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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미술선생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자 수연은 홀로 커피숍에 앉아서 죽은 언니 생각을 하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잠깐 졸다가 깨어보니 버스는 낯선 곳을 향해가고 있었고, 버스에는 페르도가 있었다. 또다시 보카를 향해 가는데..

 

8. 클럽 '멘도사'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항구 한쪽에서 길게 이어진 골목들에는 붉은 네온사인의 불빛과 함께 바(bar)의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전사는 호탕한 목소리로 "다 왔습니다! 보카는 멋진 곳이죠"하고는 문을 열어준다.

 

잠들어 있던 할머니는 뜨개실을 주섬주섬 감아올리며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아가씨는 음악을 듣다 잠들었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져 있었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반짝하고 빛이 났다.

 

"깨워서 내려야겠죠?"

나는 아가씨의 어깨를 흔들며

"다 왔어요. 일어나 봐요."라고 했다.

 

아가씨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더니 짐짓 졸린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았다.

"겨우 3분 만에 보카에 온 거군요?"라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네. 이곳과 세상의 시간은 다르답니다. 이건 모두들 여러분이 꿈을 꾸거나 책을 읽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이니까요."

페르도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하고는 모두의 가방을 받아들고 먼저 내렸다.

 

저 멀리 등대의 아련한 불빛이 밤바다의 어둠속으로 한 줄기 빛을 내리고, 파도 소리 외에는 그 무엇도 들리니 않는 고요한 바다였다. 내리는 빗물이 바다의 냄새를 코끝까지 전달하고, 밀려오는 파도가 해변으로 부서질 때의 하얀 포말이 죽은 왕녀의 드레스 자락처럼 풍성한 레이스를 휘감아 올린다.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 불빛으로 인해 이 풍경은 내 마음 속에 선명히 꽂혀버렸다.

 

"자, 이제 갑시다!"

운전사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며 외친다. 몸이 뚱뚱해서인지 행동도 몹시 느린 사람이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차를 몰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물어 보았다.

"같이 가시는 건가요?"

 

"그럼요, 저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곳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어요. 그래서 이젠 운전기사 역할을 하게 된 거구요. 누구보다 이곳으로 오는 길을 잘 알죠."

"좋은 직업을 가지셨군요."

내가 말하자 아가씨가 나서며 비아냥거린다.

"그래봐야 단 몇 분, 몇 시간 아니겠어? 이게 다 꿈이고 공상일 뿐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죠. 꿈, 공상...하지만 보카로 차를 몰고 오는 동안 저는 많은 생각을 하지요. 처음 오는 사람들은 길고 음습하고 축축한 터널을 지나야 한다고 투덜대지만 저는 이제 그 어둠 안에서도 인생의 희로애락과 지나간 추억, 연민, 기쁨이 가진 농과 담을 느낄 수가 있어요. 가수가 노래로서 대중과 소통하듯, 화가가 그림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섬세한 붓 터치로 표현하듯, 보카로 들어오는 길은 두근거리는 흥분과 은밀한 기다림, 언젠가는 성취하고픈 열정이 저와의 소통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죠. 이곳에 오는 손님이 늘어날수록 저도 동지애가 느껴져요. 세상에는 나랑 비슷한 사람이 많구나 하는 그런.."

 

"아이고, 나는 그런 복잡한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나야 뭐, 이제 곧 세상 뜰 몸이니 내 인생, 멀리서 한번 지켜보고 싶어서 왔단 거지. 더 이상 무슨 희망이 필요해. 내가 살아온 게 어떠했는지 현실 속에선 감도 안 잡히고 막막하고 자꾸만 내 뜻과는 반대로 가더란 말이야. 이제 여생이라도 내 의지가 뭔지 생각이나 좀 해보고 싶어서 왔단 말이지. 나무관세음보살."

할머니는 튀어나온 실타래를 가방에다 집어넣으며 한마디 거든다.

 

"머리 아프게 살아봤자 남는 게 뭐 있어요? 상처만 받고 골치만 아프지! 그냥 막 사는 거야! 이 남자 저 남자 마구 만나고, 좋은 거 다 누려보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데 내가 왜 힘들게 자학하며 살아야 해? 안 그래요?"

아가씨가 껌으로 풍선을 크게 불며 나불댄다. 

 

"그럴지도 모르죠. 다들 보카를 그리워하고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 때문에 보카를 그리워하는지를 알지 못하지요.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마구 힘들게 하고 뜻도 통하지 않는 말을 들어달라고 하며 그들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들이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힘들어하고, 상대는 저에게 힘든 사람이라며 피하기만 하고.."

 

운전사의 말이 길어지자 페르도가 중간에 끼어들며

"아, 이만,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저기 보이는 바(bar)로 갑시다. 일단 배가 고프니까 저녁을 먹자구요."

하고는 성큼성큼 앞장서기 시작한다. 파도가 방죽으로 부딪쳐 오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다섯 사람 외에는...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땐 한창 흥에 겨운 음악이 지축을 울리며 연주되고 있었다. 클럽'멘도사' 라고 쓰여진 간판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방정맞은 걸음으로 인형 가면을 쓴 웨이터가 다가와서 아는 척을 했다. 서 있던 사람들의 발에 그의 발이 걸리는 바람에 손에 든 쟁반이 덜컹이며 손님 앞으로 쏟아질 뻔 했다. 술에 취한 여자 하나가 이걸 보고는 미친듯이 웃어대자 다른 손님들도 손가락질을 하며 웃기 시작한다.

 

인형 가면 웨이터는 멋쩍은 듯이 우릴 향해 웃으며 "페르도! 어서와용.당신 어쩜 오늘은 더 멋있어진것 같아! 이 볼 좀봐. 일하느라 힘들었쪄?" 그는 징그런 말투와 행동으로 페르도에게 다가서서 부비적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화들짝 거리며 "이런 이런, 손님이 계신걸 깜빡했군. 이리 와서 앉아요. 페드로 일행분들"하고 탁자를 권했다.

 

페드로는 익숙한 듯이 의자에 앉아서는

"손님이 많군요. 우린 배가 많이 고프니까 알아서 5인분 부탁해요."

하고는 인형 가면을 가볍게 틱 건드렸다.

"아, 그럼용. 그대를 위한 특별 탱고 공연도 있는거 알지? 귀여운 아가씨들 이 쪽으로 앉아요. 할머니 가방은 제가 들어드릴게요"

하면서 정신없이 설친다.

 

"아, 아가씬 뭐가 그리도 궁금한가요? 왜?내 얼굴? 좀 요상하긴 하죠?킥킥"

"인형 가면 쓰고 일하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나는 슬며시 물어봤다. 웨이터는 옆의 의자에 걸터앉더니

"알고싶어요?"

하고는 이글이글하고도 능글스런 미소를 띠며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네. 조금 특이하네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의 눈을 피해 탁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면이 아니라 이게 제 얼굴인걸요. 제가 원래 저 아래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형이었거든요."

"에그머니나!"

할머니는 몸서리를 치더니 돋보기안경을 치켜세우며 웨이터를 흘끔거렸다.

할머니의 반응에 그는 능글한 미소를 퍼부으며 우쭐대듯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불량품이 되어서 몸통은 만들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갔죠. 그걸 어떤 여자애가 주워다가 그 애 엄마한테 몸통과 팔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한 거랍니다. 몸은 쓰다 남은 밀랍으로 만들어져 있죠" 그러면서 손과 팔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일하고 있죠? 이번엔 그 애가 내다 버렸어요?"

아가씨는 씹던 껌을 이빨 끝에다 물고는 손가락으로 집어서 쭉쭉 늘이며 묻는다.

 

"아니요, 얼굴만 덩그라니 있는 채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얼마 뒤면 겉이 다 뜯어진 채로 베개 솜이나 될 지도 몰랐을 제가 팔과 다리, 몸통을 가질 수 있게 되니 너무 기분이 벅찼어요. 그래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뛰어다니다가 이 바(bar)를 발견한 거죠. 그리고 탱고를 추는 사람들을 보니 그렇게 멋져 보이더군요. 과연 이 몸으로 저들처럼 멋진 탱고를 출 수 있을까 하는 그런 희망? 그래서 클럽 '멘도사'와의  인연이 시작된 거랍니다.

 

<계속>


태그:#아르헨티나, #보카, #멘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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