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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에 인물과사상사를 통해서 <문명패러독스>란 책을 낸 이후 네 번째 책이다. 시골 촌놈으로, 참 출세 아닌 출세를 했다. 작가 수업을 받지도, 국문학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던 나로서 말이다.

가난한 가정, 일찍 여읜 부모님은 콤플렉스였다

송상호 저, 도서출판 삼인, 정가 14,000
▲ 저서 송상호 저, 도서출판 삼인, 정가 14,000
ⓒ 도서출판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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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분이 아니신 나의 부모님들이 하늘에서 정말 기뻐하실 듯하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집이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 때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 하셨던 분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분 다 옛 시절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오셨던 분들이다.

어머니는 내가 목사가 된 것조차도 못 보시고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셨다. 그토록 원하셨던 일인데 말이다. 1991년 8월 23일, 태풍으로 인해 살던 집이 무너졌다.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하시고, 낮에 주무시다가 산사태에 깔려 돌아가셨다. 47세의 나이셨다.

집이 무너지는 걸 보고도 당신의 아내를 건져내지 못한 죄책감에 나의 아버지는 평생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렇게 홀로 되신 아버지도 2005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64세의 나이셨다.

나의 아버지는 다행히도 내가 목사가 된 것을 지켜보셨다. 장남인 내가 목사가 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기에 아버지만이라도 보여드려 고마울 따름이다. 저 세상에 가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다 말씀드려주실 테니 말이다.

다행히 1987년도에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해 신학교를 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가난해서 학교를 자퇴한 학생, 조그만 지방 신학교 출신 등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적잖은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런 콤플렉스에다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아픔까지. 이래저래 내가 한없이 약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머물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가 항상 "상호야, 너의 태몽은 호랑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거 였는기라. 니는 마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사람인기라. 하모"라고 말씀해주셨기에 더 마음은 간절해졌다. 

콤플렉스 해결 못해 무작정 상경하다

1999년 12월 멀쩡하게 다니던 부산의 교회를 그만두고 무작정 경기도로 올라왔다. 경기도 광주였다. '교회개혁과 민족통일'이란 화두를 두고 상경했다하지만, 사실은 나의 콤플렉스를 내 속에서 해결할 수 없어서였다.

그 덕분에 나의 아내와 아이들이 무척이나 고생했다. 아무 대책 없이 상경했다. 나는 막노동, 고물장수, 학습지교사 등을 하며 그나마 가장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2001년도에 경기도 안성 일죽면에 자리를 잡았다. 장애인 시설의 원목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로 장애인 시설이 폐지되었다. 갈 곳이 없던 우리 가족은 빚을 내어 옆 마을로 이사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골 마을에서 2001년 8월 교회를 개척했다. 봉사센터란 이름을 걸고 봉사만 하러 주구장창 다녔다. 교회다운(?) 모습은 별로 없었다. 일주일에 예배 한 번 드리는 걸로 그나마 교회다웠다. 그러다가 거기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쫓겨났다. 땅주인이 대출을 제때 갚지 못해 법원 경매로 땅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겨 '더아모의집'이라고 하는 집을 지었다. 건축 초보자인 나와 동생이 14개월을 걸려서 지은 집이다. 청소년 쉼터, 봉사센터, 교회 예배당, 우리 집 등의 다용도 목적으로 지은 집이었다.

그나마도 18개월을 살고, 땅주인의 변심으로 인해 쫓겨나야 했다. 2006년 1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골 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지은 집을 내 손으로 허물고 나왔다. '이제는 아무 일도 안 하리라. 무얼 하면 내가 성을 간다 갈아'란 마음이었다. 속세를 떠나고 싶었고, 한 시라도 안성에 머물기 싫었다.

하지만, 아내의 눈물의 만류에 안성에 남았다.

"당신이 좋은 일하다가 그랬는데,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그래도 여기서 다시 시작 해봐요."

그날 흘린 아내의 눈물이 나를 안성에 머물게 했다. 나의 마음은 한시라도 안성을 뜨고 싶었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내가 너무나 고맙다. 그때 나를 눈물로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문제를 회피한 사람으로 남았을 게다. 아내 덕분에 안성에서 다시 일어서서 책을 4권이나 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콤플렉스의 사나이였지만, 동시에 행복한 사나이였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 때문이었다.
▲ 송상호 나는 콤플렉스의 사나이였지만, 동시에 행복한 사나이였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 때문이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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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니 콤플렉스는 나의 에너지였다

이렇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보의 시작 지점이 나의 콤플렉스였다. 이런 나의 돌아봄이 이번에 낸 <예수의 콤플렉스>란 책이었다. 나도 사람이고, 예수도 사람이기에 그도 분명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라는 착안이었다.

한국기독교적 정서로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의 경험 탓이리라. 어렸을 적부터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내가 이렇게 생각이 바뀐 것은 경계 없는 독서와 나의 무모한(?) 인생 도전의 결과였으리라.

어쨌든 내가 쓴 책을 통해 사람들이 두 가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예수가 거룩하기만 한 신적존재나 차원이 다른 성자가 아닌 '콤플렉스를 가진, 나와 비슷한 친구'로 와 닿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의 콤플렉스와 화해해서 자기 인생길을 완성했듯이,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암튼 내가 책을 쓰는 작가가 될 줄 꿈에도 몰랐던, 저 세상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시는 부모님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리고 오늘 이 책을 가능하게 한 고맙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에게도. 나는 비록 콤플렉스가 심한 인간이었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그들 덕분에 나는 정말 행복한 사나이다.


태그:#예수의 콤플렉스, #송상호, #더아모의집, #예수, #도서출판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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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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