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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003년 성미산 싸움' 이야기인가? 지금 성미산은 커다란 위기에 있다. 홍익재단이 성미산의 가장 아름다운 남사면 숲을 훼손하고 그 자리에 홍대 안에 있는 홍익초중고를 이전시키겠다며 학교건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미산 주민들은 서울시가 홍익재단에 대체부지를 마련해주어 교육권을 보장하고, 성미산은 서울시민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하며 두 달이 넘도록 성미산지키기 비상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자기 계발하며 살기에도 너무 바쁜 서울 도심에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2003년 성미산 싸움의 승리'에 대한 자부심과 그 자부심을 이어서 아름다운 성미산을 후대에 전해주고 싶은 나름의 사명감이다. 2003년 성미산 싸움을 경험한 필자가 당시를 회상하며 기록한 이 글은 홍익재단에게 '불의와 불법 단체'라는 딱지를 받고 있지만, 환경단체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서울 도심에서 생태와 대안적 삶을 실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찬사를 받는 성미산마을공동체와 그들의 2010년 성미산지키기 비상행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자의 말>

일방적인 주민설명회를 세 차례 무산시키다

산을 지키는 일이 이렇듯 항상 부드럽고 감동적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2002년 1월 어느 날 상수도사업본부는 갑자기 주민설명회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주민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성미산 생태 보전의 필요성과 친환경적 배수 시설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제출했는데도 그에 대해선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당초 그들이 수립한 계획을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겠다는 것이다.

뭔가를 보여 줘야만 했다. 우리 주민 50여 명이 설명회장으로 몰려갔다. 주민설명회라는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관계 공무원 빼면 내용도 모른 채 동원된 '알바' 주민 몇이 다였다. 우리는 설명회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그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설명회는 무산되었다. 그들도 그제야 '장난 아니네' 싶은 것 같았다. 이런 식의 일방적인 설명회는 그 후로도 시도되었다. 어떻게든 요식 행위를 거쳐 배수지 설치를 밀어붙이겠다는 것이었다. 성미산 단짝 친구 성지연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친 우리는 2002년 7월과 10월 두 차례 더 시도된 설명회를 간단히 무산시켰다.

지방선거에 주민후보를 내다

2002년 월드컵 광풍에 앞서 마을에는 지방 선거 바람이 불었다. 주민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구청이다 시청이다 백방으로 뛰어도 상수도사업본부는 꿈쩍 않고 계획대로 밀어붙일 기세였다.

언론도 우리 문제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원, 구의원, 시의원 누구 하나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참으로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주민 편에 선 구의원 하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이참에 아예 선거에 나가자!'

출마자를 물색했다. 자천타천으로 세 사람이 거명되었다. 서교동 대표로는 조윤석이 나섰다. 그는 홍대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인디밴드로서 '짬뽕'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황신혜밴드'의 베이스 겸 보컬을 맡고 있었으며, 홍대 앞에서 희망시장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연남동 대표로는 이현찬 할아버지가 출마했다.

성미산 체조회 회장으로 성지연 결성 초기부터 참여했고, 성지연 공동대표로 동네 어르신들을 비롯하여 지역 토착민들의 여론을 결집하는데 각별한 역할을 해 오신 분이다. 성산동 대표로는 우리어린이집 조합원인 권범 아빠 김종호가 나섰다. 왕년에 학생운동을 해서 남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한데다 이현찬 할아버지와 함께 성지연 공동대표로서 성미산 지키기에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활동해 왔다.

우리는 이제 신나게 선거운동을 했다. 주민 모두가 선거 운동원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면 어린이집 식구들이 조를 짜서, 성미산 관련 전단과 선거 유인물을 지역민들에게 나눠 주며 우리 손으로 이 사람을 꼭 뽑아 성미산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휴일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각기 맡은 동네마다 열댓 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자전거에 소형 스피커를 매달고, 아이들이 월드컵 응원가를 개사한 노래를 불러 녹음한 선거 로고송을 틀고 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다.

"발로 차~ 배수지! 발로 차~ 아파트!"

결과는 모조리 낙선. 하지만 선전이었다. 한나라당 소속 출마자들이 싹쓸이 당선된 그때 분위기에서 무소속으로 나와 2등으로 낙선했으니. 더구나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 출마자를 모두 눌렀으니 말이다. 졌지만 아쉬울 게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당선되면 물론 좋았겠지만 선거 운동도 원없이 했고, 그 덕에 성미산의 위기를 지역은 물론 지역 밖에 널리,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구청이나 시에서도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함부로 무시못할 정도로 '저기 막강한 표밭이 있구나'하는 눈치였다.

서울시, 공사강행 수순 시작하다

성미산 개발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시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 <대책위가 구성된 후 시청 앞 시위> 성미산 개발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시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 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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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와 월드컵이라는 소강상태가 지나자 상수도사업본부 측은 △ 10월 10일, 조달청을 통해 성미산 배수지 건설 공사 발주 △ 두 달 후 12월 5일, 발주처가 정해지고 공사 계약이 체결, △ 12월 12일, 바로 공사를 착공이라는 공사 강행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우리도 단단히 마음먹고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조직을 새로이 짰다. 이듬해 2003년 1월 8월, 마을 어린이집, 생협, 지역 종교 단체와 산악회 등 지역 주민 동아리들이 참여한 성지연에 성서 초등학교 운영위원회,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정의시민연대, 마포자치연대, 개혁국민정당 마포지역위원회, 민주노동당 마포을지구당, 전국공무원노조 마포지부 등 시민 사회단체가 대거 합류하여 '성미산 개발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른바 '선수'들이 합류한 것이다. 든든했다. 성미산 주변에는 뭔가 일전을 불사하는 전운이 감돌았으며, 일촉즉발의 긴장이 쌓이고 있었다.

성미산 나무가 베어지다

성미산 나무가 벌목당했다.
▲ 1월29일 영하10도의 추운날 기습 벌목을 당한 성미산 성미산 나무가 벌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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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다. 2002년 말엽부터 온몸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듯 야릇하고 꺼림칙한 기운이, 곧 터질 듯 팽만해지는 풍선 지켜보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성미산 자락에 계속 뭉글뭉글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비겁했다. 아니 조급한 것이었으리라.

그들은 1월 29일 설밑을 택했다. 그것도 무척 추운 날 아침, 등산객의 발길도 뜸해진 틈을 노렸다. 주민들이 대체로 출근을 마쳤을 아침 9시경이었다. 공사업체인 효림종합건설이 동원한 인부 30여 명이 전기톱을 들고, 성미산 정상부 6000여 평을 메우고 있던 30년 넘는 나무 2400여 그루를 단숨에 베어 냈다. 날카로운 전기톱의 굉음에 놀란 주민이 혹시 싶어 날린 긴급 호출에 인근 주민 30여 명이 달려가 보니, 10~20미터가 넘는 큰 나무들이 마구 잘린 채 산등성에 어지러이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인부들은 잘린 나무 위를 넘나들며 그들을 토막 내 가져가려고 힘없이 널부러진 나무 위로 다시 날카로운 톱을 들이대고 있었다. 경비 용역업체인 백송산업개발 직원들은 달려온 주민의 접근을 막아섰고, 마포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나와 벌목 현장을 지고 있었다.

서둘러 퇴근 한 후 뒤늦게 산에 올라가보니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주민들이 경비 용역업체 직원들의 저지를 뚫고 산에 올라가 톱질하던 인부들이 쓰러진 나무를 더는 토막 내지 못하도록 막아냈고, 업체 측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작업을 중단하고 내려가고 없었다. 벌목된 현장은 정말이지 참담했다. 산 전체가 날카로운 칼에 함부로 난자당한 모습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들 제 가슴이 칼에 베인 기분이었다.

모여든 주민들은 그 길로 시청으로 내처 달려갔다. 서울시 측은 시청 정문과 후문을 모두 막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해 겨울 가장 추웠던 1월 29일, 잘린 나무로 인해 더더욱 마음이 아리고 시렸던 그날,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들은 추운 바람을 맞으며 시청 밖에 내몰린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서울시 측은 '성미산 대책위' 대표 5명을 충정로에 있는 상수도사업본부로 가라며 문전 박대했다.

성미산마을 최초의 '마을 주민총회'가 열리다

미스코리아 완장차고 기념사진 찰칵!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성미산 농성단장 김경훈-용빈아빠 미스코리아 완장차고 기념사진 찰칵!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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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마을회관이나 마찬가지인 '꿈터'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날은 모두 40여 명이 모였는데, 아마 이것이 성미산 지역에서 최초로 열린 '마을 회의'가 아닌가 싶다. 두 시간 넘게 열띤 이야기가 오갔다.

 "이건 우리 안방을 치고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
 "당장 내일부터 무조건 24시간 산을 지켜야 한다."
 "설 연휴고 뭐고 반납하고 산에서 우리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자."

'무기한 철야농성', '성미산 24시간 상주', '연휴 반납, 합동 차례'가 결의되었다. 밤 시간대는 아빠들이 3명씩 조를 짜서 지키기로 했다. 근 후 저녁 먹고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아빠들로 편성된 철야조가 번을 서고, 그 후부터 오전 10시경까지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리고 그 이후는 동네에 상주하는 엄마들과 자영업을 하거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맡기로 했다.

기습 벌목이 있은 다음 날부터 주민들이 교대로 24시간 상주하며 산을 지키기로는 했으나, 상주 지킴이 체제가 원활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지휘자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종호 대책위원장과 역할을 나누어 성미산을 불철주야 지킬 대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어린이집에 다니는 5살배기 용빈이 아빠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동대문에 있는 가게에서 저녁 장사를 해서 철야 시간을 제외하고는 산에서 근무할 수 있다고 했다. 다들 좀 미안하고 안쓰러웠지만 반갑게 박수로써 농성 대장의 칭호를 부여했다.

 설날을 이틀 앞두고 벌어진 벌목때문에 주민들은 고향가기를 중단하고 산에 모여서 산제와 차례를 지냈다.
▲ 성미산 산제와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 설날을 이틀 앞두고 벌어진 벌목때문에 주민들은 고향가기를 중단하고 산에 모여서 산제와 차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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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아침에 귀향을 포기한 많은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랐다. 마을 회의에서 결의한 대로 귀향을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산에 올라 합동으로 차례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합동 차례를 기점으로 우리는 바로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언제 상수도사업본부가 다시 공사를 강행할 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시청도 세 차례나 계속 항의 방문했고 기자 회견도 열고 상수도 사업본부도 방문하는 등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미산에 잘린 나무를 가지고 투쟁기금을 마련하는 방안도 찾아보기로 하였다. 당시 아이들을 위한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던 짱아는 동네 솜씨 있는 엄마들을 틈틈이 불러들여 나무목걸이 만들기를 했다. 우선 '죽임'을 당한 나무들에서 적당한 굵기의 가지를 잘라내는 일은 아이들과 함께 하고, 나뭇가지들을 얇게 토막 내는 일은 아빠들에게 부탁했다.

그 얇고 둥근 나무토막에 각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 넣으니, 각양각색의 예쁜 목걸이들로 재탄생했다. 아이들이 그린 목걸이 작품들도 다 가지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요즘은 그런 모양의 나무 목걸이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당시는 아주 신선한 아이템이라 인기가 좋았다. 덕분에 총 400여만 원이라는 판매 실적을 올려 대책위에 전달하게 된다.

[이전 기사] 가수 강산에 등장에 '우린 외롭지 않아'


태그:#성미산, #짱가, #성미산지키기, #2003 성미산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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