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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해 최근 5년간 수능 성적이 전격 공개되면서, 일선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초등학교까지 시끄러워졌다. 학생과 교사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지역별, 학교별 서열표를 받아들고 자기 학교 이름 어디 없나 하고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탄성과 한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향후 우리 교육의 무한경쟁을 더욱 심화시키고 학교 간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시킬 게 분명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서열표에 눈길이 가는 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드디어 올 게 왔다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이들도, 명백한 불법이자 우리 교육 현실을 왜곡시키는 조치라며 반박하는 이들조차도, 자기 학교의 서열은 모두 궁금해 했다.

이번에 공개된 지역별, 학교별 서열은 우리가 지닌 '상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부유층 자제들이 대부분인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가 성적이 높으리라는 것, 그리고 지방보다는 서울 소재 학교가 나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최상위권 수험생을 배출한 상위 100개 학교 중 서울 소재 고등학교가 무려 절반에 가까운 43곳이다. 여기에다 경기도와 지방 광역시 소재 학교를 보태면 거의 100%다. 나머지 지역은 사실상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다.

전남은 2곳이고, 전북은 달랑 한 군데인데 그나마 전국 단위로 모집하는 전주의 자립형 사립학교의 몫이다. 제주도 한 곳. 충북은 아예 단 한 곳도 없어, 현 정부 인식대로 점수와 서열만을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면 이 지역들은 '교육의 불모지'인 셈이다.

'톱10'은 모두 특목고 차지이고, 차순위도 자립형 사립학교 일색이다. 예외로 지방 몇몇 외고를 앞선 일반고도 있긴 하지만, 그나마 서울 강남권 소재 학교가 태반이다. 결국 일반고는 확실히 '2류' 학교로 굳어졌고, 지방과 전문계고는 '3류'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 '논외'의 학교로 낙인 찍혔다.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게 뻔한 걸 알면서도, 수능 성적을 공개한 언론사들은 순수한 의도(?)였다고 발뺌하려는 듯 발 빠른 조치를 내놓고 있다. 예외로 서열이 높은 지방 학교를 찾아 '비결'을 소개하는 기사를 앞다퉈 싣고 있는 것이다. 해당 학교장과 학생들의 화기애애한 사진을 올려놓고, 높은 점수의 비결이랍시고 학교들마다 '야자'와 '일요일 등교' 등을 실시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소규모 학교의 구조조정 방안이 발표되었다. 학생 수 60명 이하 학교 총 106곳을 통폐합하고, 기존 학급 수를 기준으로 했던 방식을 접고 학생 수에 따라 교사의 수를 조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전출 인구가 많은 농어촌 지역 학교가 통폐합되면서, 교사 한 명이 많게는 대여섯 과목을 가르치는 상황에 직면한다.

정부 발표는 이번 수능 성적 공개로 인해 그렇잖아도 '교육 불모지'로 낙인찍힌 곳의 교육 여건을 더욱 악화시킬 게 불 보듯 뻔하다. 교육 복지 차원에서 열악한 곳에 지원은 해주지 못할망정 이 구조조정 방안은 노소를 떠나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을 버리라는 선언에 가깝다. 그렇잖아도 이미 적잖은 농어촌 학교 아이들은 도시 학교로 가고 싶었지만, 형편상 나가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다닌다고 여길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지방은 서울을, 일반고는 특목고를 따라잡기 위해, 보충에 심화, 야자와 주말 등교, 월말고사와 주말고사에 이르기까지 처절한 학습노동과 끝 모를 경쟁의 신호탄이 쏴 올려졌다. 웬만해서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아니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도, 학부모도, 심지어 교사들까지도 어쩌지 못하고 '대세'를 따라가고 있다.

어차피 공개된 이상 좋게 생각하자며 학교장은 교사들을 다독인다. 서열표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린 학교는 명성을 이어가자고, '탈락한' 학교는 100위 안에 든 학교를 내심 부러워하며 끝내 이름을 올리자고 결연한 다짐을 하는 것이다. 일제고사와 수능 대박을 향한 그 다짐은 결국 '야자' 시간 연장, 주말 등교, 문제 풀이 중심 수업 강화 등으로 나타난다. 이삼 십 년 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왜곡된 교육의 악순환, 그 자체이다.

언론이 무리수를 두며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자료를 굳이 내보낸 까닭이 무엇일까. 단언컨대 대다수가 수긍하는 '공식적인 근거'를 들이댐으로써 우리 사회의 승자독식 구조를 공고화하려는 술책이다. 시쳇말로 '아니꼬우면 1등하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서열표에 끼지 못하는 절대 다수의 학교에 좌절감을 안기고, 특히 맨 밑바닥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지방의 전문계고에게는 '확인 사살' 행위와 다름 아니다.

아무리 피와 땀을 쏟아도 이내 한계에 부닥치고 마는 냉정한 현실을 기성세대는 물론 아이들도 이미 알아버렸다. 수 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교를 불문하고 교실마다 가장 흔했던 '하면 된다' 류의 급훈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렸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꿈이 한없이 소박해지더니(?), 특목고와 명문대를 진학하고 나아가 판검사와 의사가 될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번 수능 성적 공개로 교사들의 수업 부담과 아이들의 학습노동 강도는 더욱 세질 게 분명하지만, 아이들 꿈은 되레 더욱 더 소박해질 것이다. 학교가 신분 상승의 통로가 되기는커녕 신분을 고착화시키고, 성공과 행복을 가르치기보다는 체념과 좌절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곳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언론에 발표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서열표를 향한 눈들이 그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불과 한두 해만에 서열표에 적힌 학교별 순위가 아이들과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의 '품질'을 규정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학교'와 '교육'이 어느새 불편한 단어의 조합이 돼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수능성적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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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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