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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닐이 죽었대."

지난 겨울,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고 새벽 시장을 보고 온 남편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려는 길에 무닐과 자주 어울려 다니던 K가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라고 묻는데 이미 내 눈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난산 끝에 아이를 낳다 아내가 잘못되었는데, 그만 농약을 먹고 따라 죽었대."

세상에, 순애보라니! 다른 사람이 아닌, 무닐이라면 능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믿기지 않으면서도 눈물부터 흘렀던 건,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고향집 망고나무 이야기 하던, 내 동생 무닐

지난 2008년 11월 12일 오전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과 경찰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폭력을 동원한 토끼몰이식 단속을 벌여 부상자들이 속출했던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단지. 공장 위에 가건물을 지어 이주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2008년 11월 12일 오전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직원과 경찰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폭력을 동원한 토끼몰이식 단속을 벌여 부상자들이 속출했던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가구단지. 공장 위에 가건물을 지어 이주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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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8년 정부의 불법체류자 일제 검거에 걸려 본국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나는 그 일을 지난 2008년 10월, 겁먹은 채 떠난 내 동생, 지못미라는 기사에 담았다.

무닐이 강제 추방을 당해 본국으로 간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그가 고향 방글라데시로 가고 나서다. 고향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전화를 걸어왔던 것. 무닐은 계획대로 고향 처녀와 결혼을 했으며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일년쯤 있다 한국에 다시 들어올 거라고 덧붙였다. 그런 그가 죽다니….

명절을 맞을 때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접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이가 바로 무닐이다. 인생의 가장 젊은 시절을 그는 이땅에서 보냈다. 물설고 낯선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지 않은 고난의 세월을 이겨냈던 그였으나, 결국엔 쫓겨나다시피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였기에... 

지난 기사에서도 밝혔지만, 무닐은 우리 부부가 운영하던 가게의 손님이었다. 그저 묻는 말에 답을 해주었을 뿐인데, 무닐은 "감사하다"며 매번 망고주스를 들고 찾아왔다. 그 횟수가 늘어나자 우리에 대한 호칭도 "형님"과 "형수님"으로 자연스레 옮아갔다. 음료수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는 내가 지금도 가끔 사먹곤 하는 게 망고주스인 걸 보면, 그와 우리가 얼마나 돈독한 사이였는지 알 만하다.

방글라데시 고향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망고 나무 이야기를 자주 했었는데…. 그 나무를 나중에 꼭 한 번 보여주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그의 눈이 그리움으로 촉촉해지는 걸 보았다. 그 그리움을 망고주스로 달랬던 건 아닌지. 이런 탓에 망고주스를 보면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그가 떠오른다.

하필 손도 안 대는 카레를... 김치만 꾸역꾸역 밀어넣다

 망고나무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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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닐의 숙소였던 소파공장을 처음 찾아갔던 날은, 모란공원 뒤편으로 펼쳐진 논배미의 벼가 노랗게 익어갔던 걸로 보아, 아마 추석 이맘때가 아니었나 싶다. 무닐은 친구들 몇몇과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숙소 가득 카레(정확히 커리)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은 내가 유일하게 못 먹는 게 보신탕과 카레였다. 보신탕이야 기호 식품이니 꼭 먹어야 할 필요는 없겠으나, 카레라 하면 세계인이 인정하는 5대 건강 식품 아니던가.

어쩌다 우리 식으로 먹기 좋게 진화한 카레를 해먹을 때조차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무닐이 내놓은 음식은 온통 카레 일색이었다. 다행이라면 카레로 뒤범벅된 음식 가운데 김치보시기가 놓여 있었다는 거. 김치를 얹어서 밥을 한 그릇 비워내는 게 고역이었는데, 티를 안 내느라 더 힘들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무닐이 맛있는 거라고 자꾸 내 앞으로 당겨주던 양고기 역시 카레 범벅이었다. 그나마 먹을 만하던 생선요리를 김치에 얹어 먹으니 "형수님이 생선 요리를 참 좋아한다"며 남은 요리를 싸주는 걸 애써 말리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무닐을 생각하면 또 어느 겨울 설날 아침이 떠오른다. 눈이 많이 내렸던 설날이었다. 무닐의 숙소였던 소파공장 앞 컨테이너 주변은 누군가가 눈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그 앞에 서서 남편이 그를 불렀다.

공장을 지키던 개가 먼저 '컹컹' 짖으며 우리의 등장을 알렸지만, 무닐은 설날 아침 방문자가 자신을 찾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듯싶었다. 웃통을 벗은 채 빠꼼히 밖을 내다보다 남편과 함께 내가 서 있는 걸 보고는 비로소 벗은 몸이 부끄러운지 양팔로 몸을 가렸다. 그리고 그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옷을 걸치고 나와 안내한 그의 숙소는 가을에 한 번 다녀가고 처음이었다. 여러 사람이 그곳에서 지내는 듯 제법 큰 컨테이너 박스 안에 무닐은 한국의 명절 설날 아침을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내고 있는 듯 했다.

연휴를 맞은 다른 이주노동자 동료들은 여행을 가거나 끼리끼리 모여서 오락을 즐기러 가는데, 그는 그렇게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게 좋다고 했다. 서울 친척집 방문에 앞서 잠깐 무닐의 숙소를 들른 이유는 김치를 갖다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김치는, 그것이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인기있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여름이었던가, 오이소박이가 맛있게 익어 그에게 가져다 준 적이 있었는데 두고두고 그 이야길 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김치를 담가주겠다고 하고선 차일피일 미루던 차, 김장철을 맞았다. 그 해 김장을 좀 넉넉히 해서 갖다주마고 했던 게 설날 아침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일 못해요" 하던 무닐

무닐은 한국에서 십년이 넘는 세월을 이주노동자로 살았다. 한국에서의 첫 두 해는 안산의 공단에서 있었고, 그 이후 이곳 마석으로 와 가구공단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이다.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게 모란공원 뒤쪽에 자리한 소파 공장이었다.

접착제를 많이 만지는 그의 손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다. 무엇보다 접착제 특유의 냄새가 처음엔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그는 사장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한국 사람들은 이 일 못해요. 일하러 왔다가도 며칠 못 견디고 가버려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내비치던 그였다.

소파 공장에서 안정을 찾는 동안 그의 손은 점점 거칠어져 갔고 한번은 프레스에 팔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늘 "괜찮다"며 웃었다. 그의 웃음 띤 얼굴을 보면 정말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괜찮아"보였다.

가끔 농담 삼아 "장가가야 할 텐데" 그러면 그는 수줍은 듯 더 크게 웃어 보이곤 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이 넘어가는 그가 외로워보여 우리 부부는 자주 그와 결혼에 대한 이야길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가 핸드폰에 찍힌 한 여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상으로 통화하는 미래의 신부감이라고. 막 이십대를 넘긴 듯한 그녀는 참 예뻤고, 둘은 참 잘 어울려 보였다.

그의 집 망고나무 한번 보러가마 했는데

무닐은 정부의 입장에선 '불법체류자'였으나, 소파 공장 입장에서 보면 놓치기 어려운 숙련노동자였고, 무엇보다 본인이 이 땅에서 일하는 걸 원하는 노동자였다. 무닐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좀 더 연장하고 싶어했다. 2년 정도만 더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도 하고, 하고 싶은 사업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한 만큼 월급도 못 받은 채였고, 퇴직시 응당 받아야 할 퇴직금도 정산하지 못한 채로 강제 출국 당했다. 그리고 그의 희망은 난산 끝에 사망한 아내를 따라 죽음으로써 묻혀 버렸다. 이제와 '만약'은 소용이 없겠지만, 만약 추방당하기 전 받아야 할 월급과 퇴직금을 정산받고 추방당했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가 다시 한국에 올 기회를 마련할 여력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목숨을 던질 만큼 사랑한 아내를 위해 따라 죽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나는 별의별 생각으로 복잡하다. 이제와서 소용없게 되었지만. 이게 다 그가 그리운 탓이다. 언제 한번 그의 집 망고나무를 보러 가마 했던 약속을 아프게 떠올린다.


태그:#이주노동자, #순애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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