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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것이니 기억하고 또 챙겨주면 좋겠다는 말을 결혼하고서부터 들어왔다. 20년이나 계속 된 아내의 청이다. 평생 한 번 돌아오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조차도 지키지 못할 위인인지라 기대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서부터 신경이 쓰이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생일이 소중한 날인 것만은 분명하다. 더욱 지금의 삶에 감사하면서 살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께 감사하고 또 나와 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맙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자정 가까이 돼서 귀가하는 고1 딸애의 말이 아니었다면 무덤덤하게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친구들 세 명이 함께 타고 있을 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이가 운전을 하는 아빠와 단 둘이 되어서야 말을 건넸다.

 

"아빠, 오늘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요?"

"응."

 

아내는 어제(4월 20일) 1박2일 일정으로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지금 집을 배우고 있다. 아이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나 나름의 상념에 마음을 뺐기고 있었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오늘 엄마 생일인 것 아시죠?"

"어, 그렇지!"

 

며칠 전까지 수첩에 빨강 색으로 동그라미 표시까지 해두었었는데,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오늘 행동이 수상쩍은 데가 있었던 것 같다. 아직 휴대폰이 없는 아내가 누구의 것인지 빌려 문자 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어제 오후 3시 반이 조금 넘어서였다.

 

"지금 나는 당신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 박성숙 마누라"

 

이름 뒤에 '마누라'라는 호칭을 스스로 붙인 것도 우습지만, 50줄에 다다른 여자가 이름 앞에 하트 모양을 넣은 것에서 그의 애쓴 흔적을 읽을 수 있어서 감정이 묘했다. 가끔 나의 휴대폰을 빌려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을 보노라면 몇 단어 입력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 상상을 초월한다. 하물며 글자가 아닌 하트 모양의 특수 문자를 찾아 넣는 것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책을 보다가 그 메시지를 받은 나는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쉽게 생각했다. 아마 세미나 시간에 짬을 내어 남편에게 문자 보내는 숙제가 주어진 것인지로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메시지를 일부러 나에게 보낼 아내가 아니지.

 

밤 10시 쯤 인천에 사는 아는 목사님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막내 아이가 나의 휴대폰을 갖다 주며 엄마 전화라고 했다. 지금 목사님과 통화 중이니 급한 일 아니면 끊자고 했는데도, 그런 일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나? 저렇게 미적대는 태도는 아내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이다.

 

아내는 부부 간에도 차려야 할 예의가 있다며 아직도 남편인 나를 가끔 어렵게 대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답답하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원칙과 격식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어제가 자기의 생일이고, 남편이 깜박하고 있다면 생일이니 인사 한 마디 해 달라고 하면 오죽 좋으련만 그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아내는 생일 날 나에게 장미 한 다발 받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함께 들었던 후배가 그 이듬해 나를 대신해서 장미꽃을 선물할 정도로 나의 감정엔 물기가 없었다. 생일 날 아내가 장미꽃을 말한 것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마음의 대용물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아내는 아직도 여인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덕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사람이다. 그것이 모난 성격을 가진 남편과의 삶에서도 작은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요소였음을 나는 잘 안다. 그만큼 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나 중심의 사람이다.

 

어제 밤, 딸아이가 건넨 한 마디 말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아내의 생일을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잊고 있는 것이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고 해서 멀리 세미나에 참가하고 있는 아내에게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늘 둘러 대듯이 그냥 마음 속으로만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갑자기 오늘 오후에 귀가할 아내를 위하여 한 세리머니(ceremony)를 준비하고 싶어진다. 평소 갖는 나의 마음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진다.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그런 간단한 의식이, 부족한 남편과 20년을 한결같이 살아준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깜박 잊고 지나친 그의 생일을 다시 찾아 주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수줍음으로 보낸 문자 메시지의 중간에 애써 넣은 하트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늘 함께 있다. 가끔 수련회다 세미나다 해서 하루 이틀 떨어져 있을 때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런 일에도 가급적 함께 참석하려고 한다. 이틀 만에 만나게 되는 그에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러머니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현관을 들어서는 아내에게 진한 포옹을 해주고 싶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애정을 표현하고 싶다. 그것으로도 나의 사랑을 충분히 읽어 줄 아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오후가 몹시 기다려진다. 평소 나답지 않게.


#생일#문자 메시지#축하 세러머니#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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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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