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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한국계 어린이.
 볼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한국계 어린이.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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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살면서 새롭게 접하게 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땐 그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었던 이들은, 한국과 한국어를 소개하고 가르치는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자랑스러운 내 조국 대한민국과 한국 사회가 '직무 유기'라는 죄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이들은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났으나 한국 땅에서 자라지 못하고 해외로 보내진 입양아들이다.

처음 학생비자로 미국에 건너온 나는 랭귀지 스쿨 한 학기를 마치고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1년간 휴학을 했다. 그러고는 첫아이가 7개월쯤 되던 2001년 봄, 다시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집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를 찾았다. 거기서 처음 만난 사람은 입학 담당 디렉터였던 마이클 블록씨. 사람 좋게 생긴 블록씨의 책상 위에는 동양아이 둘의 사진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이들이라고 했다. 딸 사라는 서울에서, 아들 조나단은 부산에서 입양했다며. 나로서는 처음으로 알게 된 한국계 입양가족이었다.

그 후 두 번째 학기던가 내가 컴퓨터 관련 과목을 수강할 때였는데, 동양 여학생이 나 말고 하나 더 있었다. 아시안 인구가 1%도 안 되는 매사추세츠 주 시골 동네 칼리지에서 비슷한 외모의 학생을 만나자 무척 반가웠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한 뒤,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자기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내가 "언제 한국에서 왔느냐"로 시작해 말을 걸기 시작하자 그녀가 제지하듯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그때 그녀 나이가 갓 스무 살 언저리였는데, 그 마음속에 '태어난 곳'으로만 남은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그녀에게는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도 아픔이 되는 것이었을까?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정체성 찾기가 쉽다

4월의 마지막 날이던 30일 토요일 애틀랜타 근교 마리에타 시에 있는 베다니교회에서는 한국계 입양아를 키우는 미국인 가정들을 초청해 저녁만찬을 겸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입양아와 그 가족을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수년 전 잠시 스쳐 지나갔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라는 동안 이런 자리에 한 번이라도 가봤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한림대 허남순 교수와 뉴욕주립대(University at Albany, SUNY) 윌리엄 레이드 교수가 2000년에 한국계 입양아를 키우고 있는 가정 4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문화 체험 행사를 경험한 아이들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와 함께 자신들의 입양에 대해 대화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현저하게 적었다고 한다. 양부모가 출생국의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권장하고 아이들과 함께 이러한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입양아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취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게 요지였다.

한국 아이들의 미국 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고아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부터니까 어느새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초기의 양부모들은 '끝없는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듯하다. 미국에는 자녀를 외국에서 입양한 부모들이 주축이 돼 만든 입양아 지원 단체들과 여름 캠프들이 많이 있는데, 대개 설립된 지 10여 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까 1990년대 이후부터 이런 활동들이 본격화한 것이다. 

다인종 문화를 전공했다는 베다니교회의 최병호 목사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살던 때까지 포함하면 14년째 자신이 직무를 맡고 있는 교회에서 입양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고 했다. 베다니교회에서는 올해가 8년째 행사다. 이날 행사는 캠프보다 짧은 당일행사긴 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입양 관련 캠프와 비슷한 트렌드를 타고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교회의 한 신도는 참석자 인원에 대해 예년에 비해 조금 적은 스무 가정 정도가 참석했다고 전했다. 가정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한 가정당 적어도 둘, 많게는 서넛의 아이들과 또 어른들이 참석했고, 교회의 행사 봉사팀과 그 가족들까지 어림잡아 200명 가량이 저녁 한때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1부와 2부로 나눠서 진행된 행사에서 처음 시작은 함께 밥을 먹는 일이었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한국 음식을 먹는 동안 이웃 교회에서 원정 나온 청소년 사물놀이팀 공연을 관람하고, 곧이어 제니퍼 페로씨의 발표가 이어졌다. 태어난 지 4개월 반 만에 미국으로 입양돼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의 전형적인 백인 마을에서 자란 페로씨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살 곳으로 애틀랜타를 골랐다고 했다. 한인 인구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페로씨는 현재 한인 밀집 지역인 귀넷 카운티의 한 공립고등학교에서 교감을 맡고 있다.

30분 가량 진행된 발표에서 페로씨는 2007년에 '포인트 메이드'라는 필름 회사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일부분을 보여주며 자아를 찾아 헤맸던 자신의 36년 인생 여정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발표에 나선 이유는 "어린 입양아들이 앞으로 성장하면서 내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국 커뮤니티와 연결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미국 가정의 가족 구성원들에게 그 중요성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한인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한국 음식.
 뷔페식으로 마련된 한국 음식.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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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국 음식을 나누는 가족.
 함께 한국 음식을 나누는 가족.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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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얼굴들이 주는 위로

페로씨의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저녁을 다 마칠 즈음, 테이블을 치우고 자리정돈을 한 후 태권도 시범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자유스럽게 개별 대화가 오가고 2부 문화 체험 행사가 시작됐다. 붓글씨 쓰기 코너에서는 한글 자모를 보여주고 각자 이름을 한글로 써 보게 했고, 제기 차기,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 코너에서는 꼬마 친구들이 열을 올렸다.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곳에서는 어린 입양아의 얼굴에 태극기를 그려 넣기도 했다.

참석자 중에 어린아이들이 많아 어른들의 대화가 진지하게 이어지긴 힘들었지만 닮은 얼굴들 틈에서 뒤섞여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인 부모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들 삼형제를 둔 제니스와 마샬 포터씨 부부는 큰아들을 한국에서 입양했고, 밑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이 올해 일곱 살이다.

엘리자베스와 마크 스크리네크스키씨 부부는 열 살 난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둘째아들을 한국에서 입양했다. 올해 6월이면 만 세 살이 된다. 빅토리아 프랑콜라씨는 딸이 하나 있는데 둘째아들을 한국에서 입양했다. 지금 일곱 살이다.

붓글씨 쓰기 코너에서는 한글 자모를 보여주고 각자 이름을 한글로 써 보게 했다.
 붓글씨 쓰기 코너에서는 한글 자모를 보여주고 각자 이름을 한글로 써 보게 했다.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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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행사를 알게 됐느냐고 묻자 대부분 '컬처 캠프'를 통해서라고 대답했다. 마침 조지아 주에서 매년 열리는 컬처 캠프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조이스 킹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인 딸과 아들을 한국에서 입양한 킹씨는 올해 여름이면 11년째 컬처 캠프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생인 딸과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도 매년 캠프를 통해 성장기를 보냈고, 이제는 캠프의 리더들이 됐다. 이 캠프는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입양된 아동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프로그램이다. 

올여름 애틀랜타에서는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쉐라톤 다운타운 호텔에서 3일간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 입양가족 네트워크(Korean American Adoptee Adoptive Family Network, KAAN) 주최로 제13차 연례 컨퍼런스가 열린다. 대개의 여름 캠프가 입양아들의 문화 체험에 중점을 두는 것이라면, 칸(KAAN) 컨퍼런스는 입양아를 키우는 부모들에 대한 계몽과 정보 교류가 주요 목적이다. 가족 전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입양아들의 문화 체험 활동도 병행한다. 이날 주제 발표를 한 제니퍼 페로씨는 이 행사의 로컬 계획팀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열심히 팽이를 돌리는 꼬마친구.
 열심히 팽이를 돌리는 꼬마친구.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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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페인팅.
 페이스페인팅.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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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해외 입양 사후 지원책 절실

한인교회 차원의 단순한 만남의 자리부터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 어른들을 위한 컨퍼런스까지 다양한 행사들의 근본 목적은 자국을 떠나 타국에서 자라나는 입양아들에게 한국인으로서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데 있다. 그 고리를 계기로 앞으로 살아 있는 날 동안 계속될 이들의 정체성 찾기 노력이 조금은 수월해지기를 바라는 기성세대의 바람이 담긴 행사들이다.

제니퍼 페로.
 제니퍼 페로.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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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노력들을 지원하는 건 어떨까. 만찬이나 캠프, 컨퍼런스 등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주 열리는 한국학교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제니퍼 페로씨가 성인이 되어 한국에 갔을 때의 기억이 내게 너무나도 아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저는 제 핏줄에 담긴 문화적 유산을 배워 보기 위해 (23년 만에) 한국에 간 적이 있어요. 1997년 안동에 있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불행하게도 그 시간은 제게 너무도 힘든 기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IMF(위기)로 (한국) 경제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힘들었던 것은 저 자신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어요.

한국에 가기 전까지 저는 단 한 번도 한국 사람과 얘기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어로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한국 역사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 곳은 아주 전통적인 도시였고, 사람들은 제게 '한국 사람일 것'을 기대했어요. 그러나 저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어요. 결국 4개월 반 만에 저는 생애 두 번째로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입양아들이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와 역사를 배울 수 있다면 제니퍼 페로씨가 경험했던 '한국과 두 번째 이별' 같은 일은 상당부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우선 입양 가정의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국학교 등록을 권장하는 일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해외 입양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 땅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우리 영토 안에서 부모와 함께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이미 해외로 보내진 아이들을 위한 사후 지원책에도 좀 더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아이를 입양한 미국 가족.
 한국 아이를 입양한 미국 가족.
ⓒ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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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입양, #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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