사람이었다. 나하고는 맞지 않다 생각하고는 한동안 그와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급하게 올린 결혼식, 젊음이 있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2년이 좀 더 지난 1986년 2월말, 발령 연수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드디어 교원 발령이 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발령지는 살고 있는 서울이 아닌 남쪽 지방이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에 가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고 불안했다. 그래서 누군가 하나쯤은 마음이 연결되는 끈으로 남겨두는 게 어떨까 고민하던 중에 그가 생각났다. 혹시나 해서 그의 의사를 물어봤는데….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던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른 꼴이 되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주변사람들의 협조까지 얻어 신속하게 나를 공략(?)했고, 나는 다른 생각할 틈없이 결혼식 순서를 밟는 대로 빠르게 이끌려갔다.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셋이었으니 급하기도 했으리라.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꼴이었다.

'많은 사람중에 왜 하필 그가 생각났을까?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는 우리집에 인사를 왔을 때 가진 것도 없었고, 집안도 어려웠고, 앞날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다(그는 출판업을 하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달가와하지 않았다). 친정아버지는 그런 그를 '마음 하나는 곧다'고, '진실해 보인다'고 승낙하셨다.

3월 1일, 예비 시댁에 인사를 갔고 바로 양가 상견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4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 서두르는 결혼이 부담스러웠고, 썩 내키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아닌데'라면서도 그가 밀어붙여, 내몰리듯이 하게 된 결혼이었다. 그런데 웬걸! 발령은 안 났고 결혼생활은 시작됐다.

보증금 200만 원에 월 15만 원짜리 셋방을 얻어 시작한 신혼생활. 친정 쪽에서는 장롱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수 없는 방을 얻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했고 남편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할 수 없다' 싶기도 했고 '나중엔 쥐구멍에 볕들 좋은 날 오겠지', '사업이 잘 풀리는 날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젊으니까, 시간이 있으니까!

주말부부 3년,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지만...

SBS 주말드라마 <그대웃어요>의 한 장면.
 SBS 주말드라마 <그대웃어요>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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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고 있는데 9월 1일자로 발령이 났다. 나는 당시 임신 3개월차였고, 혼자 지방으로 내려가기 싫어 발령을 포기할까 고민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남편은 "포기하지 말고, 내려가서 정 견디기 힘들면 그때 포기해도 늦지 않다"고 위로(?) 겸 격려를 해줬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그때 포기했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 왜냐하면 내 직업으로 여지껏 가정을 꾸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발령을 포기했다면 또 다른 기회를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임신한 가운데에서도 직장생활을 잘했고, 번갈아가며 서울과 부안을 오갔다. 한 번은 남편이, 한 번은 내가. 이렇게 우린 주말부부로 3년을 살았다. 오히려 떨어져 사는것이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게하는 마음도 생기게 했다. 그래서인지 싸울 일도 자연스레 피하게 됐다.

그래도 간혹 아닌 말로 결혼을 빨리 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직장에는 '저런 사람 정도면 남편감으로 괜찮겠다' 싶은 사람들이 보였다. 안타까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거야 마음이 그랬다는 것일뿐, 현실은 현실이니까 내 생활은 내 생활대로 무리없이 사람들하고 잘 지냈다. 오히려 한편으로는 자유로웠다. 남편이 내려오는 날 아니면 직장 동료들하고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1989년 9월에 서울로 발령이 났다. 드디어 세 식구가 같이 모여 살게 됐다. 모여 살면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1~2년은 정말 피 튀길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것 같다. 남편의 간섭이 심하고 돈을 제대로 갖다주지 않아 집안살림은 힘들고… 이중 삼중의 어려움으로 정말 많이 싸우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0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둘이어서 직장생활하랴 살림하랴 가장 노릇하랴 힘들었다. 그래도 남편은 아이 기저귀 하나 안 갈아주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다. 게다가 아이들한테 다정다감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들 녀석하고 같이 공 좀 차고 놀아주지…. 아들에게 항상 엄하기만 했다. 다행히 일흔이 넘은 친정 엄마가 아이 둘을 참 알뜰히 보살펴주셔서 숨통이 트였다.

그래도 남편 인생 성공의 일등공신은 나

그러던 와중에 남편의 사업에 차질이 생겨 내 월급에 차압이 두 번씩이나 들어왔다. 빚 때문에 은행에서 허구한 날 직장으로, 집으로 독촉전화가 빗발쳤다. 결국 전셋돈 빼서 빚을 갚고 수중엔 한 푼도 없이 다시 의정부의 굴속 같은 집으로 이사가게 됐다.  그동안 어렵게 모아 장만했던 전세금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가고, 다시 또 아무것도 없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마치 바위를 산 정상 근처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느낌이랄까? 지금 생각하면 그 힘든 날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꿈만 같다. 결혼 전에 남편의 선배가 한 말이 기억났다.

"김영수(가명)! 너는 마누라가 도망만 안 가면 인생 성공한 거야!"

왜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랐을까?

친정 부모님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지났고 아이들은 스무살이 넘었다. 지금 누군가 내게 "당신의 나이를 돌려 줄 테니 몇 살 때로 돌아가고 싶소?"라고 묻는다면, "지금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30대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심지어 꿈에서조차도….  그땐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도 안 나고, 너무 힘들었던 기억만 남는다. 아픈 기억이 더 많다.

물론 지금은 인지력도 떨어지고 젊은 패기도 없지만 여유로움과 어떤 것을 선택해도, 어떤 일을 행해도 쏠리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킬 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다시 말하자면 인생을 즐길 줄 알게 됐다. 마음이 가는대로 해도 지나치지 않는 균형감이 생긴 것이 지금의 나이가 주는 장점이다.

몇 년 전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는 주인공 한자(김혜자 분)가 1년 동안의 휴가를 달라며 집을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는 '일 년 휴가는 좀 심했다. 한 달 정도면 모를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공감간다. 나도 일 년 정도 쉬면서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동안 가족 돌보느라 못했던 것들을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요즘 나는 남편에게 당당히 말한다.

"25년은 세 식구를 위해 봉사했으니 이제 남은 25년은 당신이 나한네 봉사하며 살아줄 수 없어요? 제발 나 좀 자유롭게 살도록 놔주시죠!"

얼마 전 친구들과 모여 수다를 떨다가 남편 얘기, 아이들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다보니 우리집 사정도 얘기하게 됐다.

"결혼할 때 그 집은 사주도 안 봤어?"
"나는 그런 거에 별 관심 없었어. 내 의지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친정 엄마한테 많이 들은 말이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남편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었는데 난 그 말이 참 싫었어. 왜 여자 팔자가 남자에 따라 달라져야 되는 거야? 여자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거 아냐? 난 '내 의지로 바꿔갈거야!'라는 생각이었지. 근데 지금 와서 보니 친정 엄마 말이 맞았네."

그래도 남편 선배의 말대로 마누라인 내가 도망 안 가고 애들 잘 키우고 지금껏 살고 있으니 남편 인생의 절반쯤은 성공한 거겠지?

덧붙이는 글 | '결혼 그 사소한 것들'에 응모합니다



태그:#결혼, #사주, #인생, #성공,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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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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