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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면 토끼 한 마리가 뒤뜰로 내려와 방울토마토 여린 순만 골라서 뜯어 먹습니다. 봄에는 상치를 야금야금 뜯어 먹더니 며칠 후 상치 밭을 아주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얼마 후에는 질경이를 또 다음 날에는 미나리를 먹었던 토끼의 이빨은 아주 셉니다. 노랗게 점잖게 낮은 자리에 앉아 열매를 기다리던 오이꽃과 호박꽃들을 다 죽였으니까요. 쭉 쭉 뻗어가던 그 넝쿨들이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토끼 짓이었습니다.

 

올 여름엔 겨우 매달아 놓은 단 호박 하나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이와 호박 보다 더 서운한 것은 조롱박입니다. 지난해 멀리 뉴욕에서 보내주신 씨앗을 심어 거둔 몇 안 되는 씨앗이었습니다. 잘 키워서 올해는 나도 더 많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지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예쁜 조롱박 딱 두 개를 거두어 박을 타고 씨앗을 긁어내고 잘 말려서 쌀독에 쌀바가지로 쓰고 있습니다.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이 손에 잡힐 때 마다 좋아 정말 쌀바가지로는 딱이다 싶습니다. 동생네 하나 주고 또 하나는 원하시는 분이 있어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보냈습니다.

 

고향을 멀리 두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신 이웃 분들에게 선물해 고향 냄새를 물씬 안겨주고 싶어서 내심 올해는 주렁주렁 열려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놈의 토끼가 박 줄기를 다 끊어 놓았습니다. 그 때는 저도 화가 나려고 했습니다. 여름밤 흰 박꽃에 눈을 줄 소박한 나만의 시간까지 빼앗아간 그 놈의 토끼가 미워지려고도 했습니다.

 

그 토끼는 한 마리가 아닙니다. 내려오는 모양새와 크기가 다 다른 것을 보아 아빠토끼, 엄마토끼, 할머니 토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린 토끼가 내려와서 밥을 먹고 갈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매우 즐거워합니다.

 

"또, 밥 먹으러 왔네."

 

아이들은 신기하고 대견한 듯 바라보며 좋아하지만 엄마는 조금 다릅니다. 저녁을 드시다가도 얼른 뛰어나가 쫓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자리만 조금 옮겨 미동도 하지 않고 귀만 바짝 세울 뿐 하나도 겁을 내지 않습니다.

 

"아니, 요놈의 토끼들이..."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도시화의 영향인지 내 집 뒤뜰에도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가까이에서 봅니다. 그 많던 다람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청살모들이 올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토끼들이 설칩니다.

 

엄마는 뻔뻔한 녀석들에게 처음엔 아주 화가 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허리 아프게 심어 가꾸고 아침저녁 물 주던 엄마의 놀이터인데 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토끼와의 전쟁은 우리 집만 벌이고 있는 건 아니어서 어느 집에서는 공기총을 사서 토끼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 남편은 공기총 하나 사주면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갑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흥분을 하고 아이들은 그러면 안 된다며 울타리를 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꽃 까지 똑똑 분질러 먹는 토끼들의 기세에 눌리셨는지 이제 아주 포기한 모양입니다. 토끼가 또 밥을 먹으러 왔습니다. 또 온 것이 아니라 이젠 아주 끼니때마다 내려옵니다. 나팔꽃 덩굴과 그리고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흰 국화 봉오리까지 잘라 먹는데도 엄마는 "오늘 내려온 토끼는 엉덩이가 하얗더라." 하시고는 그만입니다.

 

결국 요것조것 푸성귀들과 채소가 심겨 있던 우리 집 텃밭은 향이 짙은 쑥과 부추와 깻잎, 그리고 민트만 남고 다 망하였습니다. 그러하여도 괜찮습니다. 토끼들이 맛있게 먹었으니까요.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다행하게도 구멍 난 나뭇잎들이 예쁘게 보일 때 이 시를 만나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 손만큼 구멍 난 나뭇잎이 또 있을까요. 악다구니 쓰지 않고 토끼들까지 먹이는  우리 엄마가 나는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엄마, #토끼,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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