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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어렵게 지하 창고로 내려간 수연은 선반에서 분노의 술 곁에 있는 일기장 뭉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을 정신없이 읽어나간다. 그 안에는 스무 살 여자의 일상이 세세하게 기록 되어 있었고, 수연은 그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일기장을 전부 챙겨올라 온다.

 

15. 드러나는 실마리

 

"우리 귀염둥이! 빨리 와야지, 뭐해? 음식이 다 식는단 말이야."

내가 일기장을 들고 정신없이 읽고 있는 동안 인형 웨이터가 까마득한 계단 저 위쪽 입구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곧 가요. 잠깐만요, 여기 뭘 좀 가져가야 해서요."

나는 주섬주섬 일기장들을 전부 끌어 모았고, 옆에 있던 오래된 부대 자루의 먼지를 털어서 그 안에다 넣었다. 그리고는 내려올 때와는 다르게  기세 좋게 계단을 뛰어올라가서 밖으로 나간 뒤에 문을 '챙강'하고는 잠궜다.

 

페르도에게 돌아갔을 때, 조제는 분노의 술을 이미 두병 다 마시고 잠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 옆에서 기사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듯이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뜨개질 할머니도 어느 틈에 조제 옆으로 옮겨져서 자고 있었다.

 

"가서 밤참을 간단히 먹고 바닷가로 나가봅시다."

페르도가 성큼 일어서면서 말했다.

"되도록이면 물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열망사냥꾼이 있으니까?"

 

내가 묻자 페르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열망사냥꾼이 물에만 사는 건 아니에요. 육지에서 돌아다닐 수도 있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지요. 좌우간 각자 자신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너무 앞서는 자신감은 오히려 그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적당히 숨기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기사 아저씨와 나, 페르도가 인형웨이터의 솜씨가 담긴 '예쁜 소녀풍 특별 야참'을 먹고 해변으로 나왔을 땐, 바다에는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페르도에게 지하 창고에서 일기장을 가지고 올라왔노라고 말했다.

 

"조금 더 읽어보고 싶었어요. 괜찮겠지요?"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그 일기장이 누구의 것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페르도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뭐 딱히... 어쩌면 한국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여기선 외국 사람과도 언어와 사상이 통하는 무국적 지대니까 설사 외국어로 쓰인 일기장이었다고 해도 제가 다 읽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어쩐지 그 일기장의 주인은 저와 같은 한국 사람인 것 같았어요."

 

"허허, 그 일기장은 분노의 술을 추출할 때 받아놓은 진단서 같은 거죠. 그 사람의 내면적 고통을 증명해 주는 거라고나 할까? 여기선 당사자의 인생이 배어있는 소지품을 받아놓고 그 사람 몸에서 분노를 추출해 낸답니다."

기사 아저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럼 조제가 먹은 술 속에 든 분노는 이 일기장 주인의 것이겠군요?"

"예."

페르도가 바다 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뭐... 이젠 그 분노도 삭을 대로 삭아서 술로 만들어졌으니, 당사자가 미움과 좌절, 욕망, 번민이 뒤섞인 채로 마음이 들끓던 시기는 지났다고 봐요. 그 분노의 주인도 이젠 자신의 고통이 해결된 거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삭혀서 술로 만들어 남의 고통도 치료해 줄 수 있게 됐으니... 어떻든 그 분노로 인해서 나쁜 결과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몰라요."

기사 아저씨가 또 나서서 말했다.

 

"그런데... 그 일기 속에서 '그놈'이란 대체 누굴 말하는 거죠? 아직 덜 읽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더군요."

내가 페르도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대답 대신 방죽 위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더니 입을 뗐다.

 

"그 분은 이간질과 배신, 따돌림, 거짓말, 모함, 누명, 성추행 등의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지요. 결과적으로... 믿었던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삶에 대한 의욕이 상실됐고, 자신이 살던 바닷가 언덕 소나무 숲에서 목을 맸습니다. '그 놈들'이란 게 누굴 말하는 건지는 읽으면서 답을 찾아보세요. '그 놈들'에게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렸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사랑으로 도피처를 삼고 도망갔던 거지요."

 

"세상에!"

"너무 많은 정보를 미리 아는 것도 '책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비록 일기지만 그건 '그 분의 역사책'이니까 소중히 음미해 가며 읽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럼 제가 이 일기를 빌려가지고 가도 될까요? 지금은 다 못 읽을 것 같고 집에 가서 차분히 읽어보고 싶어요. 다음에 보카에 오게 될 때 돌려 드릴게요."

"좋습니다. 꼭 돌려주셔야 해요. 소중하고 안타까운 젊음을 기록한 것이라고 당사자가 유언장에서도 말한 것이니까요."

 

우리는 방죽 위에 나란히 앉아서 파도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내가 찬 팔목의 시계는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는 날이 밝으면 정어리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하고요."

"페르도 씨는 한 숨도 못 자서 어쩌지요?"

내가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하자 페르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곳에 이주해온 뒤로 단 한번도 잠을 자본 적이 없어요. 처음엔 저도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고, 반복되는 일상이 진절머리 났었지요. 하루종일 어두운 정어리 공장에서 혼자 일한다는 것이 쉽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익숙해지다 보니 햇빛 한 점 안 드는 어두운 상황을 제가 원하게 되고 스스로가 어둡고 긴 터널 같은 공장 구조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일곱 개나 되는 문을 지나서 들어가는 공장이 태어난 거죠. 저는 그 안에서 집중해서 일을 합니다. 저 말고 다른 직원들도 각자의 공간에서 저 처럼 그렇게 일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빛 아래로 나오지요."

 

"그 어둠에 있다가 밝음 속으로 들어오면 눈이 다 상했을 텐데..."

"아니오, 잊으셨나요? 우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당신과 그 앞서의 수많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의 집합체란 것을요. 그러니 죽지도, 나이 먹지도 않고 수많은 세월을 똑같은 일을 하면서 똑같은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아, 그렇군요. 허상,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허상의 세계 속에서..."

 

나는 가만히 읊조리며 먼 바다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느 틈에 기사 아저씨는 차의 시동을 키러 갔고, 나는 조제와 할머니를 어쩔 것인가가 걱정 되기 시작 했다.

 

<계속>


태그:#판타지 소설, #소설, #아르헨티나, #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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