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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이 겪고 있다. 평상심을 잃으면 체온이 펄쩍펄쩍 뜀박질하는 것. 하늘 아래 모든 풍경이 높이뛰기와 엎드려뻗쳐를 하루 종일 왔다갔다 반복한다. 이마는 끓는데 속은 시려 뜨거운 차를 마셔도 아래 위 턱이 부딪히는 한기를 느끼고, 어쩌다 속이 데워지면 손톱 발톱 모세혈관 하나하나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몸이 닿는 곳은 어디나 빙판이 된다.

그리움은 항상 이렇게 앞뒤도 맞지 않고 질서도 없이 난폭하게 온다.

지병처럼 갖고 있는 겨울의 우울 속에서 이제 봄을 맞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직은 반짝이는 색깔 하나 주울 수 없는 세상 속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면 먹을 갈아 본다. 10분, 20분 팔이 아플 때까지 먹을 갈다 보면 해가 지고 세상은 먹물 빛이 된다. 붓글씨를 쓰진 않지만 나는 벼루와 먹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해 겨울, 무턱대고 차를 몰고 나갔다가 도착해서야 그곳이 낯익은 인사동 거리임을 깨달았다. 설을 앞두고 요양 시설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고 온 다음날이었다. 수년 째 이어지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어머니와의 조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돌아가는 딸에게 현관문을 붙들고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 흔들며 서 계시던 어머니, 그 모습이 눈에 밟혀 나는 돌아와서도 한주일은 꼬박 서러운 적막 속을 헤매야 했다.

그날도 그랬다. 평생 혼자 살아오신 어머니가 단체생활에 익숙해진 것도 서러웠고, 불편한 다리로 기도며 예배며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우등생이라고 어머니를 칭찬하시던 사모님의 말씀도 서러웠다. 예수님께 시집왔다며 내가 기억하는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워 보이는 어머니, 친자식보다도 더 살뜰하게 어머니를 보살펴주시는 목사님 내외분, 서로 의지하며 남은 길을 동반하고 계시는 동료 할머님들, 모든 것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인데. 돌아오는 길은 핏덩이 자식을 떼어놓은 어미의 마음처럼 나는 늘 뼛속까지 한기가 들었다. 

인사동에서 아무 데나 차를 세워놓은 뒤 맨 처음 눈에 띈 곳이 사거리 부근의 문방구였다. 왜 거길 들어갔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날 난 나대로는 거금을 주고 벼루와 먹을 샀다. 당연한 듯 붓도 몇 자루 챙겨주시는 주인 할아버지께 붓은 필요 없다고 대답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날 이후로 나는 우울해지거나 슬플 때면 먹을 갈았다.

검게 더욱 검게 갈아지고 있는 먹을 보며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비극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카타르시스. '정화이론'으로도 불리는 그것은, 슬픔을 몰아내고 정화하기 위해 훨씬 더 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훨씬 더 큰" 무엇 앞에서 "현재"의 슬픔은 치유되고 그렇게 치유된 자리는 깨끗하게 정화된 신생의 땅으로 탄생하지 않겠는가. 슬플 때 비극을 보면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음이 한없이 캄캄하고 그래서 슬픔의 무게에 전신이 아픈 날, 조금의 밝음조차 허용하지 않는 검은 먹을 갈며 나는 조금씩 밝은 곳으로 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도저히 객관화되지 않는 자기만의 열등감이나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 정신이 아파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은 알리라. 그것은 가진 게 부족하여 욕심에 겨운 비명도 아니요, 진짜 불행이 뭔지도 모르는 배부른 투정도 아닐 것이며, 말 그대로 정신이 아파 죽고 싶을 만큼 꺽꺽 우는 울음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길 늘 소원의 첫째 자리에서 기도해왔으면서도 어찌 보면 나는 내게 기쁨이 되고 위안이 되는 사람을 기다려온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선함이나 너그러움도 나보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로만 향하는 한정된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행복해야 하고 착해지며 삶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싶었던 것도 결국은 나의 자만은 아니었나. 나는 점점 졸아드는 내 모습을 보며 울었다.

나이가 드는 건지 이제야 철이 드는 건지 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작고도 가볍다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그럴 때마다 아직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비명을 질러보기도 한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내가 나에게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해보기도 하지만,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어냈을까? 내 체온으로 한 사람의 어깨라도 데웠을까?

바늘 같은 감정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나를 찌르고 그 속에서 악악대며 내 아픔만 누구에게 호소하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나를 쉬게 해줄 그 어떤 포근함과 너그러움만 자꾸자꾸 달라고 조르진 않았는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절대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도가 결국은 내 얇은 허영은 아니었는지.

타인이 더 많은 세상 속에서 내게 보여지는 세상과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만을 고집하고 무언으로 강요하며 살아왔을지 모른다는 자각이 고해성사 직전처럼 나를 두렵게 한다. 한 사람의 가슴에 무지개를 띄우고 서로의 호흡을 죽는 순간까지 감지해낼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이 충분히 보람 있고 아름다웠다고 임종의 순간 마지막 말로 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면 나는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인가?

먹을 갈면서 '사람과 나무'의 3집 CD를 듣는다. 사람과 나무를 합하면 한자로 쉴 '휴'가 된다는 게 잠시 충격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에게 휴식을 주는 저들은 자기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 공간에서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내 마음을 혹 노여워하진 않을는지. 포크 계열의 노래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2010년 겨울 끝자락에 새벽의 순수를 닮은 '사람과 나무'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나와는 완벽한 타인인 저들에게서 조금씩 평정을 되찾고 있다.

그래. 어찌 보면 완벽한 휴식이란 서로를 알 수 없는 타인에게서 얻게 되는 무보상의 기쁨은 아닐는지. 일상을 떠난 여행지, 그 낯모를 공기와 냄새에 젖어들며 자신이 쉬고 있음을 깨닫게 되듯 말이다.

감정의 절차가 생략되고 구할 것도 줄 것도 없는 무심한 눈빛들 속에서 애착과 번민이 필요 없는, 따로이면서 함께인 동행. '사람과 나무'의 "내가 만난 세상"엔 역설 같지만 무심한 편안함이 있다. 타인! 그 깨끗한 관계!!!

그러나 어찌하랴.
이렇듯 내 귀에 들리는 작은 기척에도 그 사람 살고 있으니. (*)


태그:#사람과 나무, #휴식, #타인, #무보상의 기쁨,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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