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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게 붉은 단풍으로 여울지는 곳이 어디일까? 아무래도 북한산이나 도봉산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북한산을 비롯한 국립공원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순박한 자연미만 있지, 고아한 예술미라든지 역사가 주는 고즈넉한 운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고궁을 찾아 가을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면 서울의 고궁 중에서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창덕궁과 덕수궁(경운궁)은 어딘지 모르게 격식을 중시하는 댄디즘의 신사 같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창경궁은 어수룩하게 차려입은 여인네 같은 느낌이 강하다. 결국 첫여행지는 창경궁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날따라 운이 좋게 창경궁에서는 영조 오순 '어연례' 재현행사도 진행되고 있어서 그곳을 찾은 보람도 있었다. 돌아오는 주말, 가족이나 연인끼리 궁궐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 설악산이나 북한산에서 맞이하는 단풍도 아름답겠지만, 고궁에서 접한 붉은 단풍의 묘미도 제법이었다.
▲ 창경궁에서 맞은 단풍놀이 - 설악산이나 북한산에서 맞이하는 단풍도 아름답겠지만, 고궁에서 접한 붉은 단풍의 묘미도 제법이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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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5대 궁궐'이 있다. 궁궐 대신에 고궁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고궁'은 옛 궁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궁궐이라고 쓰는 것이 더 좋을까? 또 하나 어색한 것은 서울시나 문화재청에서 만든 책자에는 '5대 궁궐'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의 다섯을 꼽지 않고 경희궁 대신에 '종묘'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종묘가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이야기」를 참조하여 우리 궁궐에 담겨진 배치원칙과 기본적인 건축구조 등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궁궐의 배치에는 중국 고대로부터 도시를 만드는 기본원칙인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말에 따른다. 종묘는 왼쪽 곧 동쪽에, 사직단은 오른쪽 곧 서쪽에 배치한다는 뜻이다. 서울에도 이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이 배치되어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궁궐 중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은 종묘와 사직 사이, 서울을 품고 있는 백악과 응봉 자락에 안겨 있다. 그에 비해 경희궁과 경운궁은 백악과 응봉 자락을 벗어나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에 기대어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는 데 대해서 '서궐'이라 불리던 궁궐이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지금은 그 전각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정전인 숭전전과 그 부근의 건물들 몇 채 만이 있다. 경운궁은 지금 서울의 중심, 시청 앞에 있다.

- 고종황제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나려고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하고 후궁 영역의 뒤 정원으로 만들었던 연못인 취로정 자리에 새롭게 창건한 정원이다. 10월 말의 조선조 궁궐은 푸르른 가을하늘처럼 너무도 아름다웠다.
▲ 경복궁 ‘향원정’ - 고종황제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벗어나려고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하고 후궁 영역의 뒤 정원으로 만들었던 연못인 취로정 자리에 새롭게 창건한 정원이다. 10월 말의 조선조 궁궐은 푸르른 가을하늘처럼 너무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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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는 곳이자 주거공간을 '궁궐'이라고 한다. 국왕은 전시의 비상사태인 동가(動駕), 능행(陵幸), 궁묘 참배를 제외하고는 궁궐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 국왕이 힘써 경영해야 할 곳으로 종묘 ․ 궁궐 ․ 성곽이 있다. 그중에서 '궁궐'은 임금이 거주하면서 다스리는 곳이다. 국왕이 어느 궁궐에 들어가 사는 것을 임어(臨御)라 하고, 기거하는 궁궐을 옮겨가는 것을 이어라 하며 다시 원래의 궁궐로 돌아오는 것을 환어라 한다. 국왕이 임어하는 궁궐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을 '법궁'이라 부르고 화재가 나거나 나라에 변고가 생겨 옮겨가서 상당 기간 머물며 활동하는 또 다른 궁궐을 '이궁'이라 불렀다. '법궁'은 정궁으로서 왕실의 생활기거 공간일 뿐만 아니라 백관의 조하를 받고, 빈객을 맞는 등 공식 활동을 하는 제반 공간을 고루 갖추었다.

- TV 9시뉴스에는 헬기까지 동원하여 설악산 단풍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창경궁 ‘춘당지’ 옆에도 단풍이 붉게 타올라 여심을 자극하고 있다.
▲ 창경궁 ‘춘당지’의 단풍나무 - TV 9시뉴스에는 헬기까지 동원하여 설악산 단풍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창경궁 ‘춘당지’ 옆에도 단풍이 붉게 타올라 여심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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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전통적으로 '법궁-이궁'의 양궐 체제를 따랐다. 다만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새로운 궁궐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법궁과 이궁이 바뀌기도 했다. 한마디로 궁궐의 역사는 영건과 훼손의 역사이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면서부터 바로 천도를 명하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새 수도 후보지인 계룡산, 신촌 일대인 무악 그리고 백악산 아래 한양을 직접 둘러보았다. 이 중에서 태조 3년인 1394년 8월 태조가 무악을 살펴보러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옛 고려의 남경이었던 한양의 옛 행궁에 머물면서 그곳을 도읍 터로 내정했다. 종묘와 궁궐 공사는 12월 4일에 착공하여 10개월 만인 1395년 9월에 완공되었다. 궁궐의 규모는 내전 173간, 외전 192간, 나머지를 두 합하여 390간으로 총 755간 정도였다.

- 근정전은 조회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적 의식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다.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평평한 돌이 깔린 그곳이 바로 조정이다. 조정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세 구역으로 나뉜 길인 삼도(三道)인데, 그 가운데 부분은 양 옆보다 조금 높다. 왕만 다니게 되어 있는 어도(御道)이다. 경복궁은 중국의 자금성보다 규모는 약간 작지만 산과 물과 연관된 건물의 배치와 오밀조밀함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미는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판단된다.
▲ 중국관광객들로 들끓는 경복궁 ‘근정전’ - 근정전은 조회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적 의식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다.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평평한 돌이 깔린 그곳이 바로 조정이다. 조정을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은 세 구역으로 나뉜 길인 삼도(三道)인데, 그 가운데 부분은 양 옆보다 조금 높다. 왕만 다니게 되어 있는 어도(御道)이다. 경복궁은 중국의 자금성보다 규모는 약간 작지만 산과 물과 연관된 건물의 배치와 오밀조밀함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미는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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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 완공된 지 얼마 뒤에 궁성을 쌓고 동쪽에 건춘문, 서쪽에 영추문, 남쪽에 광화문을 세웠다. 그리고 광화문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혼부 등 관청 건물들을 지었다. 10월 새 궁궐에서 큰 잔치를 베풀면서 정도전에게 여러 전각의 명칭을 짓게 하였다. 정도전은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 국왕이 기거할 연침을 강녕전, 연침 남쪽에 있는 국왕의 집무실인 보평청을 사정전, 사정전 남쪽의 정전을 '근정전', 근정전의 문을 근정문 그 남쪽의 문을 정문이라 지어 바쳤다. 드디어 태조는 12월 28일 새 궁궐인 경복궁에 입어했다. 이렇게 한양과 경복궁 터를 결정하는 데에는 소문대로 무학대사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새 왕조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신흥사대부의 핵심인 개국공신 정도전 일파와 왕실의 핵심인 이방원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태종은, 형 정종이 자신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재능을 참배하러 갔다가 그대로 개경에 머물러 사실상 개경 환도를 한 것을 다시 한양으로 천도시켰다. 하지만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였던 경복궁으로 임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화방에 있는 조준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새 궁궐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의 영건은 법궁 경복궁에 대해서 이궁의 완성이요, 조선조 최초의 '법궁-이궁'의 양궐 체제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 청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384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 창경궁의 <옥천교>에서 바라다 본 ‘명정문’ - 청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384호)도 동쪽으로 세워졌다. 대문 안쪽에 명당수인 금천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옥천교를 건너는 상징적인 마당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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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에 이르러서 다시 '창경궁'을 건축하여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이 되는 법궁-이궁 양궐 체제를 완성시켰다. 성종은 과거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처소로 마련했던 수강궁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궁을 확장하여 성종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부 덕종의 비인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처소로 삼으려 한 것이다. 수강궁을 확장하는 공사 중에 그 이름을 '창경궁'으로 지었다.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로서 규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왕이 일정 기간 머물며 정사를 처리하는 왕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궁궐의 구조와 그 형태를 살펴보자. '오문삼조'라는 기본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중국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편에 규정되어 있다. 궁궐 내부는 각 구역이 있으며 그 구역에 들어가는 문이 있게 마련인데, 앞에서부터 뒤로, 곧 남에서 북으로 들어가면서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의 다섯 개 문이 있다. 첫 번째 고문 안이 외조, 네 번째 응문 안이 치조, 다섯 번째 논문 안이 연조로 이 외조,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합쳐서 삼조(三朝)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 달리 오문삼조로 설명하기에 딱 들어맞지 않는 면도 있다.

- 통명전(보물 818호)은 1833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 창경궁 ‘통명전’ - 통명전(보물 818호)은 1833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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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궁궐은 내전, 외전, 동궁, 생활 주거 공간, 후원, 궐내각사, 궁성문 및 궐외각사 등으로 조직이 짜여 져 있다. 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된다. 창경궁의 '내전'에는 왕비의 처소인 '통명전'이 중심을 이룬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 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들이 모여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그 옆의 집복헌에서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의 돌잔치를 열었다.

- 조선조 영조대왕은 신하가 올린 잔치를 받고 신하에게도 잔치를 내리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국왕과 신하의 의리를 밝힘은 물론 당쟁의 폐단과 정치 불안을 해소하고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를 지향하고자 했다. 사진은 궁중정재 등의 공연을 마치고 영조대왕이 환궁하는 ‘환궁의례’의 일부이다.
▲ 영조대왕 오순 ‘어연례’ 재현행사 - 조선조 영조대왕은 신하가 올린 잔치를 받고 신하에게도 잔치를 내리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국왕과 신하의 의리를 밝힘은 물론 당쟁의 폐단과 정치 불안을 해소하고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를 지향하고자 했다. 사진은 궁중정재 등의 공연을 마치고 영조대왕이 환궁하는 ‘환궁의례’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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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외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규모도 작고 아담하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 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명정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과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창경궁의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한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식은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침 창경궁을 탐방하던 날 문화재 보호재단 주최의 영조 오순 잔치인 '영조 오순 어연례'가 열려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매년 설날이나 동짓날 국왕과 신하들의 화합을 위해 열었던 회례연, 가을철 노인공경을 위한 양로연을 비롯하여 주로 대비전에 올려진 진풍정, 성종 대부터 조선후기에 행해진 진연, 진찬, 진작, 어연 등 다양한 형태의 궁중잔치가 거행되었다. 특히 궁중잔치인 연향은 정초, 단오 등의 절기와 국왕의 즉위나 대비의 생신, 왕세자 책봉 등 국가적인 경사에 거행된 행사이다. 이는 단순한 잔치라기보다는 왕실 안정과 군신 화합, 노인공경,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거행된 국가의례의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 처용은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데, 그의 관용과 역신 퇴치는 민간신앙을 거쳐 궁중신앙인 나례로까지 유입이 되었다. 조선조의 궁중정재 중 하나로 ‘처용무’가 공연되어 나쁜 악귀를 몰아내는 구축의식을 상징하는 궁중무로 자리 잡았다.
▲ 영조대왕 오순 ‘어연례’ 중 <처용무> 공연 - 처용은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데, 그의 관용과 역신 퇴치는 민간신앙을 거쳐 궁중신앙인 나례로까지 유입이 되었다. 조선조의 궁중정재 중 하나로 ‘처용무’가 공연되어 나쁜 악귀를 몰아내는 구축의식을 상징하는 궁중무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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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영조 오순 '어연례' 재현행사가 오후 2시부터 펼쳐지고 있었다. 궁중 정재 연희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위해 2주 연속 창경궁을 찾았다. 영조의 오순 '어연례'의 절차는 초엄, 이엄, 삼엄, 환궁의례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초엄은 노부의장 및 호위 군사를 배열한다. 이엄은 협률랑이 전악과 악공을 인도하여 입장한다. 삼엄은 집사관 취위(인의의 인도로 집사관, 3품 이하 문무관이 입장한다), 국왕 입전 승좌(국왕이 여를 타고 명정전으로 들어와 어좌에 오른다), 세자 및 문무관 입장(세자와 종친 및 2품 이상 문무관리가 입장한다), 왕세자 및 문무관 국궁사배, 진작 예비의례(사옹원관이 국왕께 음식을 먹을 때 옷 위를 가리던 수건인 휘건함을 올린다), 진작의례로 왕세자와 영의정, 판부사 등이 국왕께 차례로 술잔을 올린다. 정재공연(검무, 청성곡, 처용무, 언락, 무고무 공연)에 이어 환궁의례가 펼쳐졌다.

- 마침 토요일 주말을 활용하여 대학로 연구실로 찾아온 강원지역 문인 제자들과 함께 가을여행 겸 창경궁으로 화려한 외출을 했다.
▲ 영조대왕 오순잔치 ‘어연례’에서의 인증샷 - 마침 토요일 주말을 활용하여 대학로 연구실로 찾아온 강원지역 문인 제자들과 함께 가을여행 겸 창경궁으로 화려한 외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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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올해 마지막으로 공연된 궁중재현행사 피날레의 백미는 역시 '처용무'였다. 처용은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데, 그의 관용과 역신 퇴치는 민간신앙을 거쳐 궁중신앙인 나례로까지 유입이 되었다. 조선조의 궁중정재 중 하나로 '처용무'가 빈번하게 공연되어 나쁜 악귀를 몰아내는 구축의식을 상징하는 궁중무로 자리 잡았다. 나례 가운데 처용무는 악공과 기녀가 맡았고, 곡예 ·희학지사 등은 재인(才人)이 담당했는데 여악(女樂)까지 동원되었다. 문화재보호재단이 재현한 영조대왕 오순잔치 '어연례'의 올해 마지막 공연은 내외국인 관광객 1000여 명의 구름관중을 몰고 온 대박잔치였다. 창경궁 매표소에서 주말 극장 앞처럼 관광객들이 줄 서서 표를 사는 광경은 요 몇 년 사이에 처음으로 목격하는 명장면이었다.

-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하였다. 현재 춘당지 주변이 창경궁의 후원처럼 여겨지는 것은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리면서 창경궁을 놀이 공간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었다.
▲ 창경궁 ‘춘당지’의 아름다운 가을풍경 -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하였다. 현재 춘당지 주변이 창경궁의 후원처럼 여겨지는 것은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리면서 창경궁을 놀이 공간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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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오순잔치를 구경하고, 궁궐을 둘러보았다. 우선 옛날이라면 국왕 이외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던 내전인 '통명전'에 들어가 실내를 사진 촬영했다. 특히 천장의 장식이 독특하면서도 찬란했다. 왕비의 침소치고는 생각보다 규모가 매우 작았다. 다만 통명전에서 바라보는 궁전의 주변경관이 붉은 단풍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웠다. 집복헌과 '영춘헌'은 통명전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로 쓰였다. 현재는 집복헌이 영춘헌의 서쪽 행각으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태어났고,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고,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처소로 생각되는 작은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춘당지'와 대온실(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건축했다)로 가는 길은 숲과 물이 흐르는 산책길이라는 의미로 '금천길'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춘당지 주변을 창경궁의 후원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사실 창경궁은 건축 당시에 창덕궁을 확장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하였다. 일제가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던 '내농포'라는 논을 파헤쳐 연못을 만들고 식물원과 동물원을 들이면서 놀이동산으로 전락시켰다. 1983년 이후 전통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지금의 춘당지이다. 천연기념물인 원앙이 쌍을 이루어 '춘당지'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인 ‘나례’가 조선조에 오면 궁중으로 유입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금과 왕세자의 건강과 안위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다리 양쪽 아치 사이에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 옥천교 다리 아치 사이에 있는 ‘도깨비’ 문양 -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인 ‘나례’가 조선조에 오면 궁중으로 유입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금과 왕세자의 건강과 안위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다리 양쪽 아치 사이에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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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궁궐의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따라서 모든 궁궐은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졸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물을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다리 양쪽 아치 사이에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옥천교는 모든 궁궐의 금천 사이에 놓인 다리 중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창경궁을 나서니 가을철이라 해가 짧아져서 벌써 석양의 기운이 완연했다. 다시 홍화문을 촬영하고 싶었으나 석양의 강렬한 빛으로 역광이 되어 촬영에 방해가 되었다. 홍화문을 다시 찍고 싶었던 이유는 이곳이 유명한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백성을 만나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화문은 국왕과 백성의 소통을 위한 문의 역할을 했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 하였다. 마침 여러 대의 카메라를 어깨에 맨, 아름다운 대학생 차림의 여성이 홍화문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알기라도 한 듯 사진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궁으로 떠난 첫 번째의 화려한 가을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옛 궁궐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마침 창경궁에서는 영조대왕 오순잔치 '어연례'재현행사까지 열려 모처럼 찾은 관광객들과 우리 문화 애호가들을 열광시켰다. '처용무', '언락', '무고' 등 궁중정재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기 위해 2주 연속 주말에 창경궁(경복궁)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가을은 을씨년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물씬 짙은 붉은 물로 채색했다. 우리 옛궁궐의 가을은 푸르른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태그:#궁궐탐방, #창경궁, #경복궁, #처용무, #궁중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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