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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지면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세월 빠름을 절감한다. 같은 지면에 지속적으로 글을 써온 세월이 어언 10년을 헤아리니, <오마이뉴스>에 등록되어 있는 내 아이디 'sim-o'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독자 여러분의 관용을 빈다.

 

1995년 지방신문 <중도일보>에 소설 연재를 하게 되면서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인터넷 세상에 진출했다. 당시 중1이었던 딸아이가 이메일 주소와 홈페이지를 만들어준 덕이었다.

 

맨 처음 문학전문 사이트에 출입하면서 'maximo'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천주교 세레명인 '막시모'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2001년부터 활동 무대를 넓혀 '안티조선운동' 사이트인 '우리 모두'에 참여하다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의 안내를 받아 <오마이뉴스>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2001년 7월 시민기자 등록을 하면서 처음으로 'sim-o'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천주교 사이트에도 출입하게 되면서, 거기에서는 내 실명을 영문화한 'jiyoha'라는 아이디를 사용했으니, 생각하면 조금은 재미있는 일이다. 교회 밖 사이트에서는 세례명을 사용한 셈이고, 교회 사이트에서는 속명을 사용한 셈이니….

 

'sim-o'는 내 별호인 '심오(深梧'를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우선 내가 '심오'라는 별호를 처음 갖게 된 동기와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이유 등을 소개해 보겠다.

 

별호를 갖게 된 동기

 

작가지망생 시절, 당연히 해마다 가을이면 '신춘문예병'을 앓았다. 참 많이도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1974년 가을을 맞았다. 다시 신춘문예에 도전해볼 요량으로 또 한 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3일 동안 성당에서 원고를 썼다. 마치고 보니 정확히 100매였다. 기분이 좋았다.

 

'저항아(抵抗兒)'라는 제목을 붙인 이 소설을 <중앙일보>에 투고하면서 실명 대신 '마심오(馬深梧)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미 여러 번 실패한 실명으로 다시 응모를 하려니 왠지 겸연쩍은 느낌이 들었고, 또 어쩌면 운이 없는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심오'는 천주교 세례명 '막시모'를 변형시킨 이름이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막'씨는 없으므로 '마'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한글로 '마시모'로 적고 보니 영락없는 일본 이름이었다. 기겁을 하고는, 도리 없이 한자를 사용하여 '馬深梧'로 적게 되었다.

 

197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는 총 580편이 응모되었다. 그중에서 30편이 본심에 올랐고, 다시 4편이 최종심에 올라 당선 후보로 논의되었다. 내 작품 '저항아'는 그 4편 가운데서도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되었고, '심사평'에 제일 먼저 언급되었다.

 

몇 년 후 <중앙일보> 신춘문예 출신 선배 작가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심사위원들은 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편집국장에게서 비토되어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었고, 심사평도 심사위원 대신 담당 기자가 썼다는 얘기였다.

 

당시는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언로가 묶여 있던 시절이었다.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내 작품이 <중앙일보> 지면에 오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제목도 그렇거니와, 부도덕한 교장선생님에게 저항하는 '문제 학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 내용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메시지로 오해될 수 있는 여지가 워낙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그때로부터 다시 7년이나 지나서야 나는 등단의 꿈을 이루게 되었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가 편집국장 데스크에서 비토 된 그 작품은 등단 후 '백주, 그 우울'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지에 발표되었다.  

 

'별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이유

 

등단 전에는 5년 여 동안 노동판을 전전하는 객지 유량생활을 했지만, 등단 후에는 고향에 머물며 나름대로 고장의 문화마당을 가꾸는 일을 했다.

 

1991년에는 서산에서 <갯마을>이라는 격월간 지역잡지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편집주간을 맡아 5년 동안 고생을 했다. 또 1993년에는 <한겨레신문>을 모방한 형태로 주민주식을 모아 <새너울>이라는 지역신문(주간지)을 창간하고 역시 5년 동안 운영을 도우면서 논설주간 노릇을 했다.

 

자연 같은 지면에 두세 개씩의 글을 써야 했다. 한 사람이 두세 개씩의 글을 쓴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편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세 개씩의 글을 쓰더라도 필자의 이름을 달리해 보기로….

 

그때 나는 1975년도 신춘문예 응모 때 단 한 번 써보았던 '마심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글 전용 지면에 '마심오'라는 한글 표기를 하고 보니 더욱 일본 이름 같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마'자를 떼어버리고 '심오'라는 두 글자만 사용하기로 했다.

 

'심오'를 한글로 표기하면 심씨 성과 외자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질 법도 했고, '深梧'라는 한자 표기를 하면 그럴 듯한 호(號)로 느껴질 법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심오(深梧)'를 내 호로 삼기로 작정했다.

 

호는 일반적으로 은사나 벗이 지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호를 짓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한다. 내 경우는 일단 스스로 호를 지은 셈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천주교 세례명에서 유래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셈이다. 그렇다. 내 별호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것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 세상에서 다시 사용하게 된 별호

 

지역잡지와 지역신문이 차례로 문을 닫은 이후로는 한 개 지면에 두세 개씩의 글을 쓸 일도 없어졌고, 따라서 호를 사용할 일도 없게 되었다. 한동안 내 별호를 잊은 채로 살았다. 호를 사용할 주제도 못 된다는 자격지심도 없지 않아서 호에 대한 애착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 인터넷 세상에 진출하면서 다시금 내 별호를 기억하게 되었다. 맨 처음 문학전문 사이트에 출입할 때는 'maximo'라는 세례명 영문 표기를 아이디로 사용했는데, 2001년 7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등록을 하게 되면서 '심오'라는 내 호를 떠올렸고, 처음으로 내 호를 영문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오마이뉴스>에는 'sim-o'라는 아이디로 등록되어 있으되 내 실명으로 글을 쓰지만, 다른 인터넷 매체에서는 별호 '심오'를 사용하기도 하고, '지조와 순수'라는 익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내 별호에 대해 자긍심과 애정을 갖는다. 자긍심과 애정 속에는 당연히 사명감도 포함된다. 다음 번 글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내 별호가 왜 '심오(深梧)'인지, 내 별호 안에 깃들어 있는 의미(가치지향)에 대한 소개를 해보겠다.


태그:#별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신춘문예, #인터넷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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