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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3월14일 부산의 모 신경정신과에서 노인성 치매 진단을 받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오던 큰 누님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예상한 일이지만, 동생 전화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어제(30일)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보신탕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시원한 소주 첫 잔을 비우고 잔을 건네려다 전화를 받았다. 황망해서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해서 후배들에게 전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은 형님 내외, 셋째 누님과 함께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부산에 가겠다며 함께 가려면 형님댁에서 만나자고 했다. 식당에서 형님댁까지는 꽤 먼 거리여서 택시를 타려다 안정을 찾으려고 걷기로 했다.

 

허전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터벅터벅 걷는데, 병원에서 근무 중인 아내가 생각나 전화를 했더니, 출상하는 날(6월1일)이 쉬는 날이라며 31일 근무 끝나고 함께 가자고 했다. 아내와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동생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전화해주고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온갖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일주일 전(23일) 일요일에 형님과 셋째 누님, 동생과 함께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링거 주삿바늘과 위세척 호스를 코에 꽂고 침대에 누워있는 큰 누님은 예상대로 말을 못했다. 틀려도 좋으니까 따라서 해보라고 해도 입술과 목 근육만 움직일 뿐이었다. 얼마나 답답할까? 엉엉 울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셋째 누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큰 누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형님과 셋째 누님이 밖으로 나간 사이에 나도 큰 누님 손을 잡아보았다.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슬픔이 밀려왔다. 만지고 또 만지고,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누님 손목은 그래도 온기가 감돌았다. 형제요, 피붙이여서인지 누님 손목은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에도 보리목을 태우는 등겨불처럼 따뜻했었다.

 

간호사에게 누님 병세에 대해 설명을 듣고 1시간쯤 있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덕진 로터리에 있는 냉면 집에 들어가 왕갈비탕에 왕만두를 안주로 소주 두 병을 마시고 부산에서 출발했었다.

 

버스가 성산면 사무소와 서포를 지나 시골길로 접어드니까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산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2년 전 신경정신과에 입원하던 날 원장이 했던 "기적이 일어나면 몰라도, 현재 상태가 더욱 악화되지 않으면 다행이다"는 말도 떠올랐다.

 

2년 전 봄날 함께 내과 진료를 받고 오면서 "너랑 함께 돌아댕깅게 얼마나 존지 모르겄다!"며 만족해하던 누님, 부산 UN군 묘지 공원길을 걷다가 검은 돌에 음각으로 새겨진 '정숙'을 보고는 "하이고, 누가 저기다가 내 이름을 적어놨다냐!"라며 놀라던 얼굴이 캄캄한 유리창에 그려졌다. 

 

누님은 처음 입원할 때만 해도 퇴행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었다. 어쩌다 면회를 가면 "왜 혼자 왔냐!"며 반가워했고, 쟁반자장을 먹고는 "네 덕에 별것 다 먹어봤다!"고 하는가 하면 김밥이 맛없다고 짜증을 낼 정도의 판단력도 있었다.

 

그런데 몇 개월 차이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반가워하던 나를 몰라봤고, 눈에 보이는 것이면 아무거나 집어서 입에 넣으려고 하는 등 기이한 행동과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의 정도가 높아졌다. 거기에 자해 위험까지 높아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왔다.

 

사리에 밝고 판단력이 뛰어났던 큰 누님이 동생도 몰라보는 병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 곁을 홀연히 떠나갔다.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2008년 내 생일에 평택에서 쑥개떡을 쪄가지고 내려온 막내 누님 내외와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부산 앞바다와 해송과 동백나무가 우거져 맑고 시원한 동백정 산책로를 걷던 일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는데 망해산 넘어 하늘에는 별이 하나 둘 떠있고 길가 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별들이 다른 날보다 외롭게 보이고, 개구리들도 어제보다 더 슬프게 울어대는 것 같았다.

 

오늘(31일)도 아침을 먹는데 누님의 다양한 표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아내는 12시가 넘어 출근하면서 퇴근 시간에 맞춰 부산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해서 그 시간에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늘은 면사무소 강당으로 장구 배우러 가는 날이기도 하다. 지난달 초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아내가 11시쯤 퇴근하니까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나 갈 마음이 없다. 보이지 않는 곳이지만 '얼쑤!', '지화자', '쿵 더쿵, 따닥' 소리를 듣기조차 민망하기 때문이다.

 

하긴 큰 누님이 좋아하던 소리이니 망자의 한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힘차게 두들겨보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승천을 기다리는 큰 누님은 내일 새벽에나 부산에서 뵐 수 있을 것 같다.

 

"누님! 하늘나라에서 영생하세요. 부산에서 뵙겠습니다."


태그:#큰누님, #노인성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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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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