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0년 7월 경기도 양평으로 군대 간 조카 면회를 하고 조카와 촬영한 모친의 사진이다.
 2010년 7월 경기도 양평으로 군대 간 조카 면회를 하고 조카와 촬영한 모친의 사진이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팔순이 넘는 연세에도 건강하게 활동했던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 넘게 병석에 누워계신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진 것은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그날도 어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던 고등어를 프라이팬에 구워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점심을 먹고 난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청천병력 같은 일이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직장에 나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출근을 하는 평일이었다면 모친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모시고 살다 생긴 일이었기에 말할 수 없이 슬펐지만 다행히 119로 병원에 도착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됐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우신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서울에 있는 한 병원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집중치료실-일반병동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니 다행히도 약간 차도가 있는 듯하다.

평소 모친은 시간에 맞춰 끼니를 잘 챙겨 드셨다. 돼지고기, 닭고기, 커피, 음료수, 설탕, 사탕 등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단 음식과 커피를 너무 좋아했다. 어머니가 갑작스레 아프게 되시고 나니 문득 이런 음식들이 어머니를 쓰러지게 한 원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치료실에서 모친을 간병할 때, 어머니는 기저귀에 배설물을 쏟아 내고도 시치미를 떼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짓고 있으니 배설물을 배출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다 약간 냄새가 나 기저귀 안을 살펴보면 쑥색 배설물들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기저귀를 빼내고, 휴지와 물휴지로 닦아내고 새 기저귀로 갈면 미안해서인지 어머니는 사뿐히 눈을 감았다. 모친의 기저귀를 갈 때면 내가 아기 때 어머니가 내 기저귀를 갈아 주던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기저귀에 배설물 쏟고도 미소 짓는 나의 어머니

현재 병석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모친의 모습
 현재 병석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모친의 모습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어머니는 여섯 자식의 기저귀를 매일 갈면서 키웠을 것이다. 이렇게 여섯 자식을 거뒀을 어머니이지만 병원이 서울에 있는 관계로 지금은 한 두 자식만 모친 곁을 지키고 있다. 옆에 있는 간병인 한 분은 "부모는 열 자식을 거둬도 한 자식이 부모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을 했다. 간병인에게만 맡기고 찾지 않는 자식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맞는 말인 듯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입으로 밥을 먹지 못한다. 코로 영양식을 공급받아야 하는 모친이 안타까울 뿐이다. 함께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 모두 밥을 먹으니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가끔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혼자 영양식을 코로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빨리 어머니가 입으로 식사를 해야 할 텐데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병원 생활은 가족들에게도 큰 어려움이었다. 직장이 있는 형제들이 모친을 돌보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다들 지방에 살고 있고 형수 또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간병인을 고용하려 해도 모친이 꺼려하는 눈치였다. 기저귀에 똥을 누어야만 하는 환자로서,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심전도 검사기, 링거, 영양제, 산소, 약 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어머니를 보자니 마음이 아팠다.

함자가 송문엽(宋文葉)되시는 어머니는 정묘년인 1927년 음력 5월 22일생(토끼띠)으로 올해 85세이다. 지인들은 내게 '(어머니가) 살 만큼 산 연세'라며 위로했다. 또 영면하더라도 호상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평소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건강했던 모친이기에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머니는 평소 혈압이 높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워낙 밥도 잘 드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도 잘 다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 새벽기도를 나갔다. 뇌경색 판정을 받고 나니, 평소 집에 혈압계를 비치해 가끔 체크만 했어도 쓰러지지 않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소용없는 후회가 됐다.

"어제 몸이 좀 아프더라"... 어머니 말씀 흘려 듣지만 않았어도

2010년 12월 18일 오전,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촬영한 모친의 사진이다.
 2010년 12월 18일 오전,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촬영한 모친의 사진이다.
ⓒ 김철관

관련사진보기

며칠 전 병원으로 면회를 온 목사님이 모친의 소식을 전해줬다. 쓰러지기 바로 전날인 지난해 12월 17일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갔다가 집으로 가지 못해 앉아 있었다고… 그래서 아는 집사 한 분이 어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한다. 쓰러진 날 오전, 어머니도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 실수였다. 그 때라도 병원에 갔으면 쉽게 고칠 수 있었을 병을 크게 키우고 말았다.

어머니가 아픈 징조를 포착했는데 자식이 무심코 지나친 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모친께 할 말이 없다. 오직 용서를 빌고 쾌유를 빌 수밖에 없다. 빨리 병원에서 나와 함께 지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어머니께서 방과 1미터 거리에 있는 화장실에라도 걸어 다녀오실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모셔오고 싶다. 어머니는 현재 발, 특히 왼쪽 팔과 왼쪽 다리에 힘이 없어 일어설 수가 없다. 가끔 휠체어에 의지해 병원 안을 도는 정도이다.

담당 주치의는 어머니 연세가 많아 걸으려 하다 쓰러지면 고관절 등이 부러질 위험이 있고 그럴 경우 영원히 누워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며 휠체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다. 어머니는 평소 건강한 분이기에 반드시 일어나 아무 탈 없이 걸을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병원 생활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나도 감기와 폐렴으로 병원을 찾는 신세가 됐다. 요 근래 내가 평소 소통하고 의지했던 산소 같은 지인이 떠나고 내가 좋아한 직장 후배도 갑상선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또 직장 선배 한 분은 뇌출혈로 고생을 하고 있다. 이젠 모친까지 병석에 누웠으니, 내 마음이 더욱 울적하고 착잡할 뿐이다.

내가 아파 잠시 어머니 병원에 가지 않은 동안 큰형님과 여동생, 동서가 모친을 24시간 교대로 간병했다. 정말 이들에게 미안해 할 말이 없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도와주지 못했지만 죄송스러울 뿐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몸이 좋아지면 모친의 간병을 도맡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요즘 병원에 들르지 않으니 모친이 나를 자주 찾는다고 형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 몸이 고달프니 갈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어머니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빨리 건강을 찾아 모친을 편히 간병해 드리리다.


태그:#뇌경색 모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