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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녁 밥상에 비름나물 무침이 올라왔더군요. 이맘 때쯤이면 아내는 더러 이를 밥상에 올리곤 했는데, 시골 출신인 우리 부부에겐 낯설지 않습니다. 밥에 비름나물을 몇 점 얹어서 먹으며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박정희 대통령이 이 비름나물을 좋아했었다누만."
"그래요? 그런 양반들이 이런 나물도 해 먹었을까요?"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서 비름나물로 배를 채웠대요!"
"그래요?"

박정희 전 대통령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몰락한 양반 출신인 그의 부친은 좌절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호구지책으로 처가(수원 백씨)의 선산을 소작하며 식구들 입에 풀칠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안 식구들이 입고 먹는 게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은 봄철이면 그의 모친은 들에 나가 비름나물을 꺾어다 보리가 절반 이상 섞인 밥에 함께 버무려 밥상에 내놓곤 했었습니다.

며칠 전 우리집 저녁상에 오른 비름나물 반찬. 어린시절 박정희 대통령도 이 비름나물로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며칠 전 우리집 저녁상에 오른 비름나물 반찬. 어린시절 박정희 대통령도 이 비름나물로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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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박정희 부부와 친분이 있던 재미언론인 문명자씨(작고)는 1960년대 후반 육영수 여사로부터 청와대 저녁식사에 초대됐습니다.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았는데, 마침 비름나물이 반찬으로 나왔길래 문 여사가 놀라워하며 한 마디 했습니다. "아니, 비름나물도 해 먹어요?" 그러자 육 여사가 말을 받았습니다. "저 양반이 어릴 때 즐겨 먹었다며 해달라고 해서 더러 해 먹습니다."

엊그제가 5·16 군사쿠데타 50주년이었습니다. 이를 맞아 국내 언론에서는 다양한 보도를 하였더군요. 어떤 매체에서는 5·16을 평가하는 기획기사를, 또 어떤 매체에서는 이른바 '5·16 주체'들의 인터뷰를 싣기도 하였고 관련 칼럼들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그의 딸인 박근혜 씨가 2012년 대선에서 여권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 '5·16 50주년'에 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 커보였습니다.  

포털에서 5·16 50주년 관련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아니 목에 콱 걸리는 듯한, 칼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16일자 <중앙일보>에 김진 논설위원 겸 정치전문기자가 쓴 '나를 바꾼 박정희'가 그것입니다. 사적으로는 전 직장 동료이기도 한 그는 지난 1990년대 초반 <중앙일보>에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기획물을 연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탄탄한 취재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그 당시 적잖은 반향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김진 논설위원의 칼럼
 1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김진 논설위원의 칼럼
ⓒ 중앙일보 인터넷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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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이 참여한 '청와대 비서실' 연재는 3공 당시 박정희의 치적과 주요 정치사건을 주로 다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즉, 3공 시절 박정희 밑에서 요직을 맡았던 고관대작들을 만나 옛 얘기를 듣고 이를 재구성해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재조명하는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 김 위원은 그런 내용들을 회고하면서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과 찬사를 늘어놓았습니다.

김 위원이 그렇게 보고 느꼈다면 이를 탓할 순 없습니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째,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에 대해 '외눈박이' 평가는 물론 심지어 궤변조차 늘어놓고 있다는 점, 둘째, '기자' 신분인 그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도 되는 것이냐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김 위원이 쓴 칼럼의 극단적 편향성과 또 그의 기자 신분을 망각한 몰상식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박정희에 대해 '외눈박이 평가' 김진 위원... 극단적 편향성과 몰상식

우선 김 위원은 '청와대 비서실'(1)을 쓰면서 "1년 2개월 동안 장관·의원·비서관·군인을 지낸 박정희 부하들을 많이 만났다"면서 그 대상으로 "남은 인생을 박정희를 기록하는 데 쏟아 넣었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 1980년 신군부에 보복을 당해 세상을 등졌던 중화학·방위산업의 설계자 오원철, 처음 만든 벌컨포의 사격실험에서 유탄에 가슴이 뚫린 이석표, 대통령의 해진 혁대를 회고하며 눈물짓던 이발사…" 등을 거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박정희의 애국심과 인격을 증언했다. 주군(主君)이 피살된 지 10여 년이 지났으므로 그들에겐 비판의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자(瑕疵)에 관한 증언은 거의 없었다. 대신 청렴과 애국의 추억만 가득했다. 청와대 집무실의 파리채, 변기물통 속의 벽돌, 칼국수 점심…. 그리고 민족중흥·조국근대화·수출입국·새마을운동 같은 전설적 단어들뿐이었다.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은 기자인 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김 위원이 '박정희'와 또 그의 '대통령 시절'을 잘 알고 있다면 필자 또한 어느 정도는 박정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와대 비서실' 연재가 끝난 지 6년 뒤 <중앙일보>에서는 '실록 박정희 시대'라는 제2탄을 다시 연재한 적이 있는데, 필자는 그 때 연재팀의 일원으로 참가해 박정희 전반부 삶의 취재를 맡았었습니다. 평소 친일문제를 연구하면서 그의 군인시절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그 연재를 계기로 그의 삶을 탐구할 기회를 가졌는데요, 필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찬사 일변도만이 아닌 비판적 평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절에 쓴 휘호
 대통령 재임시절에 쓴 휘호

이번 칼럼에서 김 위원은 박정희의 애국심과 인격, 그리고 청렴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박정희에게 분명 그런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18년 동안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자를 지낸 그에게 '애국심과 인격'이 전혀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또 '청와대 집무실의 파리채, 변기물통 속의 벽돌, 칼국수 점심' 등도 사실로 믿고 싶으며, 그가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만도 합니다. 아울러 '민족중흥·조국근대화·수출입국·새마을운동' 등은 그가 집권시절에 내걸었던 기치이며, 또 성과를 거둔 점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그의 시대는 과연 이것 뿐이었을까요? 즉, 그의 모든 부하들이 그를 만고의 지도자로만 추앙하였고, 또 그는 18년 집권 기간 동안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었을까요? 또 그가 이룬 경제성장의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는 없었을까요? 그런데 김 위원은 칼럼에서 박정희를 티끌 한 점 없는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군요. 역사적 공과(功過)가 뚜렷하다고 다중이 공감하고 있는 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을 이런 식으로 기록, 평가하는 것은 흔히 하는 말로 박정희를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그의 추종자(혹은 신봉자)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앙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일단의 사람들은 그를 '철저한 배신자'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를 들겠습니다. 첫째, 1948년 이른바 '여순사건' 직후 그가 군부 내 거물 좌익분자로 지목돼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자술서를 쫙 써내려갔는데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군 내부의 '좌익 동지'들의 명단을 전부 털어 놓았습니다. 이를 토대로 군 수사당국은 좌익세력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이 공로로 그는 군사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는 만군인맥 등 이른바 '혁명동지'들을 반혁명사건으로 몰아 내쳤다. 사진은 이를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1963.3.11)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는 만군인맥 등 이른바 '혁명동지'들을 반혁명사건으로 몰아 내쳤다. 사진은 이를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1963.3.11)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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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혁명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그것입니다. 5·16 쿠데타 주체세력 가운데는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집단들이 포함돼 있는데, 그가 육사에서 가르친 5기생(김재춘 등)과 육본 정보국에서 인연을 맺은 8기생(김종필 등) 등 육사인맥, 광주포병학교 인맥, 9사단 인맥, 만군(滿軍)인맥 등입니다. 만군인맥은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로 김동하, 박임항, 김윤근 등이 그들인데, 김윤근은 5·16 당시 해병여단장으로 병력을 동원한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후 이들 대부분은 박정희에 의해 '반(反)혁명사건'으로 몰려 비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박정희의 '청렴성'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10·26 후 그의 침실 변기물통에 벽돌이 한 장 들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청와대 시절 그의 일상생활은 검소했던 것 같습니다.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일국의 대통령이 해진 혁대를 차고 다녔다면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 대통령 시절 그가 막걸리를 즐겨 마셨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그의 서민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실지로 그는 막걸리를 좋아했고, 또 성장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민적인 면모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궁정동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술은 막걸리가 아닌 '시바스 리갈'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청렴성'을 본격적으로 거론하자면 그건 그의 '재산' 얘기일 텐데요, 극단적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스위스은행 비밀구좌' 건은 제대로 확인이 안 된 만큼 더 이상 거론치 않겠습니다. 다만  대구 영남대와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등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 언제, 어떻게 해서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만, 과거 혹은 현재도 그의 자녀들이 이들 기관에서 이런저런 감투를 맡아 사실상의 소유자 행세를 해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관들은 그의 두 딸인 박근혜, 박근영이 스스로 번 돈으로 세운 것이 아닐 뿐더러 그 재산규모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막대한 희생있었던 '박정희 시대 성장'

두 딸과 어깨동무를 한 박정희.왼쪽은 박근혜, 오른쪽은 박근영
 두 딸과 어깨동무를 한 박정희.왼쪽은 박근혜, 오른쪽은 박근영

다음은 그의 재임기간에 가장 빛나는 성과로 평가돼온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집권기간 내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하였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며, 또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세계를 무대로 경제역량을 키운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이를 토대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는 그와 그의 부하들의 애국심과 헌신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성장은 그 이면의 '그림자'가 너무도 짙습니다. 이미 나온 주장들은 제쳐두고 같은 날짜 <경향신문>에 실린 유종일 KDI정책대학원 교수의 글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유 교수는 우선 그 시절 한국만 예외적으로 경제성장을 한 것이 아니라며 대만, 홍콘, 싱가포르 등 소위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유사한 성장을 이룩한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같은 현상은 한국을 포함해 이들 나라에 공통적으로 작용한 역사적 및 환경적 요인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면서, 한 개인의 빼어난 지도력에 의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만 박정희를 내세워 그를 영웅시 하는 것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군요.

유 교수는 특히 박정희 시대의 성장은 값비싼 희생의 대가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소위 '선성장, 후분배'를 내세우며 대다수 국민의 소비력을 억제하고 자본축적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이룩한 성장이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막대한 희생이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사회 최대의 문제로 대두한 양극화의 연원도 따지고 보면 박정희 시대의 '선성장, 후분배' 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분배뿐만 아니라 안정이나 효율과 같은 다른 중요한 가치들도 희생되었다고 유 교수는 덧붙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 막걸리를 즐겼고, 또 성장환경 탓인지 서민적 풍모도 갖추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 막걸리를 즐겼고, 또 성장환경 탓인지 서민적 풍모도 갖추고 있었다.
이밖에도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로는 그 시대에 행해졌던 각종 정치사건을 비롯해 장기집권 음모, 인권 및 언론탄압, 숱한 간첩조작사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들어 흔히 그를 '독재자'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이 글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 위원이 자신의 칼럼에서 수차례에 걸쳐 '개발독재' '애국독재'를 운운하고 있어서 이 문제를 한 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김 위원의 칼럼 가운데 문제의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공동체 발전'은 안보와 가난 극복, 그리고 경제발전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 민주주의라는 건 경제개발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 북한의 적화(赤化) 위협 속에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선 국력의 비상한 결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청렴했으며 그의 독재는 공동체를 위한 개발독재였고 나라를 지킨 애국독재였다."

1960~1970년대 당시 안보와 가난 극복, 경제발전이 시대적 과제였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경제성장, 즉 '개발'을 위해 '독재'가 필수요소는 절대 아니며, '국력의 비상한 결집'의 수단이 독재만도 아닙니다. 민주적 리더십으로 해결한 사례도 많습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이 독재자였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구요, 최근 브라질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궈낸 룰라 전 대통령은 독재자는커녕 민주투사 출신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독재를 옹호하려고 '개발독재'를 지어내더니 김 위원은 이제 '애국독재'라는 궤변까지 쏟아내고 있군요. '애국'으로 둘러대면 모든 게 다 양해되나요? 이러다가 '애국살인' '애국폭력' '애국성추행'이 등장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 왼쪽부터 이한림 건설부장관, 박 대통령, 육영수 여사,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 왼쪽부터 이한림 건설부장관, 박 대통령, 육영수 여사,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

제가 보기엔 박정희 독재는 경제성장을 앞세운 '개발독재'의 면모도 없지 않지만 오히려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독재'가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재임시절 세워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은 설사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후임자가 쉽게 무시할 수 없는(혹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걸 자신이 열매까지 따야겠다고 한 것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독단과 아집으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개발독재'는 설득력이 약해 보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볼 때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 미명하에 장기집권을 획책한 '정치독재'가 '본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김 위원식이라면 세상에 '이유없는' 독재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김진 위원 '박정희 피해자'들의 얘기는 들어본 적 있나?

이상으로 박정희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김 위원의 '외눈박이' 평가 등에 대한 비판은 마치기로 하고 다음은 '기자'로서의 김 위원의 글쓰기에 대해 간단히 지적해볼까 합니다.

'기자(記者)'는 '기록자(記錄者)'의 준말이라고 봅니다. 기자의 본분은 보고 느낀 것을 사실대로 기록·논평(평가)하는 것입니다. 흔히 문제가 된 언론보도의 상당수는 바로 이 점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써도 결과적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체를 보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김 위원이 박정희 시대의 '장관·의원·비서관·군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사실대로 썼다고 해서 그걸로 박정희 시대를 오류없이 재구성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이들과 같은 '박정희 수혜자'만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반대편, 즉 '박정희 피해자'들이 숫적으로 훨씬 많았을 텐데, 김 위원은 이들을 만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 위원에게 묻겠습니다. 김 위원은 박정희 시대에 자행된 각종 고문피해자나 그 유가족들을 취재목적으로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각종 조작간첩사건에 연루된 피해자나 그 유가족을 만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사법살인'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씨,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 박정희 세력에게 '부일장학회'를 빼앗기다시피 한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의 가족들, 또 박정희 시절 신문사에서 쫓겨난 동아투위 선배 언론인들, 이들은 전화 한 통화면 소재가 파악되고 연락이 닿을 수 있는 분들입니다. 김 위원은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피해자랄 수 있는 이 분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혹 만나보았다면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듣고 기사화한 적이 있습니까?

'청와대 비서실' 연재에서 등장한 인물들을 보면 김 위원은 박정희 밑에서 수족노릇을 하면서 권력의 단꿀을 빤 하수인 몇 십명을 만난 것이 전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얘기가 마치 박정희 시대의 전부인양 주절대고 있으니 '정치전문기자'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박정희의 삶은 대통령 시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도 순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냈으며, 또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갈등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면모를 언급할라치면 적어도 고향친구 몇 명, 대구사범이나 군관학교 동기생 몇 명, '혁명동지' 몇 명 정도는 만나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들은 '수혜자'만은 아니기에 박정희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김 위원은 칼럼에서 '수족노릇'을 한 부하들의 증언에 대해 이렇게 썼더군요.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은 기자인 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취재했다. 그중 어떤 대통령도 박정희처럼 부하들로부터 일치되고 단결된 칭송을 듣지 못했다. 이들의 부하들은 주군의 공적과 함께 잘못과 결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주군들이 살아있음에도 그러했다. 이것만 봐도 후임자들은 박정희보다 훨씬 불완전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가능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 "양 김씨는 민주주의도 함께 해냈을 것"이란 말은 더욱 믿지 못한다. 이런 얘기야말로 소설이다."

요즘 유행하는 개콘식으로 표현하자면, 대~단한 발견을 하셨군요. 위 인용문의 바로 앞에서는 "주군(主君)이 피살된 지 10여 년이 지났으므로 그들에겐 비판의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자(瑕疵)에 관한 증언은 거의 없었다"고 썼더군요. 단적인 예로 박정희 밑에서 '9년 3개월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가 박정희를 정면으로 과연 비판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 부하는 박정희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전두환에게도 그런 부하는 넘치고 넘칩니다. 장세동 등등. 한결같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니까 '한결같은 증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마치 박정희의 진면목인양 써대고 있으니 김 위원이 '외눈박이'가 됐나 보군요.

<중앙일보>, 김진 위원 같은 사람에게 더 이상 붓 쥐어줘선 안 돼

박정희 소장
 박정희 소장
이제 서서히 이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흔히 언론과 권력과의 관계(혹은 자리매김)를 두고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라고 합니다. 취재원과 너무 가까워서도 안되지만 반대로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너무 멀면 깊이 있는 취재가 어렵고,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취재원에 매몰될 가능성을 우려한 경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번 칼럼을 보면 김 위원은 박정희한테 완전히 매몰돼 마침내 그와는 '한 몸'이 된 것 같습니다. 김 위원은 "박정희가 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며 스스로 '박정희교(敎)의 신자'임을 커밍아웃 했더군요. 같은 매체에서 같은 박정희를 언급한 글인데도 그 다음날(17일) 박태욱 대기자가 쓴 글은 맛이 다르더군요(박정희 뛰어넘는 리더십 갈증). 결국 매체도 매체지만 필자가 문제라는 걸 재확인했습니다.
         
김 위원이 박정희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의 정치적 취향이자 개인의 자유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기자 신분으로, 언론매체에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중앙일보>가 적어도 공기(公器)를 표방하는 언론매체라면 김 위원 같은 사람에게 더 이상 붓을 쥐어줘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김 위원에게 꼭 어울릴만한 일자리를 한두 군데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지 및 유업을 계승·발전시켜 민족중흥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중흥회의 대변인 자리를 소개합니다. 다음으로는 올 하반기에 개관 예정인 '박정희기념·도서관'의 홍보실장 자리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미력이나마 저도 힘을 보태 적극 추천하겠습니다.

김 위원의 건투를 빕니다.

* 이 글에 대해 김진 위원이 반론을 펴길 기대하며, 글은 물론 공개토론도 적극 환영함을 밝혀둡니다.


태그:#박정희 , #김진 논설위원, #청와대 비서실, #박근혜 박근영 ,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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