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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엄숙하고 딱딱한 분위기의 투표장에 웃음꽃이 피었다. 미리 알아서 거소투표 신청을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기를 놓친 아들의 잘못이다.

 

하긴 거소투표 제도를 미리 알았다 해도 나는 아마 그 제도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투표장에 직접 나가서 어머니 당신 걸음으로 기표소를 들어갔다가 나올 때의 보람을 아들이 임의로 박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아침 일찍 머리를 감고 고운 옷을 차려입고 얼굴에 화장까지 하시던 어머니였다. 마을의 엄마들이 대부분 다 그랬다. 다들 그렇게 화장을 하고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어디 무슨 결혼식장에라도 가듯이 한꺼번에 길을 나섰다. 투표소가 3km 가까이나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선거는 일종의 여행이요 잔치이기도 했다.

 

지난 번 선거 때만 해도 어머니는 혼자서 잘 하셨다. 치매라는 몹쓸 것에게 기억을 대부분 빼앗겼다 해도 선거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며칠 전 선거 공보물이 와서 보여주며 이런저런 설명을 했을 때 어머니는 "이잉, 그려어" 하셨고, 아침에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도 어머니는 "선거네. 오늘인가?"하셨다. 그 정도의 의식이면 무효표는 안 만들 것 같았다.

 

투표소는 2km 정도 떨어진 복지회관 1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침 늦게 어머니의 머리를 감기고 아침을 먹고 양말을 신기고 2인승 미니밴을 몰고 복지회관 근처에 도착했는데 앞마당은 이미 자동차가 빼곡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람은 별로 안 보이는데 자동차가 많은 까닭이 뭘까, 의아했지만 나중에 선거종사원들의 차량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멀리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투표소까지 걸어가는 데 이십여 분이 걸렸다. 어머니의 걸음이 워낙 더딘 까닭이었다. 그런데다 어머니는 또 지나치는 사람마다 누구냐고 묻고 있었고, 걸음을 멈춘 채로 좌우를 둘러보며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를 열 번도 넘게 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구제역 예방 차원에서 준비한 발판이 깔려 있었다. 안내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발판을 반드시 밟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어머니는 선거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인자 다 왔는갑다. 여가 식당이제? 여기다 신을 벗어야 하는가?"

 

구제역 예방 차원에서 깔아놓은 소독판 위에서 어머니는 신발을 벗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결혼식장 같은 데라도 온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신발은 신고 가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봐도 어머니는 막무가네였다. 겨우 어떻게 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의 세상은 그새 또 바뀌어 있었다.

 

"아따 오랜만에 보겄다, 야. 어디 갔다가 인제 왔다냐?"

 

선거 안내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 젊은 남자의 손을 덥석 붙잡고 깜짝 반가운 목소리를 내는 어머니, 뒤를 따르던 나조차도 깜빡 속을 뻔했다. 남자는 어이가 없어서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에 보이는 모든 남자들이 아들이거나 사위거나 친척 중의 누군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여자들은 딸이거나 며느리거나 친척 중의 누군가로 비쳐지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사람들은 더러 안타까운 미소를 띠기도 하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은 어머 별꼴이야, 뭐 이래, 하는 눈치로 슬슬 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선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해서 선거종사원을 붙잡고 사정을 설명하고 어머니와 함께 기표소를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보았다. 그러자 종사원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펄쩍 뛰었다.

 

"보시다시피 어머니의 상황이 저러하니 백 퍼센트 무효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효표가 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선거법 위반이에요. 그 어떤 장애인도 기표소에 보호자가 동반할 수는 없어요."

 

법이란 인간의 편익을 도모하자고 만든 것인데 무효가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법을 지킨다면 그게 오히려 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는 등 별별 말로 사정을 해봐야 별무소득이었다. 하긴 현장 종사원들에게는 실정법이 중요하지 법의 정신 같은 것이 중요할 이유는 없을 터이었다.

 

"기표소 위치 하나를 지정해서 커튼을 열어드리는 것까지는 허용됩니다."

 

아 참, 야박하다, 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와르르 무너지는 심사로 기표소 하나의 커튼을 열고 어머니를 들어가시라고 한 다음 기표소 옆에 멀뚱히 선 채로 기다리는데 1분이 지나고 3분, 오 분여가 지나도 어머니는 나오실 줄을 모른다. 엄마, 하고 큰소리로 불러도 대답이 없고, 해서 얼결에 커튼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데 "아, 안 됩니다" 소리와 함께 종사원이 다가선다.

 

종사원이 커튼을 빠꼼히 열고 들여다보더니 하나밖에 안 찍었다고, 4장 다 찍어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고도 4, 5분이나 지나서야 어머니가 나오시는데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다. 투표용지를 가지고 나오셔야 한다고 종사원이 옆에서 일러주고, 그제야 어머니는 다시 돌아서서 찍은 것을 가지고 나오시는데 얼핏 보니 하나도 유효표는 없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맨 위에 그것도 칸 밖으로 두 개씩 혹은 세 개씩 동그라미가 찍혀 있다. 두 번째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어머니의 투표는 진행되었고, 거의 같은 방식으로 무효표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투표소를 나오는데 어머니는 그제야 비로소 선거라는 의식이 올곧게 돌아왔던 것인지 이제 막 들어서는 사람을 쳐다보며 "저 사람들도 선거하러 오는갑다"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어찌나 아릿아릿하게 가슴을 후벼파던지, 대상을 알 수도 없는 누군가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자꾸 원망스러워지고 있었다. 속이 상해서 한참이나 딴짓을 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뭔가가 자꾸 억울하다.

 

비밀선거, 참 좋은 제도이기는 하다. 개인의 사생활을, 투표행위 하나조차도 국가적 차원에서 그 비밀을 지켜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그것도 아들에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제도가 완전무결한 것인가? 그렇게도 빈틈이 없이 완벽한 것인가?


태그:#치매, #선거, #무효표, #비밀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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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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