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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은 아니지만 띄엄띄엄, 시간이 되면 화제의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본다. 주인공 김탁구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고 역경을 하나씩 이겨낼 때마다 내가 더 기쁠 지경이다. 김탁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건 적건 올곧은 아버지와 장인정신 투철한 스승의 인정을 한 몸에 받은 그는 결코 흔들림이 없다. 정말 김탁구 같은 태도와 정신만 있으면 지옥에서라도 부활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김탁구와 대립각을 이루는 유약한 구마준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더욱 비뚤어지더니, 아버지와 스승의 인정을 받기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뭔가 이뤄낼 것 같다가도 매번 꼬이니, 몸부림칠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 현실이 드라마처럼 명쾌하면 얼마나 좋을까. 직업병은 못 속인다고, 김탁구와 구마준을 바라보면서 과연 저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게 개인의 천성 때문이고 그의 운명 탓인 걸까, 허튼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개인에게 구현되는 삶의 결과를 전적으로 그의 재능과 성격과 숙명으로 몰아붙이고, 멀찍이 떨어져 않아 하마평 하듯 바라보는 게 과연 옳은 자세일까, 한번 시작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엊그제 건장한 청년 하나가 보건실 문을 두드리더니, 성큼 들어섰다. 그 청년은 이내 환한 웃음을 보이더니 '선생님. 저 윤호(가명)예요' 하는 게 아닌가. 윤호가 먼저 자기가 윤호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키가 크긴 했지만 말라서 왜소하게 느껴졌던 윤호를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며 잠깐 보건실에서 쉬겠다고 왔는데, 침대에 눕히고 난 후 잠깐 지나고 나니 쩔쩔매듯 제대로 누워 있지 못했다. 화장실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아이를 잠깐 앉혀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윤호는 안타깝게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만 쏟아냈다. 지금 운동장에는 번쩍이는 오토바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자신을 잡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역의 힘깨나 쓴다는 조직이 자기를 미워하는데, 형의 친구인 중간 보스가 다행히 자신을 챙겨줘 조금은 괜찮다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선생님은 아무래도 일진이실 것 같아요'라더니, 어떻게 해야 힘을 기를 수 있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해댔다. 담임선생님께 여쭤보니, 왕따 등으로 힘겨운 생활을 거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었다.

 

이런 삽화가 진행되기를 몇 차례, 윤호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로는 윤호의 소식을 따로 들을 수 없었는데, 마침 수능 접수 기간이라서 학교에 온 김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2년여만의 조우였다. 찬찬히 살펴보니 웃으면 반달눈이 되는 눈매하며, 자기가 농담하고 먼저 수줍어하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1년여 치료를 받은 후 지금은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복지관 등에서 도와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공부하는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다며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활짝 웃는다.

 

당시에는 절망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윤호가 병원의 도움으로, 복지관의 지원으로, 믿고 지지해준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발판 삼아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교육하는 데 가정과 학교만이 교육의 공간이고 돌봄의 터전이 아니라 온 동네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구마준의 뒤틀림을 단지 비극적 출생의 운명 탓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의 어긋난 방황의 원인을 그의 가족사에 짐 지우고, 김탁구의 승승장구를 그의 착하고 우직한 성품 탓으로만 돌린다면, 구마준은 시대와 역사를 떠나 언제나 구마준이어야 하고, 김탁구는 늘 김탁구일 수밖에 없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온 윤호를 만나면서, 누군가의 삶을 그 개인의 숙명으로만 결론짓는 논리의 성급함과 우매함을 반성했다. 다른 이의 삶의 무게를 향하여, 돌봄 의식의 사명을 투사하며 잠잠히 행동하는 '마을 사람들이' 윤호가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길러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돌봄, #김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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