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계몽영화>의 한 장면
 <계몽영화>의 한 장면
ⓒ 3767 Film

관련사진보기


1931년, 정길만(이상현). 동양척식회사에 다니는 직원인 그는 오늘도 아내와 막 태어난 둘째 아이를 먹여 살리려 여념이 없는 평범한 가장이다. 그리고 소작농에게 고리를 받으러 다녀야 하는 소위 친일파다. 그런 그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친구가 찾아온다.

1965년, 정학송(정승길).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 아래 잘나가는 나일론주식회사에 근무하는 학송은 맞선 상대인 교사출신 유정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청혼을 하려던 참이다. 전쟁 통에 겨우 살아남은 두 사람에게 널브러진 시체들과 빨갱이들의 만행은 지나간 추억이 됐다.

1983년 정태선(오우정). 강압적인 아버지의 맥주 심부름이나 클래식 라디오방송 녹음은 모두 둘째 딸 태선의 처지다. 할머니의 수발도 손수 드는 태선에 비해 오빠는 그 시절 국민학생이 과외를 받을 정도로 집안의 총애를 받는다. 사건은 태선이 처음으로 생리를 하던 카라얀의 내한공연 날 벌어진다.

"대한민국 근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유구한 호흡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근대화라는게 밝지만은 않았다. 암울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많은데 중간 중간 위트 있는 장면들과 대사들로 재미있고 부담 없이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장정일)

소설가 장정일 선생이 본인도 익숙지 않다는 독립영화에 애정을 고백한 <계몽영화>는 이렇게 3대에 걸친 80여 년의 단면들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격동'이란 수사를 쓸 수밖에 없을 우리 근현대사를 '정씨 3대'의 일상과 내면을 통해 담담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단순히 어렵거나 지루할 거란 편견은 접어둬도 좋다. 이 영화는 천편일률적인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거나 또 인물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 애정공세로부터 자유롭다.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구성과 섬세한 디테일,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위트, 그리고 공들인 배우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정색하지 않고 우리의 과거와 지금을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지난 10일 실질적인 데뷔작의 개봉(16일)을 1주일여 앞둔 <계몽영화>의 박동훈 감독을 만났다.

"친일, 친일 그러는데 속사정 모르고 막말하면 안 되죠"

박동훈 감독
 박동훈 감독
ⓒ 인디스토리

관련사진보기


친근한 인상과 더불어 지적인 기운을 풍기는 박동훈 감독.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내영화제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 다녀왔음에도 데뷔작의 개봉을 마주한 그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와 같이 보였다.

- 아무래도 영화제에서 호평도 받고 했으니 인터뷰도 자주 했겠다. 요즘 심정은 어떤가.
"무슨. 최근 조금 한 것이 전부다. 영화제 때나 관객과의 대화는 좀 했는데."

- <소녀X소녀>를 감독하지 않았나? 필모그래피 보고 같은 감독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아, 그건 극장 개봉도 염두에 두지 않고 의뢰를 받아서 정말 긴박한 일정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렇게 개봉도 하고 케이블에서도 화제가 되고 할지는 몰랐다. 그래도 아무래도 장편이니까 배운 점도 적지 않다. 그래도 <계몽영화>가 실질적 장편 데뷔작이다.(웃음)"

- 식상한 질문이지만 그래도 물어봐야 예의인 것 같다. <계몽영화>의 출발이 궁금하다.
"어머니와 친척 분을 뒷좌석에 태워 산소를 가던 길이었다. 영화상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데, '여기가 연신내 연천고개잖아, 옛날에 피난하면서 비행장 뒤로 숨기도 하고.' 그런 얘기들을 하시는 거다. 전쟁 때 얘기인데 일종의 후일담처럼 환담 나누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흥미로웠다. 거기에 연애하는 두 남녀가 그런 방식으로 얘기를 나누고 또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 하는 쪽으로 뻗어나간 거다. 연애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마치 남자들이 술 마시고 군대 얘기하듯이 그런 식으로 풀어내면 특이한 정서가 만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서 출발했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되고 또 발전한 아이디어는 우선 단편 <전쟁영화>의 모티브가 되어줬다. <전쟁영화> 역시 세 번째 만남에서 청혼을 하는 정학송과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박유정의 모습을 22분에 담아낸 단편영화다. 이 단편은 <계몽영화>의 모태가 되어줬고, 또 전반부에 편집이나 촬영, 세트만 달리한 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전쟁영화>와 겹치는 1961년 연애 장면은 '대사와 언어의 장면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동시에 다층적이고 정치적이며, 또 캐릭터 묘사에 있어서도 섬세하다. 전쟁시 참혹했던 장면들을 마치 어제 본 영화처럼 얘기하는 두 사람은 이미 '전쟁'과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상류 계급이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 그들이 듣는 노래는 직전 데이트에서 함께 본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곡이나 카라얀 전집 정도다. 영화 속 대사를 보자.

"그 지휘자 분 대동아 전쟁 때  나치 입당, 이런 뒷얘기들은 많지만요, 곡 해석력만큼은 탁월하다고 하더라고요."
"네, 저도 그 기사 본 적 있습니다. 근데 어디 그런 시절에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너무 쉽게 친일, 친일 그러는데 속사정 모르고 막말하면 안 되는 거죠. 좀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 학교 다닐 때 훌륭하신 일본인 선생님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문물! 저 가끔 취하면 그때 배운 경기중학교가 부르고 그래요!"
"어 맞아요, 우리 오라버니도 그러시는데. 4분의 2박자."
"하하. 근데 이런 노래, 우리 애들한테 들으면 믿을지 몰라."

<계몽영화>의 한 장면
 <계몽영화>의 한 장면
ⓒ 3767 Film

관련사진보기


정학성은 당시 막 출시됐던 삼양라면 위에 보석 티파니를 얹은 보자기를 내미는 이벤트로 청혼을 한다. "저희 집 서교동 2층 양옥집으로 이사도 했고, 2층 베란다에 나가면 과연 북한산 족두리봉이 보입니다." 그만큼 성공과 자본에 일찍 눈 뜬 친일파의 자손으로서 그는 아무 거리낌 없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연애와 청혼의 한 장면으로 시대와 정치, 그 속의 인간을 담아낸 박동훈 감독은 <전쟁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영화대상 단편부문상 수상을 필두로, 국내 대다수 영화제는 물론 로스엔젤레스아시안퍼시픽영화제, 샌디에고아시안영화제 등을 섭렵했다.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전쟁영화>는 그 어떤 획일적 시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제시대의 친일이든 독재시대의 부패한 자본이든, MB시대의 조기유학이든 말이다. 그저 박동훈 감독은 그 안에 사람을 바라보자고 권유한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어떠한 원칙이 궁금해졌다.

- 일제시대와 친일은 여전히 민감한 문제다. 분명 고민의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수탈, 저항과 같은 이분법적인 시선을 탈피해보자는 거였다. 일제 강점이 통틀어 36년이었다. 누군가는 20대에 취직해서 정년퇴임까지 할 그런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 1930년 자체는 좀 더 복잡했던 시기였고. 그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또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길만이 결국 나쁜, 자기 가족만을 위한 선택을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았어도 될 선택과 행동을 스스로 하지 않나. 아무리 먹고 살아야 했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다. 그건 어떤 태도의 문제일 수 있을 거다."

박동훈 감독
 박동훈 감독
ⓒ 인디스토리

관련사진보기

- 반면 60년대 장면에선 어떤 따스한 정서가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도 그렇고.
"그때 학송은 좀 귀여우면서 섬세함을 가진 마초로 그리고 싶었다. 유정도 교사였으니 자기주장도 좀 있고 자기 수준에 맞는 신랑감을 찾았을 테고.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여성들처럼 말이다. 그 시대는 어떤 낭만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또 그런 인물들과 묘하게 대비를 줄 수 있을 것도 같았고."

- 시나리오 작업이 꽤나 궁금하다. 아무리 <전쟁영화>로 출발했다고 해도 이렇게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문학적'이란 느낌도 들고.
"흐름이 중요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고 또 그렇게 나온 거다. 그래서 문학적이다란 얘기도 듣는 것 같고. 대신 어떤 연속된 하나의 디테일을 연결시키려고 공을 들인 장면들도 있다. 태선과 학송을 시간을 겹쳐지게 하는 편집같이."

- 좀 더 설명 해 달라. 원래 기자들이나 관객들은 창작자의 창작의 비밀에 관심이 많다. 
"출발은 물론 <전쟁영화>였다. 그 가족을 확장시켜 연대기로 다루고 싶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딸 3대까지 이어지게 된 거다. 처음엔 원래 1895년인가? 아관파천 그 시기까지 다루려고 했었다. 증조할아버지가 되려나? 그때 미국이나 서구가 들이닥치던 시기의 혼란감이 있었지 않나. 과연 일본이 우리 편인지, 러시아가 들어오는 건 괜찮은 건지, 그런 혼란까지 다루고 싶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그 부분은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초고는 연대기 순으로 진행되는 거였다. 그런데 시제 문제도 있고 또 60년대 장면의 정서가 튀게 보이고, 또 단편영화 묶음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있어서 지금처럼 편집한 것이다."

주변에서 너덜거리지 말고, 중심에서 사고하라고!

"너 조선놈이요? 왜놈이요?"

고리를 받으러 온 길만에게 한 농민은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동네아이들에게 낫으로 무참하게 난자당하는 꿈을 꿀 때도 '다쓰게떼(살려줘)'라고 잠꼬대를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학송은 죽기 전까지 환영으로 본 아버지의 일본이름 '요시미츠'를 외친다. 그렇게

박동훈 감독은 이 나라의 중심을 차지해 온 친일파의 궤적을 보여주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삶과 그들의 태도에 대해 묵묵히 문제를 제기한다. 그 질문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5%, 10%의 삶을 살고 있는 상류층 태선에게까지 이어진다. 원정출산에, 아들 조기유학 뒷바라지에, 불륜까지 저지르고 있는 태선은 그렇게 현 세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변부에서 너덜거리지 말고 중심에서 사고하라고, '중심'이란 대사도 넣었지만 결국 그게 핵심이기도 하다. 그 가족이 친일이후 자리를 잡고 꾸준히 그렇게 살아온 우리나라 20%일 테니까. 그들, 특히 길만이 해방이 된 후 제대로 자기반성을 하고 청산을 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 이후에 죽 대물림이 되어온 것 아닌가."

<계몽영화>의 한 장면
 <계몽영화>의 한 장면
ⓒ 3767 Film

관련사진보기


무엇보다 <계몽영화>를 보는 재미는 영화적 디테일이다. 거대한 예산을 들이는 대신 섬세한 디테일로 풍성한 영화적 재미를 안겨준다.

- 기독교 얘기도 간간이 등장한다. 학송의 여동생이 계속해서 전도하려는 것도 그렇고.
"기독교까지 나왔으면 학송의 성격이 더 세질 수 있었을까? 여하튼 시대적으로 볼 때 변신을 잘 해왔던 게 기독교가 아닌가 싶다. 길만 장면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기도 하고. 또 가족간 반목이나 갈등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80년대 장면에서 같이 식사하는 장면도 충분히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 왜 소망교회를 다니는 학송이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아, 그렇다면 좀 더 센 괴물이 됐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좀 더 보편성을 주고 싶긴 했다."

- 카라얀이니, 삼양라면이니 디테일이 재미있고 또 흡인력이 있다. 아침에 술을 사러가는 어린 태선의 모습은 나도 경험해 봤다.
"아, 그런 경험 있나? 연배가 어떻게 되나?(웃음) 물론 나도 경험해 봤다. 왜 그 당시 동네에 슈퍼가 여러 개 있지 않았나. 그래도 다 다른 곳에 들어가서 사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그랬다.(웃음) 아버님이 클래식 듣는 걸 좋아하셨다. 카랴얀은 당대 사람이라면 다 아는, 클래식 쪽에서는 유명한 연주자였고, 또 그가 나치 경력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 않나. 정확히 확인된 건 아니지만. 그래서 친일이라는 우리 영화의 주제와 연관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 제목은 왜 <계몽영화>였을까? 일종의 반어법일까?
"<전쟁영화>의 연장선상에서 고민한 제목이다. 원래 후보 중에는 <건전영화>도 고민했었지만…. 지금은 거의 폐기된 단어이지만 옛날에는 '쥐를 잡자' 같은 구호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나. 그게 다 결국 자기 안위나 보호와도 연관되어 있고. 그런 '계몽'이란 걸 인물들이, 관객들이 스스로 자문해 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현대사와 가족이라는 문제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바람난 가족>과 궤를 같이하는 <계몽영화>는 그러나 태선에게 역시 어떠한 단죄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과거에 비해 훨씬 갑갑한 정서 속에 남편 성호에게 또 하나의 시선을 부여한다. 성호는 노조를 착취하는 기업체 사장인 태선의 오빠 밑에서 일하며 '기러기 아빠'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태선은 부조리하고 또 아버지에 대한 증오나 트라우마가 있으면서 별 다를 것 없이 살아가지 않나. 성호는 그 집안사람인 태선과 조금 다른 인물이고 사실 죽일까도 생각했는데 그랬다면 그리 현실적이진 못했을 것 같다. 자살 시도 장면을 본 아이에게도 그 고통이나 그 집안의 내력이 대물림 될 테니까."

학송의 장례식에서 6개월 만에 만난 태선과의 갈등 속에서 그는 결국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역사와 동일시할 수 있는 그 서교동 2층집의 내부를 훑는다. 거기서 박동훈 감독은 3대에 걸친 인물들을 다시 등장시키는 영화적 환상을 동원한다. 아버지가 고치지 않은, 고장나버린 현관문을 통째로 수리하려고 마음먹는 태선은 과연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낼 수 있을까?

시대와 사람과의 접점에 대해 고민하는 신인감독 박동훈

<계몽영화> 포스터
 <계몽영화> 포스터
ⓒ 3767 Film

관련사진보기

캐릭터와 드라마의 힘을 지닌 <계몽영화>는 사실 독립영화란 분류가 무색해 보인다. 그 만큼 기술적인 면에서 일반 상업영화와 큰 차이점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신인감독 답지 않은 박동훈 감독의 연출력이 뒷받침 됐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럼에도 저예산으로 4계절을 모두 담아낸 촬영현장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촬영 감독은 같고 다만 2팀으로 진행했다. 1930년대는 수원 KBS 오픈세트에서, 1960년대는 부천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사실 시대극이라 고증도 많이 신경쓰고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썼지만, 예산이 적어 편법을 좀 썼다.(웃음) 처음 오프닝에 롱숏이나 몹씬 비슷하게 큰 화면으로 몇 컷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다 인물위주다.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이 전부다. 어쨌건 4계를 다 담으려고 했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스태프들도 스탠바이 하고 있다가 2~3달 후에 소집하며 다시 모여서 촬영하고. 그래서 건진 장면도 있다. 그 집 앞에서 문을 따는 장면인데 갑자기 눈이 내리게 돼서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이 살아나기도 했다."

계속해서 그는 <계몽영화>와 같이 시대와 사람과의 접점을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로 계몽하지 않고, 오히려 사유와 성찰, 질문을 던지려는 신인 박동훈 감독의 행보를 주목해 보자.

- 일본의 거장 오스 야스지로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영화 속 신문 기사로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고.
"특별히 참고로 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에 그의 전집 DVD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가족을 통해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와 사회나 시대가 보이게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 원래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일단 마이클 만을 꼽고 싶다. 그 감독이 작품에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최근작인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묵직하게 찍을 수도, 또 시대를 재현함에 있어 생생하게 찍을 수도 있구나 싶어서. 그리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최근 2부작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도 떠오른다."

- 차기작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차기작은 학송의 아버지 시대인 1930년대를 다루고 싶다. 거기서 상류층인 주인공이 연애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또 동경으로 유학도 가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 홍상수 감독 영화처럼 연애도 하면 재미있을 것 같고. 그렇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1930년대를 보여주고 싶다."


태그:#독립영화, #박동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