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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전인 1987년 7월. 거대 공업도시로 발돋움한 울산에서는 노동자들이 삶의 권리를 찾겠다며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전국으로 번진 노동자대투쟁의 시발점이다. 그해 노동자 대투쟁은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8월과 9월까지 이어졌다.

1987년 8월 1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인 4만 여명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진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 이 8.18 대행진은 87년 울산 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1987년 8월 1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인 4만 여명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진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 이 8.18 대행진은 87년 울산 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 제2민주노조운동혁신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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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발단은 6.10 시민항쟁에서 시작됐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군부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이 일어났다. 놀란 전두환 군사정권은 노태우 대선주자를 앞세워 6.29선언을 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6.29선언의 내용 중에는 노조 설립의 자유가 포함됐다.

그러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던 울산의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대투쟁의 불을 당겼고, 이후 전국 8990개 노조 200만 명이 동참하는 노동자대투쟁이 점화됐다. 이는 한국노동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노동자 대투쟁은 87년을 넘어 88년 89년까지 이어졌다. 이후 노동자들의 임금은 급격히 상승되고 노동환경은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 회사는 임금인상분을 만회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양상하기 시작했다.

87년 당시 대투쟁을 외치던 노동자들이 23년 후 '귀족노조' 혹은 '16년 무쟁의 모범 노조' 등으로 불리며 보수언론과 회사로부터 모범노조로 칭송을 듣고 있는 사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주축이던 노조가 임단협교섭권을 회사에 반납하는 등 노동운동의 새지평을 열고 있다는 칭송을 듣는 이면에 또 다른 87년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저 호황에도 분배 없자 대투쟁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는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라는 3저 호황을 맞는다. 국제수지가 흑자로 반전되고 GNP성장률이 높아지고 회사의 금고는 채워졌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형편은 예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3저 호황에 힘입어 조선, 자동차 등 울산의 주력업종은 급성장을 이루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고 안전 사고에 내몰렸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진보, 보수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문제였다.

노동자와 그 가족은 여전히 저임금에 따른 잔업, 야간노동, 휴일특근 등 장기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치솟는 물가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당시 현대자동차 조합원으로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했던 제2민주노조운동실천네트워크 하부영 대표는 "노동자들은 지속된 호황으로 성장을 배분받을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부의 노동정책은 그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없었다"며 "정부는 물리력에 의한 노동통제를 중심으로 내실 없는 복지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87년 박종철 추모식과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군사정권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임금인상 투쟁으로 이어졌다.

1987년 7월 5일, 현대그룹에 의해 금기시되던 노동조합이 그룹내 주력기업인 현대엔진에서 결성됐다. 노조결성의 열기는 울산지역 현대계열사 전체로 옮겨 붙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에서는 회사측의 어용노조 결성에 반대하며 민주노조 쟁취투쟁을 전개했고 이러한 현상은 현대 계열사에서 울산 전체로, 다시 전국으로 퍼졌다.

그해 7월 울산에서 시작된 투쟁은 인근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세신정밀, 국제상사 등의 대기업으로 점화되더니 8월 초에는 마산과 창원지역으로, 다시 대구, 구미, 광주, 전북, 나아가 수도권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8월 중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투쟁이 벌어졌다.

강원, 충청지역의 광산 노동자들은 파업과 함께 철도와 도로를 점거하는 가두투쟁을 벌였고 전국 사업장에 노조가 속속 새로 생겨났다.

1987년 8월 1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운동장에는 현대그룹 노동자 4만 여명이 모여 투쟁 결의를 다졌다. 4만여명의 노동자들은 수십 여대의 차량을 앞세워 울산시가지로 통하는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거리행진을 벌였다. 노동자대투쟁의 하이라이트다.

당시 참석자들에 따르면 현대그룹 노동자들은 18일 오전 11시 30분 2000명 단위로 15개 대열로 나뉘어 약 16킬로미터를 걸어 중구에 있는 울산 공설운동장에 이르렀다. 5시간의 행진이었다. 이날 노동자들의 열기는 회사는 물론 정부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음날인 8월 18일 거리투쟁에 참여한 현대그룹노동자(당시 현노협)는 다시 5만 여명으로 늘어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대투쟁을 벌였다.

보름뒤인 9월 3일 이들은 행진거리를 배로 늘여 울산시청까지 가두 행진을 벌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9월 4일 새벽 5시,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83명의 노조간부가 연행돼 일단 노동자대투쟁은 휴식기를 맞는다. 하지만 울산에서의 노동자 대투쟁은 이후 몇 년간 더 지속됐다.

노동자대투쟁은 우리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부영 대표는 "노동자들은 대투쟁을 통해서 생존권적 보장 요구와 함께 작업환경에서의 인간적 권리의 회복, 노사관계에서의 민주화를 요구했다"며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들의 권리 선언의 시작이자 계기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한 노동자들의 무권리에 대한 문제제기였으며 노동조합이 기업, 정부와 맞부딪치고 협상함으로써 노동정치의 가능성이 발견된 공간이었다"고 평했다.

울산에서 촉발된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결국 전국·전산업에 걸친 총파업 투쟁으로 번졌고, 이 투쟁이 노동자의 자발적 투쟁이었다는 점과 현대그룹계열 노동자의 연대투쟁의 시초라는 점에서 이후 노동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임금은 해마다 대폭 늘었고, 그와는 반대로 대투쟁의 열기는 차츰 시들어졌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는 하청,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또다른 억눌린 노동자들이 연이어 양산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대투쟁의 근원지이던 현대중공업노조가 지난 2004년 하청노동자들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으로부터 제명당하고, 2010년에는 16년 연속 무쟁의노조로서 회사와 보수진영의 칭송을 듣는 것은 23년의 세월이 그만큼 길었다는 것일까.

하지만 올해 노동계가 "노조를 말살하려 한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타임오프제도(근로시간면제)를 현대중공업 노조가 모범적으로 앞장서 받아들였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기업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등한시 하는 것에 대해 일부에서 비난 여론도 적지 않다. 이는 삶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과 의리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런 반면에 당시 대투쟁에 참여했고, 현재 여전히 현대자동차 정규직으로 남아 있는 일부 조합원들 사이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이들을 돕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어 주목받는다.

그 단체의 하나인 제2민주노조운동 하부영 대표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며 "여전히 87년 이전 노예노동 상태로의 회귀를 꿈꾸는 정권과 자본이 존재하는 한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의 이념적 토대는 87년 대투쟁 당시 만들어 진 것"이라며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이 23년을 지나며 여러 한계에 봉착한 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극복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제2민주노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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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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