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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전직 대통령이 연이어 우리 곁을 떠나고 세계적 금융위기의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던 2009년이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새사연은 2010년을 전망하는 연속 기획 '2010 전망'을 마련했다. 올해는 '불확실의 시대'로 규정된다. 2009년 하반기로 가면서 차츰 소강상태로 접어든 위기가 다시 파국적 결말을 맞을 것이란 전망도 옳지 않지만, 그렇다고 OECD 최고의 경제회복과 G20 국격 제고라는 장밋빛 치장에만 몰두하는 전망 역시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2010년을 보는 시선 속에는 잿빛 비관과 장밋빛 낙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새사연은 이 실타래 속에서 '희망'이라는 가늘지만 질긴 실타래를 찾아 풀어내보려 한다. 여러분도 함께 찾아보길 기대한다. - 기자 말

예년보다 길었던 2009년

글 싣는 순서
1. 경제분야 총괄 : 2010년을 새로운 경제 화두의 원년으로
2. 세계 경제
3. 국내 경제
4. 고용
5. 정치 분야
6. 교육 분야
7. 보건(사회) 분야
8. 남북관계
9. 가계 부채
10. 2010년 가정 경제 운용을 위한 제언

월러스타인의 세계 체제론을 한층 더 세련되게 발전시키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던 지오바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책 <장기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를 흉내 내어 2009년을 간단히 정리하는 첫 절을 시작해볼까 한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2008년은 9월 14일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끝났다. 그 이후 전 세계 경제체제는 아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각국은 국제적 공조를 펼치면서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하였고, 그 이전과는 아주 상이한 경제정책이 펼쳐졌다. 2009년의 경제는 2008년 9월에 시작된 금융·재정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그 기본 성격이 결정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2009년은 예년보다 길었다.

2007년 초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시작된 금번 위기는 지난해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신청과 AIG의 구제금융을 계기로 극도의 금융패닉 사태로 번졌다. 당시 경제계의 분위기는 묵시록에 가까웠다. 20세기 초에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자동적으로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던 진부한 좌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전 FRB의장 그린 스펀이 이번 위기를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상황이라고 정의내릴 정도였다.

현재는 이번 위기에 대한 진단이 많이 바뀌었다. 최근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공감대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지나치게 쫄았다." 다시 말해, 겁먹었던 것만큼 사태가 심각하게 진행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 상황을 낙관하는 분위기도 아니다. 위기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금융부문에서 시작된 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었고, 실물분야의 침체는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지속될 것이라는 공감대 역시 지배적이다.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

현재의 경제체제는 일국적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구조적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 첫째, 글로벌한 차원에서 이번 위기의 배경이 되었던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지역적 쏠림현상이 해소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고 팽창되는 과정에서 미국과 서유럽은 금융부분 중심의 축적체제를 구축한 반면, 중국을 위시로 브릭스(BRICs)국가들과 함께 한국 등 기존의 신흥국가들은 엄청난 속도로 수출주도형 산업 발전을 통한 자본 축적체제를 확립하였다. 서구 선진국 경제의 2차 산업이 다 망했고, 모두가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쓰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지만, 글로벌 경제가 공간적으로 이원화된 특색을 보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불안정한 불균형 상태가 발생했다는 주장에는 별 이견이 없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이러한 이원적 글로벌 경제체제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세계적 환류를 가속화시켰고, 결국 이로 인해 미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한 파열이 발생한 것이다. 한동안 위기가 심화되면서 투자가 크게 위축되고, 투자금의 회수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등 금융시장의 패닉이 지나치게 자유화되었던 초국적 자본의 환류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버리는 모습을 잠깐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초저금리를 이용한 달러-캐리 투자가 2009년 2분기부터 활성화되면서 기존의 문제를 다시 심화시켰다. 달러-캐리 투자의 청산문제는 미 달러가치의 추세적 하락문제와 함께 2010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급속한 달러-캐리 투자의 환금이 이루어질 경우 자산가치 회복이 상대적으로 많이 이루어진 신흥시장에서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한국경제도 그 영향권 중심에 있을 것이다.

일국적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고용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미국과 EU국가들 대부분은 실업률이 10% 근처에서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OECD평균을 보아도 거의 9% 수준으로 고공행진을 계속 하고 있다. 위기로 인해 실업은 늘고, 임금은 동결되거나 삭감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자영업자들이 경영위기에 직면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2009년에 지표상으로 경제가 많이 회복되었다고 발표되었지만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식 표현을 빌려 이러한 상황을 정의하자면, 위기가 해소되거나 경기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위기의 중심이 월가(Wall Street)에서 메인가(Main Street)로 이동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월가는 세계적으로 금융의 중심가이다. 이곳은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자본을 상징한다. 반면 메인가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을 상징한다. 위기관리 체제는 "부채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란 자본주의적 본질을 일면 더 노골화시켰다. 국가적 지원은 주로 거대 은행 등 대기업 위주로 펼쳐지면서 위기의 주범들은 엄청난 혜택을 입은 반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개인들은 위기로 인해 가산금리가 높아지면서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돈이 국가와 지배적 자본 사이에서만 돌면서 금융·자산시장의 가치를 회복시켜 놓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신용의 기준이 강화되면서 혜택은커녕 이전 수준의 서비스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고용문제와 가계신용 문제 역시 2010년 경제의 향방에 중요한 변수로 작동할 것이다. 

재정문제도 그 심각성이 다른 문제들에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 1930년대 대공황만큼 금융패닉이 심각했지만 위기가 그때와는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대공황 이후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온 국가의 경제관리 체계와 각국 정부의 엄청난 재정지출 덕택이다. 여러 형태의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책을 통해 경기침체가 더 심각해지는 것을 막긴 했지만, 밀턴 프리드먼의 말대로 "'자본주의' 세상에 공짜(점심)는 없다." 세금 징수를 통한 정부의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정부의 부채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었다. 재정문제는 두바이, 아이슬란드나, 그리스 수준의 국가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영국의 경우 부채문제로 국가 신용등급이 한 단계 내려갔다. 미국도 상황의 심각성은 그에 버금가지만 기축통화 국가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신용등급이 강등되진 않았다.

국가부채의 증가 자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재정지출을 마냥 늘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간부분의 실물경제 쪽에서 투자가 늘어날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 데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간한 '2009년 한국경제의 회고'란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의 실질경제 성장률은 0.2%로 예측되는데, 재정지출 효과를 제외하면 -1.3%였을 거라고 한다. 계산의 정확성 문제는 제쳐놓으면, 그만큼 많은 재정지출이 있은 반면, 민간부문의 투자는 위축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가계의 실업과 소득감소로 인한 소비지출 감소와 함께 민간부문의 투자의 위축이나 정체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경제가 '정상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전망한다는 것의 의미

연말이 되면, 정부 산하의 경제연구기관과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이듬해 경제전망 보고서를 발표한다. 경제전망 보고서는 소비, 투자, 경상수지, 물가, 고용 등에 대한 추세분석과 전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을 종합하여 익년의 경제를 전망하고 성장률을 예측한다. 발표할 때는 TV뉴스를 비롯해 거의 모든 언론매체에 대대적으로 '홍보'되지만, 그 예측에 관한 신빙성은 거의 점검되질 않는다. 몇몇 비판적 언론매체가 가끔 다루긴 하지만, GDP에 관한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자연과학적 진실처럼 다루어지는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표1] 지난 10년 간 성장률 예측치와 오차(단위: %, 오차는 절대값)
 [표1] 지난 10년 간 성장률 예측치와 오차(단위: %, 오차는 절대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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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은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삼성경제연구원(SERI)이 지난 9년 동안 발표한 경제성장률 예측치와 실질 경제성장률을 비교한 것이다. 두 연구 기관 사이에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확도를 논하기에는 오차가 너무 심하게 날 때가 많았다. 특히 2002년과 2008년의 경우에는 전망의 의미가 전혀 없었다. 2002년에는 KDI의 경우 3%, 삼성경제연구원은 4% 차이가 났다.

2008년에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차이를 보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8년 10월에 발표한 2009년 경제전망에서는 3.6%의 성장률을 예측했다가,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심화되자 2009년 2월 마이너스 2.4%의 수정치를 발표했다. 자제 성장률 예측 변화가 무려 6%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0.2% 정도일 것이라고 잠정적인 예측치가 나오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최초 발표한 예측이나 수정치나 모두 2.5%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정도로 신뢰성이 낮은 경제전망에 관한 보고서에 정부의 정책수립과 집행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런데 왜 별 의미도 없는 성장률 예측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현 이명박 대통령이 7·4·7이라는 거짓 공약을 바탕으로 당선된 것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개도국에서 GDP 성장은 지배계급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박정희에 관한 신화도 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성장률은 체제의 안정을 의미한다. OECD에 가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선성장 후분배'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지배층에게 성장률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직접적인 정치·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배제해도 GDP에 관한 지표들은 많은 개념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GDP를 생산의 측면에서 보자면, 단지 최종 생산물의 시장가격을 총합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사회성원 사이의 분배문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가치도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를 2만 달러라고 치면, 현재 4인 가족의 평균소득은 8000만 원 가까이 돼야 한다. 현실의 평균소득은 절반도 안 된다. 길이 많이 막혀 차가 정체되거나 지체된 상태에서 태워 없애는 기름 값도 GDP에 포함된다. 산업생산으로 인한 환경파괴의 가치는 GDP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의 산림이 불타 없어지고 공장이 들어서면 GDP는 크게 증가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받아들여지면서 GDP를 대체할 경제지표 개발이 시도되고 있긴 하다. 프랑스 정부는 스티글리츠와 센 등 주류 경제학 내의 일부 비판적 경제학자들에게 위탁해 '경제 성과와 사회진보 측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분배문제와 환경문제 등 삶의 질을 반영하는 경제지표를 만들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전망과 예측은 기존에 확립되어 있는 개념 틀 안에서 매해 연말에 성장률 예측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사회 성원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는 경제 개념을 확립해내고, 그에 알맞게 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될 수 있는지 전망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2010년에 더욱 절실하다.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기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를 흉내내며 이 글을 시작한 것은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 책에 펼쳐진 그의 주장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위기의 본성을 그 어떤 이론보다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1994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아리기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 펼쳐진 하나의 세계적 자본주의 축적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의미하며, 미국 패권의 쇠퇴와 헤게모니 이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본주의의 생성과 발전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위의 책 영문판: ix-x). 금융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가 아니며, 최고의 단계나 최근의 형태는 더더욱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는 중세와 근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본주의 맹아단계부터 반복되어 나타난 현상으로서, 금융자본의 급격한 팽창은 세계적 차원에서 하나의 축적체제가 다른 축적체제로 전환할 시기가 고조되었음을 알려준다."

아리기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대공황 직전까지 펼쳐졌던 금융자본의 시대는 영국의 패권이 저물어간 시기임과 동시에 미국이 신흥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한 때이다. 그 후 과도기를 거쳐 미국은 산업과 무역을 주도하며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전후 호황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미국은 이전처럼 실물경제에 기반을 둔 축적체제를 계속 팽창시킬 수 없었다. 16~7세기의 제노바, 17~8세기의 네덜란드, 18~9세기의 영국 등 과거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국들이 겪었던 것처럼 실물과 금융의 이원화가 이루어지면서, 실물부문의 중심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금융의 비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금융부문의 팽창은 어떤 면에서는 헤게모니 국가의 힘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실물-상업(무역)-금융-군사의 순서로 차례로 이루어지는 패권 이동의 한 국면이라고 아리기는 주장한다. 현재 G2로 부각되며 날로 강대해지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 어쩌면 아리기의 역사적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새로운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번 미국 발 세계 경제위기가 미국의 패권의 급격한 쇠퇴를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팍스 아메리카를 대체할  새로운 패권형태가 어떤 것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역사가 일정한 패턴을 반복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수의 국가들이 헤게모니를 구성하거나, 초국적 헤게모니가 구성될 수도 있다. 2009년 위기관리 체제로서 출발한 G20이 평상적인 기구로서 정착하면서 로마제국에서 원로(Senate)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권력기구 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0년 6월 캐나다, 11월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인 G20정상회의의 내용에 따라 향후 세계 정치경제의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될지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상황의 본질적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확인되겠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위기가 금융패닉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이전의 상태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한 세기 이상동안 생성-발전-쇠퇴의 경로를 밟은 하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다른 형태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고, 이 시기는 꽤나 길게 지속되면서 큰 변동성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1년 단위의 성장률 계산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아리기가 오래 전에 예견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는 단지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기 바라는 좌파 학자의 근거 없는 희망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주류 경제지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의 대표적 칼럼니스트이며 편집자이기도 한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최근에 쓴 'New Dynamics'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번 위기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의 몇 가지 중요 특성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마틴 울프의 의견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첫째,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의 금융모델의 패권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둘째, 금융규제 강화는 불가피하다. 여러 금융규제 장치들이 개혁될 것이고,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과 감시가 강화될 것이다. 셋째, 금융의 세계화가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도 끝나게 될 것이다. 넷째, 글로벌 스탠더드가 경쟁적 규제완화에서 규제의 세계화로 대체될 것이다. 다섯째, 자율적 조정 시장의 원칙이 더 이상 막무가내로 관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섯째, 패권적 금융모델이 무너졌기 때문에 각국의 고유한 전통과 목적에 맞는 금융체계가 부각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경제의 중심지가 중국을 위시로 한 신흥국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IMF 총재 스트로스 칸도 YTN과 가진 2010년 전망에 관한 단독 인터뷰에서 위와 같은 방향으로 국제 금융질서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2010. 1. 1).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 여부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질 것이며, 누구에 의해 주도될 것인가이다.     

유연성에서 안정성으로       

신자유주의의 중심 화두는 유연성이었다. 지배적 자본이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 이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회적 요소들을 유연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를 위해 국가적 장벽을 허물었고, 공공소유로 남아있던 중요한 사회적 자산을 사유화 했으며, 사회안전망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생산의 투입요소로 간주하는 경제학 이론을 현실화시켰다. 그로 인해 대다수의 서민들은 안정적으로 삶을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이 양산되었고, 실질임금은 정체되었다. 고용의 안정성이 파괴됨과 동시에 사회안전망이 약화되면서 삶은 이전보다 불안정해졌다.

선진국의 민중들은 기존의 사회안전망이 공격받긴 했지만 완전히 와해된 것은 아니었기에 신흥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민중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낳은 삶의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들은 미쳐 사회안전망이 확립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가 도입되면서 민중들의 삶이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개발독재의 시대에서 아주 잠깐 동안 노동조건의 개선 시기를 거치고 바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겪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체제가 완성되기 전에 신자유주의의 붕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지속될 수는 없다.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이런 결말에 도달한 것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미국 발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그 패러다임을 주도했던 자들 스스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인 유연성은 소수의 대자본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지구 전체를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여러 불안정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 신자유주의 주창자들이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소위 "혁신적 금융기법"에 기반을 둔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말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의 체제를 지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경제화두는 안정성이다. 새로운 세계체제를 논의할 주요 장이 될 G20의 중심 의제도 체제의 안정성이다. 그렇지만 G20이 안정성이란 화두를 신자유주의에서 집중 추구한 노동의 유연성 문제나 공기업의 민영화 문제에까지 적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문제점으로 인정하는 것은 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고 현재 추구되고 있는 안정성은 이 분야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안정성이란 화두를 금융시스템에 국한하지 않고 고용문제를 비롯해 사회 전 분야로 확산시키는 것이 일국적 차원과 세계적 차원에서 진보진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표2] G20의 글로벌 금융안정성 강화 기조(출처: 금융안정위원회 자료 정리)
 [표2] G20의 글로벌 금융안정성 강화 기조(출처: 금융안정위원회 자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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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경제 관료들, 국제 금융기구의 관료들, 주류 경제학자들은 위기의 주된 원인을 (1) 은행과 여타 금융기관들의 방만한 운영, (2) 통제 불능 수준으로까지 확대된 파생상품 시장, (3) 지나친 금융규제 완화와 이로 인한 금융투자 주체들과 감독기관 모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로 국한해서 보고 있다. 따라서 해결책도 금융체제의 안정성에 맞춰져 있다. G20이 최우선적으로 금융안정위원회를 가동한 것도 이런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2008년 워싱턴에서 시작해, 2009년 런던과 피츠버그에서 이야기 되었고, 2010년 캐나다와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글로벌 금융안정성 강화의 기조는 표2에 정리된 바와 같다.

초국적 자본흐름 통제 강화 

금융 분야에 국한하여 안정성 강화를 논한다고 해도, 가장 핵심적 사항 하나가 아직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바로 초국적 자본흐름에 대한 통제 문제이다. 최근 G20 정상회의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책으로 토빈세(Tobin Tax)도입을 주장하였지만, 중심 의제로 자리 잡진 못했다.

한국을 비롯해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두바이, 다수의 동유럽 국가 등등 신흥국들을 덮친 위기의 주된 원인은 갑작스런 해외자본의 유출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며, 구조적 불안정성의 주범은 자본의 글로벌 환류였다. 전후 황금기 때 존재했던 국가 간 자본흐름에 대한 규제를 모두 허물어 버리면서, 자금이 특정지역에 한꺼번에 몰리고 빠져나가는 패턴을 반복하였다. 그 때마다 문제를 일으켰다. 1980년대 중남미, 1990년대 동아시아와 동유럽의 국가경제를 붕괴시켰고, 결국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에서 위기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림1] 전 세계GDP 대비 초국적으로 소유된 자본 비율(출처: Nitzan and Bichler, "Imperialism and Financialism", www.bnarchives.net)
 [그림1] 전 세계GDP 대비 초국적으로 소유된 자본 비율(출처: Nitzan and Bichler, "Imperialism and Financialism", www.bnarchiv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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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은 세계적 차원에서 초국적으로 소유된 자본의 가치를 전 세계GDP에 대비해서 나타낸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1980년대 이후로 이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경 0.2 정도였던 비율이 현재는 세계GDP총량보다 1.2배 이상 큰 규모로 성장했다. 신자유주의 초기에는 선진국 사이에서의 자본흐름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최근 15년 동안 신흥국과 선진국 사이의 자본흐름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에 따르면(Mapping Global Capital Markets, 2008: 73), 2006년 기준으로 세계 주식의 27%가 외국인 소유라고 한다. 1990년에는 9%였는데, 3배가 증가한 것이다. 또한, 같은 기간에 정부채권의 외국인 소유지분은 11%에서 31%로 증가했고, 회사채의 외국인 지분은 7%에서 21%로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전 세계의 자산 26%가 외국인 수중에 놓여있다. 외국인 투자가 세계적으로 주도적인 기업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기업소유권의 초국적화의 진행 정도는 이들 숫자보다 훨씬 더 심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초국적 자본의 흐름에 따라 신흥국은 소위 Boom & Bust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가주권의 급격한 약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현재 상황에서는 더 이상 국가경제를 안정적으로 계획할 수가 없다. 자본의 흐름은 환율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고, 환율의 변화는 수출중심 산업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다수 신흥국들의 실물경제에 즉각적 영향을 미친다.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우려를 배경으로, 최근 브라질, 대만 정부가 자본통제를 강화하는 규제책을 내놓았다.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러시아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번 글로벌 금융패닉 때 자본에 대한 제약을 상당한 정도 실시하고 있었던 중국과 대만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사실과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때 말레이시아가 자본통제를 통해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했던 사례가 보여주듯이,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완화시키고, 또 다른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자본통제 방안의 세계적 표준안 도입이 절실하다.

대만 정부가 실시한 규제책의 주요 골자를 보면, 대만정부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환투기와 고금리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외국인 투자자들의 정기예금 예치를 금지시켰다. 또한 단기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의 경우에는 투자금액의 30%를 예치해야 한다. 브라질의 경우 2009년 10월부터 헤알화의 급격한 평가절상과 단기투자 자본의 유입을 억제하고 생산 분야에 대한 투자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외국인이 투자하는 채권과 주식에 2%의 금융거래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여전히 외자유치를 강조하며 규제책 도입을 주저하고 있다. 현재 외국은행 지점에 대한 유동성 규제에 관해서만 조심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수준이다. 당국자들은 자본이동에 관한 규제가 외국인 투자의 급격한 위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규제책 도입에 소극적인 자세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실증적 근거는 매우 약하다.

[그림2] 브라질과 대만의 국제자금 주간 순유입 및 환율 추이(출처: 블룸버그, 한국금융연구소의 그래프를 직접 재인용)
 [그림2] 브라질과 대만의 국제자금 주간 순유입 및 환율 추이(출처: 블룸버그, 한국금융연구소의 그래프를 직접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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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는 브라질과 대만의 최근 자본 순유입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자본통제실시 이후 일시적으로 자본유입이 줄긴 했지만, 곧 원래의 추세를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들이 신흥국에 중장기적인 투자를 결정할 때는 그 나라의 중장기적 경제성장 전망과, 펀더멘탈의 변화 등을 중심적으로 고려해서 이루어진다. 제도적으로 경제의 불안정한 요소를 제거한다면 이런 종류의 투자는 더 늘 수도 있다. 반면 거래세 형태의 자본통제 방안이나 예치금 요구 형태의 자본통제가 효과적으로 실시된다면 단기적 차익을 노리고 들어왔다 급속히 빠져나가는 투기자본은 어느 정도 걸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1997~8년과 2008~9년 두 차례에 걸쳐 자본의 급격한 유출→ 외환시장 붕괴→ 증권시작 붕괴→ 실물경제 초토화를 경험했던 한국은 세계체제의 새로운 질서를 논의하는 G20에서 자본통제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박형준 기자는 새사연 연구원입니다.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http://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2010년 경제 전망, #경제 패러다임, #안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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