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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의 절정인 시월, 더없이 산책하기 좋은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요즘은 아무 편한 신발이나 신고 걸을만한 곳들은 걸어 다니곤 합니다. 어제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돌다가 버스를 타기 위해 한 정거장 정도 용산역으로 걸어갔습니다. 보통 남편과 아이는 사이좋은 형제들처럼 저들끼리 놀면서 (때로는 싸우면서) 걸어가기 마련이라 저만 떨어져서 걷기 일쑤입니다. 그때 외국인 하나가 자전거를 제 앞에 멈춥니다.

"실례지만, 영어 하세요? (물론 영어로)"
"아, 네. 물론이지요. 뭘 도와드릴까요?"

가끔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해서 영 불편하더라 등등 워낙 투덜대는 말들이 많아서 영어를 조금 하는 저는 최대한 친절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늘 웃고 잘 대해주는 편이랍니다. 이 자전거를 탄 남자의 설명인 즉, 이 주변의 아파트에 임대계약을 했는데 아직 이사는 안 했고 한번 보러 왔는데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좀 같이 찾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참고로 용산 국립박물관 근처 이 동네는 재개발로 온갖 종류의 '파크'들이 잔뜩 들어서 있더군요.)  친절한 아줌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렴 이 복잡한 신축건물들 사이에서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고 응수해줍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족들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네요. 큰소리로 가족들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잠깐 일루 와. 이분이 길을 가르쳐달래."
 
남편과 아이가 오자 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기다리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이 외국남자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문자를 못 찾는 시늉을 하네요. 당황한 듯 외국인은 제게 말합니다.

"이상하네. 문자가 없네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 정말 괜찮아요. 얼마든지요."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잘 가라" 인사까지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작년이던가요, 강호순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여러 여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는데, 살인자의 차를 탔던 여성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 생긴 외모와 멋진 차에 현혹되어서 희생되었다는 말도 있었고요. 그 즈음에도 저는 관악산 자락의 서울대를 산책하곤 했는데, 한 번은 캠퍼스를 지나던 차가 멈추고 제게 호암교수회관을 물었습니다. 캠퍼스가 워낙 큰데 겨우 설명하고 나니 다른 차가 또 멈추어 길을 묻네요. 저는 다시 설명하다가 성에 차지 않아서 덥석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 앞이니 제가 같이 타서 좌회전하는 데까지 보여드릴게요."

남자의 동의를 구할 새도 없이 제가 조수석에 타서 방향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곤 안내하고 금세 내렸는데 남자가 얼떨떨한 것 같기도 하고 제게 고맙다고 인사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초등학생인 아이와 같이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로 엄마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주의사항이나 당부가 더 많은 재미없는 대화이지요. 오늘은 택배 얘기를 하다가, 아이에게 혼자 있을 때는 택배를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택배를 가장하고 다른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으니까요. 아이도 벌써 택배라고 속이고 전도하러 다니는 사람이 집안으로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했던 적이 있다고 말하는군요.

아이와 다시 일반적인 안전 얘기를 하다보면,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물어보면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더라도 절대 차에 타거나 따라가지 마라, 낯선 사람의 말을 믿지 마라 등등 이런 말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제 자신의 경솔함이 생각나자 두려워집니다. 저는 외국인이 집을 찾아달라면 집안까지는 아니더라도 동 앞까지는 데려갔을 터이고, 학교 캠퍼스라고 하지만 낯선 이의 자가용도 타고 했으니까요. 다행히 제게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강호순을 만난 여자들도, 혹은 마음이 착하고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 아이들도 그런 끔찍한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되고, 눈길도 웃음도 함부로 주지 말아야 하는 도시, 낯선 이가 도움을 청하거나 길을 물어도 묵살해야 현명해지는 도시, 사람은 넘치나 사람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이 도시에서, 아직도 순진한 (혹은 바보같은) 아줌마는 고민합니다. 내일도 누가 길을 물으면 어쩌지?
첨부파일
은미산책.jpg


태그:#강호순, #안전,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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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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