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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
ⓒ (주)영화사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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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경. 간밤에 잠이 오지 않아 그때까지 깨어 있었다. 갑자기 대문 밖이 소란스럽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남성의 고함소리가 같은 것이 들리더니 쨍그랑 쨍쨍, 금속성 물질이 부서지고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대학가 부근에다 취업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고시텔밀집지역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사람들 웃고 떠들고 싸우는 소음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이번 소리는 여느 날과 다른 느낌이었다. 바로 가까이서 들리는 것이 우리집 앞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남편도 소리가 어지간했는지 건넌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동정을 살피러 나간 남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이 자식, 너, 왜 남의 차를 발로 차는 거야!"
이어서 계단을 내려가는 남편의 다급한 발자국 소리.

"야 인마. 너 거기 안서? 거기 서란 말이야!"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남편은 급히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도 놀라 덩달아 나가 보았다. 하지만 밖에는 이미 쫓기는 사람도 쫓는 남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새벽 찬바람만 휘휘 몰아치고 있었다.

새벽 4시, 차 백미러 부순 사람 추격에 나선 남편

'쨍그랑'하는 금속성 파열음은 우리 차 백미러가 떨어져 나간 소리였던 모양이다. 백미러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밖은 살을 에일 듯 추운 날씨다. 일단 집으로 와서 남편의 점퍼랑 모자를 챙겨 다시 나갔다. 대문 앞에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까 씩씩거리며 골목 어귀를 돌아오는 남편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식.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네. 회색 점퍼에 모자 눌러 쓴 놈인데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아. 취한 놈이 그렇게 빨리 달릴 순 없거든."

남편은 현행범을 눈앞에서 놓친 게 너무 분한 모양이었다. 우선 녀석이 애먼 분풀이를 하고 달아난 차 상태를 살펴보니 말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오래되어 힘없고 볼품없는 차는 문짝이 사정없이 긁히고 백미러는 박살나서 몇 미터 옆으로 나동그라진 상태다.

"자식이 백미러를 떼어낸 것도 모자라 발로 차면서 가고 있더라니까.  두 눈으로 버젓이 보면서 그걸 놓치다니. 와, 돌겠네. 나 이 자식 꼭 잡고 만다."
"속은 상하지만 이 새벽에 어떻게? 그냥 포기해버려."
"근방 어디에 있을 거야."
"멀리 달아났겠지. 뭐 하러 나 잡아가라고 어슬렁거리겠어."
"아냐. 멀리 안 갔다니까. 꼭 이 부근에 있을 것 같아. 느낌이 그래. 나 옷 단단히 차려 입고 나와서 다시 찾아다닐 거다."

남편은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두툼한 외투에 털모자로 중무장을 하고선 기어이 범인을 잡겠다고 다시 찬바람 몰아치는 새벽골목으로 돌진했다. 연식이 어언 15년이 된 이 차는 볼품 없이 낡은 모습과는 달리 우리에겐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 어려 있는 차다.

한참이 지난 후 남편은 당연히, 날쌘 도주범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터벅터벅 골목을 되짚어 왔다.

"거봐. 추운데 괜히 고생만 했잖아."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명 찾긴 했는데. 저기 교회 앞에서."
"그래?"
"아, 그게 말이야. 긴가 민가 하더라니. 딱 느낌은 오는데 막상 대놓고 '아까 내 차 박살내고 도망간 놈이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온 거야. 분명 그 자식이 수상하긴 했는데 말이야."
  
긁힌 문짝을 문질러도 보고 나동그라진 백미러를 원래의 자리에 갖다 대어 보기도 하면서 남편은 계속 투덜거렸다.

"아, 자식. 왜 하필 우리 차를."

나란히 서있는 교장선생님 댁 고급차도 멀쩡하고 갓 출고된 마트 사장님 차도 그대로인데 왜 하필 우리 차를 그랬나. 사실 이 새벽에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의문일 것이다. 골목길에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는 다른 집 차들은 다 놔두고 왜 하필 낡고 처량한 우리 차를.

15년 전 도색도, 광택도 훌룡한 차였건만...

'불특정 다수'를 향한 우발적 범행의 표적이 하필 '특정한 나'일 때, 그 억울함과 피해의식은 또 다른 불특정 다수를 향한 횡포로 표출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진저리 쳐 진다. 나란히 서 있는 멀쩡한 이웃집 차들이 괜히 원망스럽고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한 그런 내 안의 억지 같은 것. 남편은 아침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 출시된 차들을 세세하게 검색 했다.

"엄마. 나도 좀 깨우지."

아침에 간밤의 참상을 전해들은 딸은 마치 자신이 그 시간에 깨어있었더라면 큰 도움이라도 됐을 듯 안타까워했다.

"뭐 너까지 깨우고 그래. 아빠가 죽어라 달렸어도 눈앞에서 놓쳤는걸."
"우와, 영화에서처럼 아빠 그렇게 멋있게 추격했어?"
"멋있게 달린 사람은 그 아저씨고 아빠는 뒤뚱거리며 쫓아갔겠지."
"에이 시시해. 엄마 근데, 아빠 그런 행동이 말이 돼? 그 아저씨더러 '야, 거기서!' 그러면서 쫓아갔대?"
"응, 엄마도 들었어."
"그 아저씨가 바보야? 우헤헤! '거기 서!' 그런다고 바로 서게?"
"그러니까 아빠지."

남편은 하루 종일 이래저래 속이 상해했다. 대한민국의 온갖 신차종을 두루 검색해 보고 나니 그 괴로움이 더하는 모양이었다. 차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하나 같이 근사한데 최소한으로 옵션을 생략해도 가격들이 만만치가 않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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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서라면 서지 왜 도망을 가. 사람 염장 지르게. 그리고 말이야. 우와, 돌겠네. 주변에 차들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우리 차만 깨고 부셔대다니 말이야."
"그 사람도 좋은 차는 순간 엄두가 안 났던 거지. 후줄근한 우리 차가 가장 만만해 보였을 걸."

우리차도 출고 당시에는 원래 주인이 폼 나게 전용기사까지 두고서 운행하던 차였더랬다. 몇 년이 지나 직장 상사에게 이 차를 싸게 산 동생은 몇 년 후에 다시 우리에게 거저 주었다. 그 전에 나는 면허증을 막 딴 상태라 단종된 낡은 차를 연습 삼아 몰았다. 어디 박아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싼 차였다. 차 뒤 유리에 '엽기적인 초보'라는 안내딱지를 떡하니 써 붙여놓고서.

그런데 서울에서 온 동생은 그걸 보고 기겁을 했다. 너무 낡아 사고라도 나면 큰일 나게 생겼다며 차라리 자신이 타던 차를 갖다 타라고 억지로 권했다. 마침 자기는 집근처로 발령이 나서 차가 필요 없게 됐다면서. 그래서 약간 오래된 남편 차와 나의 '엽기적인 초보' 딱지가 붙었던 문제의 차도 처분해 버리고 동생이 준 차 한 대로 통일했다. 우리한테 올 당시만 해도 차 상태는 연식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도색도 새로 하고 광택도 훌륭했고 뭣보다 사고 한번 없이 온전한 상태였다.

회색 옷 입은 사람 모두 '그 녀석'으로 보인다는 남편

서울에서 광주로 하방당한 이 차는 그날부터 고단한 주인들의 인생행로를 따라 급속도로 전락해 갔다. 여기 저기 부딪치고 긁히고 색까지 바래가더니 예의 온전하고 단아하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이 되었다. 서울에서 진자리 마른자리 골라가며 전용기사까지 딸려 호사를 누리던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채 이젠 거친 노면을 마다 않는 험한 몰골로 변해 갔다.

차디찬 새벽 애꿎은 행인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었던 걸 생각하면 차한테 너무 미안하다. 그렇잖아도 폐차장행이 머잖은 시한부 목숨인데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하다니.

왜 하필 우리 차였나. 정말 이유 없이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면 훨씬 고급차를 상대로 했어야 범행효과가 극대화 되지 않았겠는가. 가장 낡은, 그래서 만만해 뵈는 차를 표적으로 골랐다면 그 젊은이의 울분은 명분도 토로도 더욱더 비열하고 한심한 것이다.

남편은 회색계열의 모자달린 점퍼 차림의 젊은이는 모두 그 녀석처럼 보이는 착시에 시달린다. 취업준비생들이 태반인 동네에서 인상착의가 비슷한 젊은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두렵다. 멀쩡한 이웃의 차들을 억울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내 뒤틀린 심사와 선량한 젊은이들이 모두 그 남자로 보이는 근거 없는 의심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이 분노와 억울함이야말로 간밤의 그 젊은이를 사로잡던 어리석음이 아니었겠는가. 내가 다스리지 못한 분노와 자격지심은 다시 내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지극히 살피고 경계해야 할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내 안의 성냄과 어리석음일 것이다.


태그:#자동차, #이웃, #억울함,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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