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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의 마지막날, 크루즈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새벽 5시. 오늘부터는 러시아 시간으로 계산한다. 자동로밍된 핸드폰의 시계는 한국보다 한 시간 빠른 현지시간에 맞춰져 있다.

저녁먹고 이것저것 하다가 바로 잠이 들었으니 이른 시간에 깰만도 하지만 선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일부러 알람을 맞추고 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잠에서 깨어나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다 오전 6시쯤 되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세상이 깜깜하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망망대해의 밤은 이랬구나.

다시 객실로 돌아와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명상에 잠겨볼까 했지만 눈만 깜빡거린다. 그렇게 멍하니 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오전 7시가 돼 노곤해진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깜깜한 세상. 3층 로비에 앉아 날이 밝아오길 기다리다가 일행을 만나 아침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그때부턴 일출은 포기한 상태다.

식사 도중, 기상상태가 양호하지 못해서 도착이 늦어질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시간들을 더 기대하고 있던 나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 말 그대로 크루즈 여행이 될 판이다.

하지만 선장님이 열심히 달려주셨는지 낮 12시쯤 되니 죽어있던 핸드폰에 안테나가 잡히기 시작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음성로밍 걸 때 1분에 4,600원, 받으면 1,114원, 문자는 한 건에 300원, MMS는 0.5kbyte에 4.55원이라는 살 떨리는 요금의 압박 때문에 소수의 지인들에게 안부문자만 남기고 만다.

멀리 보이는 러시아의 땅덩이
 멀리 보이는 러시아의 땅덩이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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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러시아의 눈쌓인 땅덩이도 아득하게 보인다. 우리나라의 바다에서 보던 땅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왠지 거대함이 느껴진다. 시베리아의 야생수컷 호랑이가 뛰쳐나올 것 같은 기세로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점심시간. 아무래도 우리는 배에서 사육을 당하고 있는 듯 하다.

크루즈로 점점 다가오는 정찰선
 크루즈로 점점 다가오는 정찰선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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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점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곳은 우리나라의 인천항쯤을 연상케 한다. 정찰선이 다가와 크루즈 가까이 대더니 세관원이 배에 오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블라디보스토크의 땅을 밟는다는 생각에 설레임이 가득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여객선터미널
 블라디보스토크 여객선터미널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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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후 1시로 예정되어 있던 시간이 조금 늦춰져 2시가 다 돼서야 항구에 도착했다. 세관을 거쳐 하선을 하고 현지 가이드와 합류한 후 첫 번째 목적지로 이동하는 버스에 오른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차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차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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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밖으로 보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에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눈이 며칠이나 내렸는지 가득 쌓인 거리. 옷을 두껍게 여민 모습들. 쭉쭉빵빵한 러시아 미녀들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서울만큼 심한 교통체증이 놀랍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이동하는 시간이 4~5시쯤이었으니 러시아워가 시작되는 시간이라 더 심하다고 한다.

서울과 비슷한 면적에 인구밀도는 서울의 절반 수준이지만 이렇게 차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운전면허 취득 가능 연령 때문이다. 러시아는 만 16세 이상이면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하여 부모들은 자식이 그 나이가 되면 생일선물로 차를 선물해주기도 한다. 한 집에 평균 2~3대의 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쯤인 나이에 자차를 몰고 다닌다니 부럽기도 하지만 시간이 금인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문화가 아닐 수가 없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의 사람들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의 사람들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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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의 성비율은 남:녀=4:6으로 여자가 많다. 그 옛날 한국이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다면 러시아는 여아를 선호했다고 하니 그것이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여자가 더 많다. 여자가 차를 몰고 나오면 "여자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라며 손가락질을 해대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물론, 세대가 바뀌면서 차츰 그 보수적인 인식이 변해가고는 있지만 말이다.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하면서 느꼈지만 여자들을 대하는 남자들의 매너는 수준급이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다. 러시아어라고는 '쓰바시바(고맙습니다.)'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부부가 이혼을 하면 재산의 80%와 양육권을 여자가 갖는 것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나라여서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여성이 대우받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이 눈물겹기도 하다. 하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안되는 속담마저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여자로서 러시아의 문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사실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런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로 흘러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곳을 떠나오면서도 '그냥 여기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건 그 나라 남성들의 매너가 크게 작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한국남자가 제일 멋있는 것도 사실.

덧붙이는 글 | http://dandyjihye.blog.me/140119547900 개인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블라디보스톡, #크루즈여행, #DBS크루즈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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