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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칠순 권사님' 실제로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을 기준한다면 그에게 '송칠순 전도사님'이라는 제목을 달아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굳이 '권사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먼저 그를 처음 만났을 즈음이 권사님의 직분을 갖고 있을 때였고, 또 그 이름으로 오래 그분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면, 권사님으로서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이 전도사님이 되고 나서 도와준 것보다 훨씬 컸다는 점 때문에 나는 그분을 '권사님'으로 즐겨 호칭하는 것 같다.

 

송 권사님은 충북 옥천 소서리 출신이다. 내가 그곳에서 목회를 할 때, 기도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다. 송 권사님의 어머니 김순분 집사님은 농촌교회에서 드물게 주일을 잘 성수하신 분으로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농번기가 돌아오면 모두 들로 밭으로 일을 나가는데, 믿는 자라고 여기에 빠지지 않았다. 주일을 성수하던 성도들이 그만큼 드물 때, 그분은 교회를 지킨다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석하곤 하셨다.

 

김 집사님이 이렇게 하시기까지는 따님인 송 권사님의 기도 덕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의 믿음 생활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한 결과 구원을 선물로 드렸고, 농촌교회의 모범적 신앙인으로 세워달라고 기도한 결과 어머니가 열심히 주일 성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교회를 찾아 어려움에 대한 조언과 기도로 늘 힘을 실어 주었다. 사람이 드문 두메산골 마을에 귀한 만남, 사랑의 교제였다고 기억된다.

 

그곳을 떠나고 한 명 두 명, 나의 뇌리에서 사라질 즈음이었다. 송 권사님의 이름도 얼굴도 어스름해질 작년 언젠가 우리 카페에 그의 댓글이 달렸다. 너무 반가워 그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 김순분 집사님을 그리는 글을 즉석에서 올렸다. 그는 이후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나의 글에 댓글로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 주어서 잦아드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나의 근황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우연히 인터넷에 떤 나의 글을 보고 소재의 끈을 찾았다며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 그런 그가 어제(11월 25일) 우리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역시 '덕천성결교회' 카페로 만난 서울평강교회 박영복 목사님과 함께 김천을 방문했다. 송 권사님의 만남은 10년이 넘는 시간적 간격을 갖고 있었다. 오전 10시 54분 도착이라는 전화를 받고 10시 20분쯤부터 김천역에 나가서 그들을 기다렸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마음 설레게 하는 경우는 나에게 많지 않다. 시간도 꽤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을 두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착념했는지도 모른다. 밉고 두려운 사람과의 약속 시간은 너무 빨리 다가오지만,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과의 약속 시간은 무척 느리게 흐른다는 원리, 즉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도 길고 짧게 느끼는 정도는 각기 다르다는 것.

 

육신적 혈붙이를 10여 년 만에 만난다고 해도 이렇게 기쁠 수가 있을까? 아니 기쁨과 동시에 전혀 어색함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주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자매의 끈끈함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박 목사님과 대여섯 발자욱 떨어져 나오는 그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큰 변함이 없는 얼굴, 평안한 모습은 하나님의 귀한 딸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가깝게 지내는 박 목사님이 좀 서운함을 느낄 정도로 나와 송 권사님과의 인사 시간이 길었다.

 

다음은 어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 송 권사님과 박 목사님, 그리고 우리 부부는 농촌의 늦가을 정취를 맘껏 느끼며 시 외곽으로 빠져 나갔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어슴푸레 잡히는 곳이 '수도산 숯가마'였다. 증산면 산골에 있는 이 숯가마는 숯을 구워낸 열기를 이용해서 땀을 내는 곳이다. 몇 번 간 적이 있지만 도회지 편리문화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많이 느낄 정도로 엉성한 곳이다.

 

땀을 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송 권사님과 박 목사님은 숯가마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지 않았다. 이 숯가마는 가운도 샤워실도 없고 그냥 가서 땀을 빼고 오는 곳이다. 돈을 받지도 않는다. 숯을 굽는 데서 나온 열기를 오로지 지역 사람들에게 봉사 차원에서 제공하는 곳이다. 여기에 온 것은 다른 뜻이 있었다. 그 숯가마 식당에서 먹는 삽겹살은 천하일미(?)이다. 숯으로 구워 미역국과 함께 먹는 식사는 고급 음식점의 포만감을 훨씬 넘어선다.

 

송 권사님이 점심을 쏘았다. 카페 쪽지로 그리고 문자로 송 권사님은 몇 번이나 자신이 쏠 테니 목사님은 좋은 곳 안내만 하라고 했다. 그 좋은 곳이 바로 숯가마 식당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간 김에 나와 박 목사님은 입은 차림 그대로 숯가마에 들어가 땀을 뺐다. 숯가마 열기가 많이 식어 나는 한 번 들어가 시간 반 땀을 빼고 나왔고, 박 목사님은 강약 온도 차가 나는 숯가마 두 곳을 번갈아 드나들며 시간을 즐겼다. 그 사이 송 권사님과 박 사모는 대화의 꽃으로 회포를 풀고 있었다.

 

우리는 좀 일찍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손두부와 메밀묵으로 유명한 '신성식당'에 들려 젊은 안 주인이 마련해 준 그것들을 맛있게 먹고 직지문화공원으로 달렸다. 직지문화공원은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꼭 소개하는 코스이다. 직자사 입구에 넓은 공간을 확보해서 마련한 공원은 전임 시장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공원이라고 한다. 직지사와 접붙어 있지만 불교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게 만들어진 공원이다. 나는 이곳에 부임한 직후 그 공원을 둘러보고 느낀 감정을 '찬(讚) 직지공원'이라는 이름의 칼럼으로 신문에 기고했던 적도 있다.

 

'직지문화공원'이라는 명칭에서 문화는 전통문화를 일컫는 것일 것이다. 전통문화에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전통찻집이다. 우리는 문화공원을 한 바퀴 돌며 사진도 찍고 어둠과 함께 찾아온 찬 공기를 마시며 만추의 정서를 만끽한 뒤 절 입구에 위치한 전통찻집 '다래원(茶來苑)'으로 들어갔다. 늦가을 저녁 시간이서인지 손님은 없고 찻집 주인만 나무 난로 곁에서 책을 읽다가 우리가 들어가자 화들짝 놀라며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의 꾸밈없는 행동이 예쁘게 보였다.

 

박 목사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찻집에서 제일 유명한 차가 뭔지를 물었고, 찻집 주인은 손님들이 대추차를 많이 찾으신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차림표에 있는 차는 모두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존중해서 대추차를 넉 잔 주문하고 전통찻집 '다래원'의 분위기 습득에 몰두했다. 한 쪽 면에는 반야심경 탁본이 걸려있고 또 다른 면에는 눈을 부라린 달마대사 상이 일필휘지로 그린 그림이 있었다. 또 불교 관계 소품들이 한쪽 귀퉁이에 전시되어 사찰 입구의 찻집임을 암묵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앉은 맞은 편 중간에 걸려 있는 서양화가 고흐의 자화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전통찻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오후 6시 반이 되어 우리는 다래원을 나왔다. 어둠이 세상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문화공원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과 멀리 보이는 호텔의 네온사인만이 어두운 밤을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회로 왔다. 첫 방문인 송 권사님은 예배당에 들어가 울먹이며 기도했다. 사택에서 다과를 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그는 말을 전했다.

 

"목사님, 예배당 건축은 속히 해야 하겠네요. 저도 기도하면서 작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송 권사님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믿음의 용사이다. 한 교회에서 심방 전도사로 사역을 하는데 머물지 않고 경인지역 목회자 모임에 총무로 일하면서 목사님들을 섬기고 있다고 한다. 주님께 의지하는 나날의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의 큰딸은 목사님과 결혼 지금 사모의 길을 걷고 있다. 자녀들도 모두 주님의 백성들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기도의 열매임이 분명하다.

 

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둘째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옆에서 듣기에도 따스한 모녀간의 통화이다. 김천 이 목사님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둘째 딸이 목사님 맛있는 거 사드리라며 신용카드를 주었다고 한다. 요즘은 카드를 사용하면 본인 휴대폰으로 즉시 문자가 가는 모양이다. 왜 그렇게 적게 썼느냐며 팍팍 쏘고 오시라고 덧붙이더라는 것이다. 사랑은 아메바와 같아서 한쪽에서 모자라면 다른 쪽에서 채워지는 모양이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후 7시40분 상행선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송 전도사님은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우리를 선 채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몸짓임이 분명했다.


#송칠순권사#이명재목사#옥천 소서리#덕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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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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