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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화두처럼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에 지식과 교양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자연과 식물, 광물에 대해 많고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학습의 전당으로도 충분히 언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은 단순히 어린이 교육용 공간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자연 박물 지식의 위대한 힘은 이미 해양진출의 시대의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을 통해 구현되었으며,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은 단지 관람 공간이 아니라 부와 국력을 창출하는 토대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사실 자연사 박물관만 해도 포괄하는 그 영역이 실로 방대하다. 이미 18세기 건축 양식의 비엔나 자연사 박물관 천장에는 자연사가 8개의 분야로 나뉘어져 적혀 있다. 그 8개 분야는 고생물학, 지질학, 광물학, 선사학, 민속학, 식물학, 동물학, 인류학 등이다. 현대에도 중요한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다만, 고급 독자라면 그 박물학적 장점만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이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비판의 칼날을 먼저 들이댈 수도 있다. 특히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그것에서 얻는 식물과 자원을 본국에 모아놓은 것이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이라는 생각은 역사적 증거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이 정치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치권력의 적극적인 후원에 따라 해양 진출이 독려되고, 그 탐험에서 얻은 것을 권력이 독점하려 한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컨대, 18세기 중반 비엔나 식물원은 쇤부르크 궁전의 열대 식물을 재배관리 하기 위해 탄생했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융성할 때 비엔나 식물원도 절정기를 맞았지만, 지금은 관리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정치적 리더와 의사 결정의 중요성 때문에 저자는 유럽과 일본, 조선의 엘리트 지식인들과 정치 체제를 비판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것은 정치제도와 권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회의 자연발생적인 학문과 사상이 근원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이 책에서 단순히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에 대한 풍경 스케치만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의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재삼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유럽 그리고 가까운 일본과 비교하면서 성찰어린 분석과 뼈아픈 충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핵심은 조선이 자연사와 박물학, 그것에서 파생되는 과학을 외면해서 세계적인 문명 발달에 뒤처지고, 일본에 병합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는 것.  조선 중기부터 일본에게 뒤진 것은 한국이 선진국이 되지 못한 불행을 의미한다. 저자는 일련의 모순 구조를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살피며 번득이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는 지나간 역사와 체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점이기 때문에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무엇보다 역사에서 구체적인 개인과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제도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한 사회와 국가의 힘, 부(富)로 연결되는 데에는 탁월한 인물들이 있었고, 그 인물들은 각각의 나라, 도시 그리고 자연사, 박물학의 공간과 밀접했다.

책에 언급된 예를 들어보면, 우선 칼 폰 린네(1707~1778)가 19명에 이르는 사도(제자)들과 같이 책상을 벗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등 전세계를 탐험하며 생생한 식물 분류학을 만들어냈다. 린네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열대 식물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은 바로 중요한 무역상품이었으며, 부를 증대시키는 핵심이었다. 네덜란드가 경제력을 상징하는 튤립으로 세계시장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식물원 때문이었다. 17-19세기 네덜란드 약용 식물원은 국력의 상징 그 자체였다.

카를 프리드리히 마르티우스(1794~1868)가 1810년대 리우데자이네루에서 브라질리아까지 탐험하며 열대 식물 가운데에서도 온갖 야자 식물만 수집하고 돌아와 뮌헨 식물원을 만들었다. 그는 1861년〈브라질의 식물상(전 15권)>을 출간했다. 조지프 뱅크스는 식물이 제국의 이익과 강대함을 크게 할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큐(Kew)식물원을 만든다. 영국의 근대 역사는 이 큐 식물원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하게 된다.

알렌산더 훔볼트는 정치적 좌절 끝에 라틴아메리카로 탐험을 떠나 1799-1804년 동안 얻은 방대한 지식을 싸안고 모국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갔다. 그는 21년간(1807-1827)에 걸쳐 집필을 했고 지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기후학 등의 지식을 유기적으로 관통하는 자연지리학이라는 학문을 성립시킨다. 자연지리학은 생물분류의 법칙과 지리적 분포의 법칙 사이에 상호 대응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이 그를 껴안았다면 독일은 더욱 달라졌을 것이다. 만약 정약용이 훔볼트처럼 해외로 탐험을 떠났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훔볼트에게 영향을 준 것은 파리의 왕립식물원이었다. 파라의 역사도 파리 식물원과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한다. 파리 자연사 박물관은 루이 13세가 1635년 왕립 약용식물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고, 1718년 왕립식물원으로 개칭되었다. 저자는 '1793년 자연사 박물관으로 바뀐다. 프랑스 혁명조차 수많은 자연 과학자들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 '뷔퐁의 박물학이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1730년대 왕립식물원을 크게 중흥 시키고, 생물지리학을 제창해 훔볼트의 만든 '식물 지리학'의 시조가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저자의 말대로 1800-1840년대 파리가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사 박물관과 에콜폴리테크니크, 파리과학원이라는 기관이 있었기 때문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흔히 프랑스 최초의 식물원은 파리 식물원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파리 식물원이 아니라 몽펠리에 식물원이다. 몽펠리에 식물원의 프랑수아 라블레 동상이 있는데 라블레에게 식물은 인간이 자연의 치유력을 회복하는 치유의 매개체였다. 식물이 인간의 몸에 부여하는 치유의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은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매개의 공간이었고, 그것이 부와 국력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은 그것에 주목해 헌신했고, 자본이 그것을 상품화했으며, 국가의 리더들은 그것을 보듬어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과 비교하면서 조선 사회에 대한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한 점을 살펴볼 차례다. 개항의 여부라는 통상적인 지적과 어떤 점이 다를까. 예컨대 이미 1635년 포르투갈인은 일본에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었고, 이후 일본인들은 이곳을 통해 네덜란드와 적극적인 교류를 한다. 그런데 그 교류의 중심에는 '박물학'과 '의학'이 있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상식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바다로 적극적으로 나가거나 바다를 통해 교류한 점에 있다. 유럽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적극적으로 바다에 나간 이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식물 동물, 광물을 가져왔고 그것을 모아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을 만들어 나갔으며 그것을 통해 다시 국력과 부를 창출했다. 일본은 유럽을 통해 그것을 들여오는 것이 조선과 달랐다.

사실 조선이 바다와 자연사 박물을 외면한 것은 '사농공상'이라는 키워드에 요약되어 있다. 상업을 제일 하대했기 때문에 육지는 물론 바다를 통한 무역은 있을 수 없었고, 상품화와 시장의 활성화는 덜했다. 단적으로 유럽인들이 <본초강목>에 담긴 박물학적 지식에 대해 지식의 상품적 가치를 생각하며 열광할 때, 조선에서는 명의 허준조차 <본초강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단지 상업을 천대하고, 중국식 사대주의와 주자에 함몰되었기 때문일까? 저자의 말대로 문과형 지식인들이 사회의 주요 리더들이었기 때문이지만,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는 검약함을 강조하는 선비의 나라이었다. 그들은 박물적인 융합의 예술이 아니라 문인화의 세계에 침잠했고 심지어 조선 안의 식물초자 외면했다. 무엇보다 고려시대에 기득권을 누린 상업 세력과 불교에 대한 견제가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와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강화했고, 이는 과학은 물론 무역도 발달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자연사박물관과 식물원의 개념은 조선에 있을 수 없었고, 그것은 사회의 정체를 의미했다. 끊임없는 이종교배를 통해 상대적 우월성을 확보하는 것이 한 사회의 부를 증대시키고, 국력을 증대하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이 아니라 고려나 백제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졌을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은 바다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다른 나라의 자연 자원을 탈취하지는 않았고, 발전은 더디었으며 오히려 침략을 받게 되었다. 해양과 다른 대륙의 진출이 침략이 아니라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 자연사 박물관을 반드시 침략적 제국주의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조선만 비판할 필요는 없겠다. 많은 유럽의 국가 가운데 바다로 진출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통해 미래에 어떻게 대응해 가는가 이겠다. 성리학과 사대부가 지배하는 조선시대가 아님에도 우리에겐 아직 자연사박물관조차 제대로 없다. 해양 진출이나 과거의 사상, 정치, 지식인의 문제와는 별도로 나노와 생명 공학의 시대에 여전히 우리는 자연사와 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적다. 이 책은 이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덧붙이는 글 | 과학사가 이종찬의 유럽·일본 자연사박물관, 식물원 탐방기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 / 이종찬 / 해나무 / 2009-11-12 / 1만3800원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 - 과학사가 이종찬의 유럽·일본 자연사박물관, 식물원 탐방기

이종찬 지음, 해나무(2009)


태그:#박물관, #자연사, #식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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