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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분위기는 이상했습니다. 오빠는 눈물어린 눈으로 엄마 앞에 앉아 있었고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는 듯 차분한 듯 전에 보지 못한 엄한 얼굴인 것도 같았습니다.

"서현아 엄마 말 알아 들었지? 그 집에 가면 엄마랑 사는 것 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고 너 공부하는 것도 마음껏 할 수 있고... 구두도 안 닦아도 돼."
"나는 그래도 엄마랑 동생들이랑 살래요."
"서현아 엄마가 그렇게 말 했는데도 못 알아 듣겠니?"

누군가 "서현이는 공부도 잘 하고 하니 아들이 없는 부자집에 양자로 보내"라며 그 집을 소개해 줬다고 합니다.
엄마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우리집 사람들이 몰려 들어 엄마가 한탄에 젖어 쏟아내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내가 우리 학현이 태어나서 얼마 안된 핏덩어리를 남한테 보낼려고 했지요."
"에그...그래도 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워야 하는건데..."

주인집 아저씨네 아줌마가 엄마 말에 추임새를 넣습니다.

"우리집 양반이 재산을 다 말아먹고 죽고 나니 저 어린 것을 친척 집 머슴 방에서 낳고
이틀을 못 보내고 친정으로 갔지요."

친 외할머니는 엄마가 배화 여전을 다닐 때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새로 외할아버지한테 시집을 오신 엄마의 새엄마였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니 친정도 다 소용없습디다. 친정에서도 미역국 한 번을 제대로 못 얻어 먹고 며칠 안돼 언니네 집으로 갔지요."

하지만 이모네 집은 당시에 가난했기 때문에 엄마가 얹혀 살 형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모부가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친척집을 전전했습니다.

"누가 그러대요, 요정을 하는 마담이 얘 하나 데려다 키우고 싶어하니까 입 하나라도 덜고 일을 하라구요."

갓난쟁이 나를 데리고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몇 번의 고민을 거쳐서 결심을 한 후 나를 그 요정 마담에게 입양 딸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번에도 주인 집 아저씨네 아줌마가 물었습니다.

"데리러 오기로 한 날 얘가 태어난 날짜와 시까지 적어서 가슴 속에 넣어주고 마지막으로 젖이라도 실컷 먹여 보내자 싶어 젖을 먹이면서 울고 또 울고 한참을 울고 나니까 주위에 아무도 없더라구요."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껴안고 울기만 하는 엄마를 보고 요정마담과 마담이 데리고 온 사람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쯧쯧! 그래서 다행히 학현이는 입양을 못 보냈구먼, 그래 서현이는 보낼려구?"
"서현이는 다 컸으니까 그 집에 가서 자기만 잘 하면 잘 클거구..."

엄마의 말꼬리가 떨렸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고 엄마가 싸 준 책이며 새로 사 온 옷가지 등 오빠의 짐들이 챙겨져 있었습니다. 언니는 뭘 알고 있는지 엄마의 치마꼬리를 붙잡고 징징 거렸습니다.

"엄마 오빠 보내지마! 보내지마!"

며칠 전부터 오빠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집에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오빠한테 모두들 더 잘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웬만하면 말을 잘하지 않는 '발라 김 아저씨가 우리집 방문 앞으로 와서 엄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줌마 내가 꿈 속에서 쓴 시가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혼자서 생활을 하는 '발라 김' 아저씨는 좀처럼 말이 없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는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고시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도 하고 시인이 되고 싶어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미장 일은 열심히 하러 다녔습니다. '발라 김' 아저씨는 언제나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고 주머니 속에 다시 넣고 하는 행동을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만사가 속 시끄럽다는 표정이었지만 '발라 김'아저씨는 자기의 꿈 속 시를 엄마한테 읊어 주려고 할 때 어느새 주인집 아저씨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킁킁'대며 우리 방 앞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않았습니다. 우리집은 마루로 죽 연결되어 있어서 방문만 열면 모두 방문 앞에 앉아 말을 트고 살았기 때문에 개인의 사생활 같은 것은 사치였습니다.

"킁킁 발라 김이 뭔 일이야? 시 썼어?"
"들어보세요."

'발라 김' 아저씨의 어눌하지만 어딘지 엄숙한 시가 흘러 나왔습니다.

두 개의 증오가 맞 부딪혀
땅 속 깊이 박혔다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보다 더 깊은 계곡이 어디 있을 것이냐.
이보다 더 깊은 계곡이 어디 있을 것이냐.
이보다 더 높은 봉우리가 어디 있을 것이냐.
이보다 더 놓(높)은 봉오리가 어디 있을 것이냐

'발라 김' 아저씨의 시 낭송이 끝나자 모두들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주인 집 아저씨가 말을 꺼냈습니다.

"그게 다야?"

엄마도 한 마디 대꾸를 했습니다.

"그래요 증오보다 더 깊고 높은 봉오리와 계곡이 어디 있겠어요. 시 좋네요."

엄마는 밖에서 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끔 술집 여자들이 사귀고 있는 일본 남자들에게 일본어로 편지도 써주고 오는 편지도 번역해주고 몇 푼의 돈을 받는 일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발라 김' 아저씨가 슬쩍 일어서며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아줌마는 배운 사람이라 시를 좀 아네요."

그때 주인집 아저씨네 아줌마가 무슨 큰 일이라도 났는지 엄마한테 숨 넘어 가는 듯 가쁘게 말을 했습니다.

"학현이 엄마 서현이 그 집에 보내지마. 그 집 안주인이 얼마나 독한 지 글쎄 식모가 컵 하나 깼다고 발가벗겨서 대문 앞에 세워 뒀다지 뭐야."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엄마는 그 말이 진짜인지 동네 사람들한테 수소문을 하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엄마 나 가야 돼?"
"서현이 짐 풀러라, 그런 독한 집에는 안 보낸다."

오빠의 얼굴에서 기쁨이랄까 안도감이랄까 하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꼭 끌어안고 말했습니다.

"내 몸 부서져라 일하면 너희들 못 먹여 살리겠나. 죽어도 깉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제."

그날 밤 우리 삼 남매는 엄마와 함께 엄마 품에서 한껏 울엇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오빠와 언니가 울자 괜히 슬퍼져서 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제 우리 네 식구는 헤어지지 않고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오빠, #성장에피소드, #양자, #최초의 거짓말,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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