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엊그제 밤에 형님 전화를 받았다. 수원에 살면서 오누이처럼 지내는 '난순이'(59)가 노인성 치매로 부산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언니(큰 누님)가 보고 싶어 면회를 가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날짜를 10일로 잡았으니 시간이 나면 함께 가자는 내용이었다.  

 

필자보다 한 살 아래인 '난순이'는 외동딸로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오누이처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착하고 예뻤는데, 어른들은 '똑순이'라고 불렀다. 집이 가난해서 고향을 일찍 떴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일가친척 하나 없이 객지에서 외롭게 사는 '난순이'는 큰 누님을 친언니처럼 따랐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형님을 찾아오거나 전화로 상의도 하고 조언을 듣는 사이인데, 반가운 마음에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큰 누님 면회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는 10일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형님 내외와 '난순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피붙이도 아니면서 셋째 매형 상(喪) 때도 조문을 다녀가고, 큰 누님이 보고 싶다며 전날 군산에 내려온 '난순이'가 고마웠다. 

 

전주 IC를 지나 익산-장계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진안 부근에 도착하니까, 비 내리는 산골의 아침풍경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차 방향이 바뀔 때마다 주변의 높고 낮은 산마루를 휘감고 도는 비안개가 산수화 전시회를 하는 것 같았는데, 옛이야기를 곁들여 감상하다 보니 언제 왔는지 모르게 부산에 도착했다.

 

낮 12시 조금 넘어 병원에 도착했는데, 차를 세워둔 지하주차장 승강기에 오르면서도 오늘은 큰 누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었다. 부모들부터 시작, 60년 가까이 쌓인 정을 잊지 못해 경기도 수원에서 내려온 '난순이'가 실망이 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느라 조금 늦게 복도를 걸어가는데 형님 내외가 뭔가 맞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용 병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까지만 해도 침대용 병실 맞은편 온돌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실에 들어서니까 큰 누님은 표정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김밥을 사먹으며 데이트나 즐기려고 하루 전에 예약하고 가면 "바쁠틴디 여기는 머더러 왔다냐!"라며 손을 흔들면서 좋아하던 작년 여름의 누님 모습이 떠올랐다.

 

가까이 다가가니까 양쪽 손목이 침대 기둥에 묶여 있어 놀랍기도 하고 궁금했다. 점심 때라서 간호사도 간병인 아줌마도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최근에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을 짐작으로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있으니까 간병인 아줌마가 오더니 묶은 끈을 풀어주고 갔다.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담당 간호사를 만나 물어보았더니 2개월 전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집어 먹은 게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치료를 하느라 온돌방에서 침대 병실로 옮겼다며 사연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똥도 집어서 입에 넣어예!"라는 간호사의 낯익은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온갖 회한이 밀려오며 슬픔과 번뇌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래도 특별히 나쁜 장기가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큰 누님은 예상대로 형님 내외와 '난순이'를 몰라봤다. 형님이 "오랜만이네요. 혜진이 엄마랑 난순이랑 함께 왔는데 반갑지?"라며 손을 잡으니까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을 듣고 싶어 재차 물으니까 신경질이 나는지 형님 손을 뿌리쳤다. 지난번에는 좋다면서 웃기도 한 터라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난순이'가 큰 누님에게 바짝 다가가 손을 살포시 잡으며 "언니, 나 '난순이'이야, 모르겠어?"라고 물으니까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하며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물어봐도 멀뚱멀뚱 쳐다보며 "몰라!"라고 하니까 난순이는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대 한쪽으로 비켜서서 눈물만 흘렸다.

 

수원에 사는 작은 아들집에 가는 길에 '난순이'를 만나고 오면 생활력이 강해 돈도 많이 벌었다며 질투가 나도록 칭찬을 해대던 큰 누님이었다. 객지에서 형제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게 불쌍하다며 친동생처럼 아꼈는데, 그렇게 아끼고 칭찬하던 '난순이'를 몰라보다니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를 또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몇 달 전 형님 내외와 아내와 왔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으면 큰 누님 특유의 미소를 짓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시간 가까이 있는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고, 말수도 현저하게 떨어져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셋째 매형이 돌아가셨다는 말도 해주고 싶었지만, 슬픈 소식을 들으면 속상해할 것 같아 참았다. 인지능력을 거의 상실한 환자에게 무슨 소식을 전하느냐며 생뚱맞은 소리라고 질책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맞다. 하지만, 큰 누님이 들었으면 깜짝 놀랐을 것으로 믿고 싶다. 억지라 해도 좋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도 있잖은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위대하고 감사해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누님, 갔다가 다음에 또 올게, 그동안 잘 있어!"라고 했더니, 개미 목소리처럼 작게 "가지마"라고 했다. 해서 "왜 가지 말라고 하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했더니 목에서 힘겹게 나오는 쇤 소리로 "아녀, 그려도 가지마!"라고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 곁으로 다가가 뼈만 앙상한 손등을 살살 비비면서 뽀얀 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그럼 나하고 함께 군산에 갈 거야?"라고 물으니까 표정이 바뀌면서 "그려 가!"라고 해서 눈물이 핑 돌았는데 어금니를 악물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다시 운전석에 앉은 '난순이'는 "오빠, 큰 언니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며 눈물을 흘렸고, 필자는 "만나면 안타깝고, 슬퍼할 상대가 있는 것도 행복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필자는 사막에서 바늘을 찾겠다는 심정으로 큰 누님의 회복 가능성을 믿고 싶다. 그래서 누님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찾아가 바싹 마른 손등을 비비며 눈을 마주치고, 통하지 않는 대화도 하려고 한다. 중증 치매환자이지만, 살아 있다는 자체가 위대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큰누님, #치매, #난순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