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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캠프 캐럴 주한미군의 고엽제 불법 매립 의혹을 폭로했던 스티브 하우스씨가 2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128호에서 열린 '전 주한미군 고엽제 피해자 국회 증언대회'에 참석하여 관련 사실을 증언했다.

다음은 그의 국회 증언내용 전문이다. [편집자말]
전 미 8군 802 공병대대 D중대 상병 스티브 F. 하우스

존경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과 '주한미군 고엽제 등 환경범죄 진상규명과 원상회복 촉구 국민회의' 대표 여러분, 이 증언대회에 참석해 캠프 캐럴에서의 고엽제(Agent Orange) 매립에 대해 아는 바를 말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한국으로 다시 와서 이렇게 직접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한국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초청을 처음 받았을 때, 좋지 않은 건강상태 때문에 망설였지만, 결국 "어떻게 해서든 와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 근무했던 퇴역 군인들뿐 아니라 한국민들 그리고 현재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0여년 만에 한국에 다시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미 육군에 1975년 12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근무했으며, 캠프 캐럴에서는 1978년 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803 공병대대 델타(D) 중대에서 일했습니다. 제 전문 보직은 '건설 중장비 기사'였고, 캠프 캐럴에서의 직속 상관은 마크 햄린 병장, 중대장은 스티븐 냇시 대위였습니다.

이제부터 캠프 캐럴에서의 수백 드럼의 맹독성 화학물질 매립과 관련해 제기되는 점들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 제 현재 건강 상태에 대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캠프 캐럴에서 의심스럽고 불편했던 경험

1978년 늦봄 또는 초여름 경, 다른 5명 정도의 중장비 기사들과 함께 저는 하나의 업무에 배치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주간, 우리는 매일 방독면을 포함, 화생방복을 착용하고 적절하고 안전하게 입고 다니는지 확인하는 화생방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때 우리의 방독면에는 오렌지색 실전용 필터가 부착돼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델타(D) 구역'으로 가서 측량 기사를 도와 무언가를 묻기 위해 우리가 팔 참호를 측정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델타(D) 구역은 캠프 캐럴 내 헬기장 뒤에 있는 고원 같은 평지였습니다. 참호는 대략 폭 25~30 피트, 깊이 20~30 피트, 그리고 4분의 3 블록 정도였습니다. 땅의 재질은 진흙이 아닌 모래였습니다.

참호가 완성되자, 우리 부대의 덤프트럭이 올리브-그린 색의 55갤런 드럼통, 몇 가지는 오렌지 줄과 노란색 글씨로 '화학물질, 형태 : 오렌지', '베트남'이라고 써 있는 드럼통들을 운반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업 지역의 높은 습도와 온도 때문에 몇 명이 쓰러지고 아프기 시작하자, 우리는 방독면을 쓰지 않아도 좋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많은 드럼통들이 녹슬거나 용액이 새고 있었고, 드럼통들을 트럭에서 참호로 옮길 때, 많은 드럼통들이 깨지거나 용액이 심하게 새어나와 저와 동료 병사들에게 화학 물질이 묻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기지의 모든 드럼통들을 옮겨 참호에 매립한 뒤, 한국 내 다른 부대들의 트럭이 고엽제와 내용물이 알 수 없는 드럼통들을 싣고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트럭들이 도착하면, 저나 다른 하역 기사들이 불려가 그 트럭들을 참호로 인도하고, 트럭에 실린 드럼통들을 참호에 넣고 불도저로 위를 모래로 덮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978년 가을까지 거의 6개월간, 일주일에 2~3회, 저는 D구역으로 가서 기지 외부에서 들어온 드럼통들을 매립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제 불도저와 버켓 로더는 이 일을 위해 참호 지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드럼통들이 녹슬거나 용액이 새고 있었습니다.

늦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평상형 트레일러를 단 트랙터가 칠흑같은 밤에 참호로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드럼통들이 부분적으로 방수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밑부분 4분의 1 정도가 보였습니다. 이들은 밝은 노란색으로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중위 한 명이 이 드럼통들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설명 해주지는 않고 알 필요가 없다는 대답만을 했습니다. 그 중위는 저를 트랙터 트레일러에 태워 후진하여 참호 안으로 들어가게 한 뒤, 트레일러 연결 부분을 떼고 트랙터만 몰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으러 갔던 두 부사관들과 함께 그 중위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대부분의 작업을 마친 어느 날 저녁, 찰리(C) 중대 화생방실로 돌아왔을 때, 저와 로버트 트래비스를 포함한 병사 절반이 방독면 필터가 오렌지색 실전용에서 하얀색 훈련용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방독면 필터가 교체된 세 명의 병사들은 아침 점호에서 열외되어, 기지 내 의무실에 보고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 때 우리는 종합적인 흉부 X 레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검사를 받는 이유를 물었으나 답변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이후 수개월간 반복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들 중 일부는 피부 발진, 심한 기침 등의 문제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늦가을 경에는, 참호의 대략 4분의 3이 꽉 차서 폐쇄되고, 한쪽 끝의 참호만 열려서 온갖 물자들이 옮겨와서 묻혔습니다. 1979년 초 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참호는 눈과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 물 속에는 노란색, 갈색 거품이 있었고, 참호 주변의 산등성이 아래의 야채들이 모두 죽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죽은 토끼, 새, 다른 동물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을 중대장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저에게 그 참호를 폐쇄하라고 지시했고, 저는 모래로 그 참호를 덮고 평탄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저는 한국을 떠났습니다.

저의 건강 상태

다음 부대로 가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저는 계속해서 피부 발진과 기침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그런데 1979년 12월 명예 제대할 때, 저는 제 의료기록이 봉인되어 이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제 의료기록을 찾았지만, 캠프 캐럴에서의 제 치료기록은 없어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현재 55세입니다. 제 건강은 한국에서 돌아간 이래 악화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진성당뇨 2형, 말초신경장애, 녹내장, 피부발진,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온갖 병을 앓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당뇨 증상 치료를 위해 7일간 24시간 인슐린을 맞아야 합니다. 저는 제가 앓고 있는 병이 한국에서 고엽제에 노출된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 보훈처에 장애 수당을 2006년에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보훈처는 제 병이 한국에서의 고엽제 노출 때문이라는 점을 믿지 않고 2008년 10월 제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보훈처는 여전히 1968년에서 1971년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한 미군 병사들만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국방성은 지금까지, 적어도 1978년까지 주한미군이 고엽제를 저장해놓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보훈처는 또한 "국방성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 중대가 참호를 파고 고엽제 드럼통을 매립하는데 개입됐다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캠프 캐럴에서 같이 근무했던 몇 명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당시 제 전임 중대장을 포함한 이들 모두는 제 주장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 케이스를 보훈처와 행정소송을 하고 있고, 2010년 12월 새로운 결정을 받았습니다. 보훈처는 여전히 고엽제 피해에 따른 장애수당을 거부했지만,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관련해 부분적인 수당 제공을 승인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결정에 만족할 수 없으며, 보훈처에 다시 행정소송을 청구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제 케이스에 대한 완전한 정의가 이뤄질 때까지 행정소송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또한 저는 당시 캠프 캐럴에서 작업했던 한국민들과 기지 주변의 주민 분들, 그리고 1971년 이후 한국에서 근무했던 다른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제 케이스를 계속해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찾아

저는 미군 측이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조사단을 꾸려 제 증언을 조사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 조사가 진행되는 속도가 매우 느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는 캠프 캐럴의 고엽제 매립과 관련한 진실 규명을 위한 신속한 조사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제가 드럼통들을 묻었던 지역과 지점을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캠프의 상당 부분이 제가 일했던 시기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저는 매립 위치에 대한 의혹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또한 미군 당국이 지금 "1979~1980년 기간에 D 구역에 묻혔던 드럼통이 재반출되어 제거되고 캠프 밖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와 관련된 군 문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두 달이 넘도록 찾았음에도 문서들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미 공동조사단에 가진 또 다른 의문은, "추정되는 맹독성 화학물질을 파낸 곳이 D구역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점입니다. 재반출이 캠프 내 다른 매립지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전임 한국인 직원이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 초 두 개의 구덩이를 팠고, 다양한 독극물들을 매립했다고 증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고엽제가 비무장지대에 사용된 것을 알게 된 뒤 제 이야기를 미국의 공공 기관에도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2000년, 저는 제 이야기를 당시 제 지역 하원의원이었던 레인 에반스 의원에게 했고, 2009년에는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 의원에게도 했습니다. 저는 에반스 의원이 2000년 국방성에 편지를 보내 1969년부터 한국에서의 제초제의 저장과 관련해 질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답변이 왔는 지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이건, 미군은 계속 한국의 고엽제 매립 및 저장과 관련한 군 문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저는 집에 돌아가 미 의회에 이 문제와 관련한 독립적 조사를 요구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한국민들을 사랑하며, 맹독성 화학물질을 무단 매립한 데 대해 언제나 후회해왔습니다. 한국민들의 이해를 보호하기 보다, 우리 미군들은 한국민들과 그 땅에 끔찍한 해악을 끼쳤습니다. 이러려고 제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주어진 임무였지만, 이 문제에 제가 관련돼 있는 데 대해 한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해 줄 것을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2011년 7월 스티브 하우스


태그:#스티브 하우스, #고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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