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장 건너에서 바라본 하얼빈역. 옛 기차역을 형상화한 얼음 조형물이 돋보입니다.
 광장 건너에서 바라본 하얼빈역. 옛 기차역을 형상화한 얼음 조형물이 돋보입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중국식 만두를 맛있게 먹고 하얼빈역에 도착하니까 오후 1시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귓불이 얼얼하고 카메라를 든 손등이 시리도록 바람이 날카로웠다. 여행의 생명인 카메라가 걱정되어 암탉이 병아리 품듯 가슴에 집어넣었다. 배터리 방전을 막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추운지 바람이 눈을 스치면 눈물이 나왔고, 턱밑 근육의 힘이 빠지면서 말하기가 힘들었다. 손으로 입을 감싼 목도리를 만지니까 얼어서 뻣뻣했다. 의식적으로 자꾸 숨을 쉬니까 녹으면서 온기를 느꼈지만, 조금 지나니까 더 많은 양의 얼음이 생겼다.

음식점, 시장, 기차역 등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공간 입구에 설치한 바람막이 천.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음식점, 시장, 기차역 등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공간 입구에 설치한 바람막이 천.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어리둥절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식당에서 역까지는 10분 남짓 걸렸다.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아 지하보도를 이용했는데, 입구에 쳐놓은 여러 장의 두꺼운 천이 '동방의 모스크바', '만주의 파리'라는 하얼빈 체면을 왕창 구기고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에 들어온 '동춘서커스단' 출입구가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왔다. 

커튼 안으로 들어가니까 주황색 전구만 몇 개 켜있을 뿐 어두컴컴해서 동굴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워낙 추운 지역이서인지 다른 도시도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업소나 시장 등이 있는 건물 입구마다 바람막이용 천을 커튼처럼 쳐놓고 있었다.

도마 안중근(1879-1910)이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트렸던 현장을 어두운 새벽에 봤기 때문에 더욱 자세히 보려고 역내 입장권을 구매하러 갔던 박영희 시인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한때 중단됐는데 지금은 판매하는지 모르겠다며 반신반의했지만, 구하지 못하니까 허탈한 모양이었다.

안중근이 거닐었다는 제홍교(霽虹橋)에서

역사의 현장을 재확인하려던 우리는 제홍교(길이 115m, 폭 3.8m 4차선)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홍교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철색교'로 입구에는 1926년에 완공했다는 안내문이 박힌 탑이 세워져 있었다.

하얼빈역과 300m 정도 떨어진 제홍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거사 하루 전날(10월25일) 거닐면서 저격할 위치를 확인했던 곳이라고 한다.

제홍교 난간에서 내려다본 하얼빈역. 잠시 애국자가 됐었지요. 마음으로만.
 제홍교 난간에서 내려다본 하얼빈역. 잠시 애국자가 됐었지요. 마음으로만.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제홍교 난간에 서니까 안 의사가 차를 마시며 이토를 기다렸다는 귀빈실 찻집과 저격 현장 등 하얼빈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철길 위로 맴도는 도시의 소음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25분 하얼빈역 하늘을 놀라게 했던 일곱 발 총성(銃聲)의 여운처럼 느껴졌다. 

안 의사는 국모를 살해하고 국왕을 협박해서 국권을 강탈한 민족의 원흉을 처단하기 전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사에 성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 불꽃처럼 타오르는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떠나온 조국 산천과 가족의 안부도 염려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32년도 못 되는 짧은 생으로 마감했지만, 영원히 기억될 안중근. 그는 2천만 동포의 한과 분노를 풀어주었다. 안 의사 공판 기록에 따르면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고 "마지막 할 말이 있느냐?"라고 묻자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라고 되물으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도마 안중근

100년 전 모습들은 흐르는 물처럼 모두 사라져 찾아볼 수 없고, 오가는 차들이 경적만 울려대는 제홍교를 뒤로하고 도리구에 있는 '조선민족예술관'으로 향했다. 예술관 건물 2층에 자리한 '안중근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박영희 시인은 하얼빈은 독립 항일투쟁에서 뚜렷한 전적을 세웠던 곳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안 의사가 열하루 동안 머물면서 그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조선과 중국인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도시로 기록되어 내려온다. 

자료에 의하면 1910년 4월 16일 <영국신문>은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라고 보도했다.

중화민국을 창립한 '손중산'은 "안중근의 공적이 삼한과 만국을 돕고 백세와 춘추에 빛나리라"라고 추모했고, 전 흑룡강성 성장 '천레이'는 "안중근은 내 마음속에 애국열정의 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항일혁명투쟁에 나선 계기는 안중근을 숭배하고 따라 배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회고했다고 전한다.

'소피아 성당'과 '안중근기념관' 방문

하얼빈의 명동 '중앙대가' 입구. 수많은 얼음 조각상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하얼빈의 명동 '중앙대가' 입구. 수많은 얼음 조각상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차량은 진입할 수 없는 '중앙대가(中央大街)'는 '소피아성당', '안중근기념관', '조린 공원' 등과 이웃하고 있는 하얼빈의 메인스트리트. 옷차림이 울긋불긋한 행인들과 도로 중앙의 '백설공주' 닮은 얼음 조각상이 빙등제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었다.

1백 년 역사를 간직한 하얼빈의 '중앙대가'(약 1.4km)에는 러시아와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해서 한자 간판만 없으면 사진을 내밀면서 유럽 어느 도시에 다녀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이색적인 분위기가 풍겨났다.

눈 쌓인 소피아성당. 추운 날씨에도 질투가 날 정도로 관광객이 붐볐습니다.
 눈 쌓인 소피아성당. 추운 날씨에도 질투가 날 정도로 관광객이 붐볐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넘쳐나는 중앙대가는 1900년에 조성되었으며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 등 아름다운 건물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많은 여행자가 찾는 관광명소이기도 한데 조금 걸어가니까 웅장한 소피아 성당이 몸체를 드러냈다.

1907년 러시아인이 세운 소피아 성당은 중국 공산당 시절 모택동 정부가 없애려고 하였으나 당에서 극구 반대해서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광객이 늘면서 입장료가 엄청나게 불어나 돈뭉치가 됐다고 한다.

소피아 성당은 높이가 53.3m로 극동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라고. 1923년 9월 27일 재건축을 시작하여 1932년 완공되었단다. 내부에는 하얼빈의 역사를 담은 흑백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관람은 못했다.

안중근 의사 흉상. 의연함에 찐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흉상. 의연함에 찐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으로 스며들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으로 이감될 때까지 수용되어 있었던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 모습.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으로 이감될 때까지 수용되어 있었던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 모습.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일행은 중앙대가에 밀집한 상가 백화점에서 잠시 쇼핑을 하고 안승가(安升街)에 위치한 '안중근기념관'으로 향했다. 추위에 떨다가 건물 2층 전시실에 들어서니까 온기가 돌아서 좋았는데, 기념관 입구의 안중근 의사 흉상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안 의사가 거사 직후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실 독방 감옥에서 일본 검찰에게 심문받는 당당한 모습이 그려졌다. 영사관은 현재 화원가(花園街) 대로변에 있는 '화원소학교' 자리라고 했다.

전시실은 그리 크지 않지만, 안 의사가 하얼빈에 도착해서 여순감옥으로 옮겨져 생을 마칠 때까지의 여정과 이토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 그리고 가족 계보와 생전에 쓴 서예 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도마 안중근에 대한 기록은 만주에서 만들어진 '안중근평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마에 대한 세밀한 정보도 만주에 있는 학자들이 더 많이 알고 있어요"라는 박영희 시인의 설명이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이조린'은 있는데 '안중근'은 없었던 조린 공원

 빙등제가 열리고 있는 조린공원 입구. 처음 대하는 순간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빙등제가 열리고 있는 조린공원 입구. 처음 대하는 순간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빙등제가 열리고 있는 '조린 공원(자오린 공원)'는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음 조형물이 실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버스 기사와 안전가이드는 조린 공원 빙등제는 27회, 송화강 얼음축제는 12회라고 설명해주었다.

조린 공원은 도마 안중근의 혼이 잠들어 있는 장소이다. 안 의사가 최후 유언에서 "내가 죽은 뒤에 뼈를 하얼빈 공원(조린 공원)에 묻어 달라. 조국이 독립하면 그때 조국으로 가져다 달라···"라고 당부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조린공원 잔디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유묵비. 2010년 8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조린공원 잔디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유묵비. 2010년 8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1900년 하얼빈 최초 공원으로 조성되어 1946년 중국의 혁명 열사 이조린(李兆麟)을 기념하기 위해 '조린 공원'으로 개칭했는데,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 '청초당(靑草塘)', '연지(硯池)'를 새긴 유묵비가 공원 연못가에 세워져 있어 친근감을 더했다.  

안 의사의 혼이 묻힌 조린 공원도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날씨 탓인지 가슴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런데 안 의사 유묵이 새겨진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작년 8월 아내와 연못을 바라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박영희 시인도 이곳저곳, 하얗게 쌓인 눈밭을 뒤지고 다녔다. 눈이 쌓여 있다고 해도 5개월 전에 봤던 비석 위치를 가늠할 정도의 기억력쯤은 가지고 있는데 답답했다. 중국의 이조린은 얼음 조형물에 사진을 모셔놓았는데 대한의 아들 안중근은 있던 비석도 보이지 않으니까 더욱 답답하고 허탈했다.

빙등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우니까 잠시 한쪽으로 치운 것은 아닌지, 외국에서 괄시를 받는 것은 아닌지, 별별 잡생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독립'과 '식민지', 상반된 단어가 뇌리를 스치면서 약지가 잘려나간 안 의사의 붉은색 손바닥 도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중국의 혁명 열사 이조린 사진을 모신 얼음 조형물.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중국의 혁명 열사 이조린 사진을 모신 얼음 조형물.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얼음 조각상에 조명이 들어오니까 더욱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렇다고 마냥 공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시계를 보니까 4시 10분. 하얼빈의 짧은 해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손은 시렸지만,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박영희 시인은 버스에서 일본의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인을 소개했다. 자기 나라(일본)의 영웅(이토)을 쏴 죽인 안중근을 '살인자'가 아닌 '테러리스트'로 표현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박 시인이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다며 소개한 시 <코코아 한잔>을 읊는 것으로 조린 공원에서의 안타까움을 달랠까 한다.

코코아 한 잔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
단 하나의 그 마음을
빼앗긴 말 대신에
행동으로 말하려는 그 심정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그 심정을
그것은 성실하고 열성적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끝없는 논쟁 후의
차갑게 식어버린 코코아 한 모금을 훌쩍이며
혀 끝에 닿는 그 씁쓸한 맛깔로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프고도 슬픈 마음을.

이시카와 다쿠보쿠

덧붙이는 글 | 조린공원 빙등제 구경하기 http://blog.ohmynews.com/chongani/275414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안중근, #조린공원, #빙등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