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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군이 1978년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미군기지(캠프 캐럴) 주변 땅에 다량의 고엽제를 묻었다는 보도는 매우 충격적이다. 관련보도들을 접하면서 갑자기 우리나라에 고엽제가 대량 살포된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전에는 대표적 보수단체인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와 관련된 보도를 통해서만 고엽제라는 단어를 피상적으로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미군 고엽제 매립사건은 실체적 느낌과 함께 큰 공포감마저 안겨준다.

나는 고엽제라는 단어를 몸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를 체험한 사람이고, '고엽제후유증'으로 판정 받은 신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에 참여하면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다가 죽어간 이들, 오늘도 고통을 겪는 전우들의 참상을 보고 듣고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주한 미군의 고엽제 매립 보도를 접하는 오늘 누구보다도 큰 충격과 공포를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했던 나, 베트남 참전 후 고엽제후유증 판정 받다  

고엽제 살포로 초토화시킨 야산에서 생활했다. 땅을 파고 벙커를 짓고 자고 먹으며 맨몸에 방탄조끼만을 걸치고 사역을 하기도 했으니, 이때 고엽제 잔류성분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베트남 전쟁 작전지에서 고엽제 살포로 초토화시킨 야산에서 생활했다. 땅을 파고 벙커를 짓고 자고 먹으며 맨몸에 방탄조끼만을 걸치고 사역을 하기도 했으니, 이때 고엽제 잔류성분에 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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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 시절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팔방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중고교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뛰었고, 군대 시절에는 논산훈련소 대표 격구선수였으며, 베트남 전장에서도 백마사단 28연대(도깨비부대) 배구선수였다. 건강에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고, 평생 동안 건강하게 살 줄 알았다. 

40대 시절 처음 당뇨와 고혈압 진단을 받았을 때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먼저 내게 유전 요인이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부모는 물론이고 친척들 중에 당뇨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가 쪽에도 당뇨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나중에 사촌형님들 중 한 분이 당뇨를 갖게 되었는데, 이태 전에 별세하신 그분은 평생 동안 낚시가게를 운영하면서 거의 매일 납봉을 만진 분이었다. 그분의 당뇨는 납봉에서 왔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내게 유전 요인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나는 더욱 당혹감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엽제 후유증 같은 건 듣지도 못했고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가 1999년에야 고엽제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때도 고엽제 영향이리라는 생각은 못 했고(스스로 애써 부정하면서) 정밀진단 받는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2003년에야 대전보훈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고 고엽제후유증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국가유공자 7급으로 등재되었고,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신장치료를 받는 상황이 되어 2009년 3월 국가유공자 등급이 6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처음 고엽제 후유증 진단을 받았을 때는 내가 정말 베트남 전장에서 고엽제에 노출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괜히 '양심문제'를 결부시켜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할 때 발견된 여러 장의 베트남 전장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고엽제에 노출된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고엽제 집중 살포로 초토화시킨 야산에 설치한 이동기지(대대 지휘본부)에서 생활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그곳에서 땅을 파고 벙커를 짓고 자고 먹으며 맨몸에 방탄조끼만을 걸치고 사역을 하기도 했으니, 고엽제 잔류성분에 노출되었으리라는 확신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베트남에 살포된 고엽제의 80% 한국군 작전지역

한마디로 비극이요, 참상이다. 설명을 달기가 어렵다.
▲ 고엽제 후유증 한마디로 비극이요, 참상이다. 설명을 달기가 어렵다.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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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고엽제 직접 살포에 노출된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나처럼 고엽제 잔류성분에 노출된 이들이 더 많을 테지만, 직접 살포에 노출된 이들도 적지 않다.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고엽제를 보고 쫓아가면서 모기약 삼아 일부러 몸에 맞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고엽제 포대를 뜯어 맨손으로 살포하는 일을 담당한 이들도 있고, 나뭇잎에 허옇게 묻은 고엽제 가루를 손에 묻혀 모기약 바르듯이 팔과 다리에 바른 이들도 있다고 한다. 또 공수기지에 있던 병사들은 부대 주변 제초작업을 할 때 철모에 고엽제를 담아 들고 다니며 맨손으로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고엽제를 사용하던 초기에는 고엽제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고엽제는 이름 그대로 나뭇잎의 성장을 억제하여 고사시키는 화학물질이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기간 중 베트콩이 은둔하거나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하는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또 베트콩들이 경작하는 농작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1960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에 해당되는 60만 에이커의 광범위한 지역에 2000만 G/A의 고엽제(AGENT-ORANGE)를 살포했다.

그중 80%에 해당하는 1600만 G/A의 고엽제를 한국군 작전지역에 무차별 살포하였다고 한다. 이 고엽제라는 약품 속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인 다이옥신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엽제를 만드는 화학적 과정에서 불순물로 생성된 것이지 의도적으로 첨가된 독극물이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고엽제에 관한 정보에 너무도 어두웠던 탓에(그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고) 고엽제가 살포된 작전지에서 정글을 기던 병사들 중에는 목이 마를 때 계곡에 흐르는 물을 그대로 수통에 담아서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이 고엽제에 함유된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성분을 파악하게 되어 고엽제 사용을 금지시킨 때는 1971년이다. 나는 고엽제 사용이 금지되기 1년 전인 1970년 9월에 베트남 전장을 밟았으니 고엽제 잔류성분에나 노출되었지만, 고엽제가 한창 사용될 때 참전을 한 이들은 거의 고엽제 직접 노출에 직면해 있었던 셈이다.    
 
고엽제 후유증,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 고엽제 후유증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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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의 발암물질인 다이옥신 성분이 인체에 흡수되면 5~10년 후에는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 등 후유증이 발생한다. 한국 정부는 2002년 고엽제 환자 결정기준을 다음과 같이 변경 결정했다.

1. 비호지킨 임파선 암            2. 만발성 피부포피린증           3. 연조직 육종암
4. 염소성 여드름                   5. 말초신경병                        6. 호지킨 임파선 암
7. 폐암                                8. 후두암                              9. 기관지암
10. 다발성 골수증                11. 버거씨병                          12. 전립선암
13. 당뇨병                          14. 만성림프성백혈병              15. 만성골수성백혈병
 또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결정기준도 함께 변경 결정했다. '후유의증'이란 후유증으로 의심할 수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 일광과민성 피부염          2. 다발성 신경마비            3. 근위축성 신경축색 경화증
4. 중추신경장애                 5. 다발성경화증                6. 근질환
7. 악성종양                       8. 간질환(B,C 간염 제외)    9. 갑상선 기능저하증
10. 고혈압                        11. 뇌졸중                       12. 호혈성 심혈질환
13. 동맥경화증                  14. 고지혈증                    15. 심상성 건선피부
16. 지루성 피부염              17. 만성 담마진                18. 뇌경색증
19. 건성 습진                    20. 무혈괴사증

또 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의 결정 기준은 2000년에 개정 결정했다.

1. 척추이분증(脊椎二分症). 다만 은폐성 척추이분증은 제외한다.
2. 말초신경병(末梢神經病)
3. 하지마비척추(下肢痲痺脊椎) 병변

베트남 전쟁은 1973년에 끝났다. 한국군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온 장병들 가운데서 1970년대 중반부터 고엽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 고엽제 후유증이 사회문제화 되었다.

미국에서는 고엽제 후유증이 좀 더 일찍 사회문제화 되었다. 원인 모를 질병이 고엽제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되면서 다수의 환자들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사회문제화 되자 의회에서 청문회까지 열었다.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오랜드 육군 대장을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시키는 등 한때 미국의 정계는 고엽제 문제로 시끄러웠다.

미국 정부와 제조회사는 자국 내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에 대한 배상을 실행하면서 호주와 한국 등 베트남전 참전국들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도 모종의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잘 보이기 위해 우리나라에는 고엽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위장했다.

1984년 <중앙일보>가 고엽제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을 때 전두환 정권은 <중앙일보>에 압력을 가해 해당 기자를 해고시키고, 다른 언론사들에는 고엽제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뿐만 아니라 파월 장병 전체에 두루 알려지게 되었다(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는 이런 사실을 홈페이지에 공개해놓고 있다).

그래서 다수 파월장병들은 전두환을 혐오한다. 1970년 베트남에서 백마 제29연대(박쥐부대) 연대장을 한 전두환이 전우들을 배신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렇게 전두환의 배신에 분노하면서도 오늘날 고엽제전우회가 전두환의 후신들을 적극 지지하며 보수적 성향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엽제 장병들의 처우를 가장 실질적으로 개선한 것은 김대중 정부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독재정권의 보도통제와 억압으로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실상이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구호의 손길도 마련되지 않았다. 1980년대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이 겪은 고통과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40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왜 죽어 가는지도 몰랐다. 병원에서도 알지 못했다. 살아보려는 본능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이들, 난치병임을 뒤늦게 알고 가족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많은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과 관련하여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 '국제매독'에 걸렸다는 말도 돌았다. 그 병들에 대해 '베트남 풍토병'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도덕성을 비난하고 매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고엽제 전우회여 분노하라, 한국정부도 정신 차려라

고엽제전우회 회원들 중에는 베트남 전장이 아닌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 고엽제에 노출된 이들도 있다. 또 후유의증 판정을 받은 회원들 중에는 앞으로 후유증 판정을 받을 사람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남 태안지회의 경우, 이미 여러 명이 갖가지 병고를 치르다가 사망하여 부인들이 대신 회원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전국 각 지회장들은 고엽제후유증으로 신음하는 전우들을 한 명이라도 더 찾아내고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고엽제전우회를 좀 더 일찍 만들지 못해 많은 전우들을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한 사실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죄의식마저 갖는다. 

고엽제전우회는 항구적으로 명맥을 이어 나갈 그런 단체가 아니다. 후진이 보충되지 않는 단체이니 당연히 한시적인 단체이고, 언젠가는 자연 소멸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애처롭기도 하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30여 년 전 한국 땅에 다량의 고엽제를 매립한 사실을 접하는 회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다음번 모임에 나가면 대체적인 반응들을 접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지 정말 궁금하다.

그들은 파월 전우들의 권익을 외면한 전두환의 태도에는 분노할 줄 알면서도, 피해 보상에 냉담하기만 한 미국정부와 제조회사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모른다. 국내의 정치문제와 관련하여 이념을 앞세우며 가스통을 들고 나오기는 했어도, 미국에 대해 고엽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고엽제전우회의 전국적인 행사에 가서 보면 꼭 등장하는 것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넘겨받는 것을 한사코 반대한다는 서명운동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자존심 없는 태도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미국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는 길은 요원하지 않을까 싶다.

고엽제의 상흔을 안고 사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가 30여 년 전 한국 땅에 다량의 고엽제를 몰래 매립한 주한 미군을 규탄하면서 미국 정부에 책임을 묻는 일에도 앞장서주길 바란다. 그것만이 고엽제전우회의 존재가치와 위상을 제대로 키우고 정립하는 길이다.

또, 한국정부도 미군의 고엽제 매립에 대한 진상조사는 물론, 책임을 정확히 따져주길 바란다. 이참에 한국 땅에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도 한 단계 높아지길 기대한다.


태그:#고엽제 , #베트남전쟁,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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