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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모자를 쓴 배우 윤제문이 잘 보이는 곳에 그림을 올려놓고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조명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객석의 관객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무대 위 배우들은 이미 난리가 났다.

"우와. 올리버. 이걸 진짜 니가 그렸단 말야?"

지난 5일부터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광부화가들>은 1930년대 영국 북부 탄광촌인 애싱턴의 평범한 광부들이 우연히 받은 미술 수업을 통해 화가로 성공한 실화를 다루고 있다. 권해효, 문소리, 윤제문, 김승욱, 이대연 등의 배우들이 각각 미술교수와 예술품 수집가, 그림에 빠져드는 광부역을 맡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는 극의 내용과 배우들의 연기도 흥미롭지만 극중 세계적인 명화들과 주인공인 광부들의 그림들도 100여 점 이상 영상으로 소개된다는 것이 이 공연의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들도 재치와 유머가 넘친다. 특히 그림과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따로 챙겨볼 만하다. 

연극 <광부화가들>
 연극 <광부화가들>
ⓒ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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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알게 된 광부들의 '성장드라마'

극의 배경은 1934년 영국 북부 애싱턴의 탄광촌. 한 달에 우리 돈으로 25만 원을 받으며 하루 10시간씩 갱을 기어다니는 몇몇 광부들은 노동조합에서 주선하는 미술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미술교육을 하러 온 대학 강사 라이언(권해효 역)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명화들을 보여주다가 이들이 평생 그림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그럼 정말 그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평생?"
"없습니다. 여긴 도서관도 없고, 우린 다 초등학교도 안 나왔어요."

'그림에서 의미를 찾는 법을 알려달라'는 광부들의 요구에 라이언은 "그림의 의미는 그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광부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 여러분. 보세요. 이 초록색을 보고 뭘 느끼십니까? 뭐가 느껴지죠?"
"초록을 보고 느끼긴 뭘 느껴요. 초록은 그냥 초록이지."

라이언은 광부들에게 미술을 이해시키기 위해 직접 판화 작업을 하고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려보도록 유도한다. 광부들의 일상과 탄광촌 특유의 분위기를 담은 직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이들의 그림은 곧 유명해진다.

극중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애싱턴 광부들의 작품들은 영국의 주요한 모더니즘 수집가들에게 팔렸고, 이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며, 평단과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 광부화가들의 공동체는 1980년대 중반까지 긴 호흡으로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연극 <광부화가들>의 한 장면
 연극 <광부화가들>의 한 장면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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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

'광부'와 '화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직업들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욱 열악했던 1930년대 영국 탄광촌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광부들의 그림 그리기가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빛을 발한 것을 보면, 이 두 가지 일 사이에 있는 간극은 사실 그다지 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이야. 이렇게 '내 것'을 만들어낸 게. 그림 그리는 몇 시간 동안은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10살 때부터 갱에 들어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광부 올리버 킬번(윤제문 역)이 중얼거리는 독백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행복감이 묻어난다. 그의 인생은 그림이 만들어 준 한 편의 성장드라마였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광부와 촉망받는 예술가의 길을 병행했으며 광부화가들의 공동체가 와해되기 전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 연극은 실화의 힘을 빌려 공연 내내 은근한 어조로 '문화를 경험할 기회'와 그 문화가 낳는 '예술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원작자 리 홀은 <광부화가들>을 소개하는 글에서 "애싱턴의 광부들이 독자적으로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예술적 가치를) 성취해낸 것을 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문화의 전제조건이란 '문화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적당한 문화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문화는 예술을 낳고, 예술은 사람들을, 주변 환경을 폭넓게 변화시킨다.

"여기다 미술 아카데미 만드는 거야. 애싱턴 대학교도 세우는 거야. 여기서 광부 시인도 나오고 광부 화가도 나오고, 광부 교수도 나오고, 다 나오는 거야."
"그래. 사람을 위한 예술! 모든 이를 위한 예술을!!"

전쟁이 끝나고 작업실에 다시 모인 광부들의 마지막 대사다. 애싱턴 대학교도 미술 아카데미도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들은 우드혼 탄광 박물관 안에 이들이 세운 미술관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다.

지방 탄광촌에서 예술로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간 보통 사람들의 얘기를 담은 이 작품은 대부분의 문화·예술 기반 시설이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우리의 척박한 현실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한국에서는 언제쯤 '광부 화가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연극 <광부화가들>이 반가우면서도 부러운 이유다.


태그:#광부화가들, #윤제문, #권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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