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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 동료선생님들과 함께 모처럼 짬을 내 인근의 '진달래 동산'엘 다녀왔다. 3월 개학이후 줄곧 담당업무와 교재연구로 정신이 없었고, 휴일에까지 출근해야 할 정도로 바빴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지내는 동안 아쉽게도 벌써 진달래가 끝물이었다. 언제 왔는지 모를 봄이 금세 떠나버릴 것 같은 아쉬움에 업무 핑계대면서 짬을 못 냈던 나의 게으름을 탓해 본다.

 

 겨울 빛이 아직 가시지 않은 산에서 가끔씩 진달래의 연한 분홍빛을 만나는 마음이 애틋함이라면, 진달래가 뒤덮은 동산 속을 거닐어 보는 기분이란 벅찰 정도의 설렘과 행복이라 할 만하다. 화사한 봄기운이 내 몸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내가 동산에서 진달래 향기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우리 학교의 많은 아이들은 아직도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방과후 수업을 듣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방과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올해 들어 교육청의 지속적인 채근에 각 단위학교들이 실적 올리기에 나서면서 비교과만이 아닌 교과수업반을 대폭 신설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내신반' 또는 '선행학습반' 주요과목이라 일컬어지는 영어, 수학, 국어, 과학, 사회 등을 학교 교사들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신 성적을 내는 학교 정규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교사들이 지도한다는 점이 눈치 빠른 학부모들에게 먹힌 것이다.

 

 인근의 어느 학교는 학생들이 너무 몰려 쉬는 토요일까지 방과후 수업을 운영하는 등의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이에 그 학교의 교감 선생님께서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신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녁식사까지 제공해 가며 9시까지 수업을 하는 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몇 몇 열악한 지역, 또는 결손가정이나 맞벌이 부모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가정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버블쎄븐'으로 손꼽히는 서울의 어느 부자동네 이야기이다. 

 

물론 이들 중 몇 %의 아이들은 학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옮긴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두고 교육당국에서는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 방과후 수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자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은 학원에 매일 다니고 있으며, 방과후 수업과 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아이들도 매우 많다. 결국 방과후 수업이 성황을 이룬다는 것이 사교육의 축소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똑똑한' 엄마들은 학원에서 실력을 다지고,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시험과 관련한 내신을 관리하려는,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요량인 것이다. 

 

결국 죽어나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 1시, 2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교과공부를 하느라고 10시간 이상을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학교로 뺑뺑이를 돌고 있는 것이다. 10시간 공부하면 10시간만큼의 효과가 나고, 20시간 공부하면 20시간만큼의 성과가 날 거라는 산술적 계산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투입하면 투입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기계라도 된다는 것인가?

 

 새 학기 들어 맡게 된 '부진아 지도' 때문에 지난 달 치렀던 진단평가 결과를 토대로 국어점수가 하위 10%에 드는 아이들의 명단을 뽑아 보충수업 일정을 짜고자 아이들을 만나 보았다. 그런데 웬걸 국어점수가 30점 안팎인 이 아이들이 나보다 더 바쁜 것이다. 학원은 매일 가고, 거기다가 몇 명은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까지 듣는다는 것이다.

 

우리글을 제대로 읽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들에게 이런 처방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어이없음은 잠시, 이 아이들이 당할 고통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답답했다. 국어점수가 30점이 안 나온다는 것은 교과서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교사의 지도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런 아이들에게 학교 수업 6시간도 모자라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혀 놓는 것은 혹사를 넘어 폭력에 가까우리라 생각된다.

 

 이 정부 들어서 사교육비 줄이기의 차원으로 강화되고 있는 방과후 수업. 높으신 분의 말 한마디에 각 지역교육청마다 소속 학교를 채근하여 참여 학생 늘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학교에 따라서는 막대한 교육청 예산까지 들여 방과후 수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단위 학교들도 교사들을 달래가며 과목 당 2개 이상의 교과 내신반을 운영하면서 실적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일단은 일부나마 사교육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또 정말 어려운 여건 속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으로 필요한 부분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이 아니지 않은가. 학원 대신 방과후 수업을 듣는 학생이 아무리 많아진다고 해도 이것은 공교육의 정상화라고 볼 수 없다. 단지 학교 안에 학원이 들어온 격으로, 또 다른 성격의 사교육일 뿐이다. 또한 학교에서 교과수업을 제대로 못 가르쳐서 학원에 다닌다기보다는 다른 아이들을 뛰어 넘는 경쟁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 보내는 것이다. 공교육의 목적이 교과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특목고 많이 보내고 대학 많이 보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본질은 사교육 없이도 공교육만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찾아내고 계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일 것이다. 더 나아가 학력이 아니라 다양한 소질과 능력에 따라 자기실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10시간, 20시간을 공부해도 변하지 않는 등수에 절망하고 주눅들어가며, 오로지 성적을 향해 한 줄 서기를 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교육적으로 덜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진정 공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말 그대로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동산을 도는 동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의 끝자락인 2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뒷동산에 함께 오르던 삼촌이 물었다.

 

  "지금 이렇게 바람이 불어대는 이유가 뭐게?"

  " …… "

  "겨우내 잠자고 있던 나무를 깨우는 거야. 봄이 오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고…."

 

 어린 맘에도 삼촌의 그 말에 왠지 모를 신비스러움을 느꼈고, 나도 나무처럼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 시늉을 해 보이던 기억이 난다. 그 바람 덕에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혼신을 다해 양분을 끌어올려서는 갖가지 향기를 뿜어내며 다양한 빛깔과 모양으로 꽃잎과 여린 새순을 피워내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에 새삼 뭉클해진다.

 

 이 나무들만큼이나, 아니 더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지닌 우리의 아이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언제까지 그들의 소중한 오늘을 저당 잡힌 채 시들어가게 할 것인가.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며 생명을 잉태하고, 또 다른 생명을 깃들이며 하늘을 향해 당당히 팔 벌린 채 살아가는 나무들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싱싱하게 자라게 할 순 없을까?

 

 누군가 가져온 친환경방울토마토 한 팩. 뚜껑을 열고 보니 색깔도 크기도 가지각색인 놈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들어앉아 있었다. 이게 자연의 원래 모습이지 않을까. 원래부터 다른 빛깔과 모양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한 가지 모양과 크기를 강요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서로 '다름'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어른들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전국완씨는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교육, #사교육, #방과후수업, #교육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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